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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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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사랑을 굶긴 죄 크리스천헤럴드2024.04.13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인지 돌아보면 마흔쯤 인 것 같다. 삶의 무게가 가장 버겁게 느껴졌던 때이다.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시점이다. 책임도 많았다. 위아래로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었다. 내 아버지를 가장 많이 이해한 것도 이때쯤 이였다. 짊어져야 하는 짐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이때가 내곈 가장 힘든 때였다공교롭게도 내가 가족을 가장 힘들게 한 것도 바로 이때다. 내가 힘드니 그 영향이 주위에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어느때 보다 나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 중 제일 미안한 것이 아이들이다. 부모가 전부인 어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과 애정을 주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은 그리 큰 아쉬움이 아니다. 없어서 못해준 것은 아이들도 크면 이해한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줄 수 있는 사랑을 굶긴 것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주려서 생긴 마음의 병이다. 한 공상과학 영화를 본적이 있다. 전투원인 주인공은 작전 수행 중 발견한 아기를 키우게 된다. 이 선택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옮은 결정을 했지만 그로 인해 힘들어진 그는 방황했다. 자신이 힘드니 양딸에게 잘해 주지 못했다. 여느 날 처렁 술집에서 실의에 빠져있는 그를 찾아온 아이를 귀찮아 하며 내보냈는데, 잠시 후 우주선 폭파로 인해 양딸을 잃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우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생존 가능성도, 찾을 가능성도 희박한 딸을 찾기 위해 그가 우주를 떠돌며 찾아 해매이는 그런 스토리다. 흥행작도 아닌데 기억에 남는 것은 내게 어필되는 부분에 있어서 이다. 딸을 잃은 슬픔도 크지만, 하필이면 그가 힘들어서 돌보아 주지 못할 때 그렇게 된 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만약이라도 찾게 된다면 그때 대했던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때 힘들어서 그랬다고 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무의미하게 우주를 떠도는 그의 행동은 사랑을 굶긴 것에 대한 속죄로 보인다. 내가 아이들에게 늦게나마 노력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힘들었을 때 보여준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다.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의에 빠져서 그런 것이었다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이다. 힘들다는 핑계로 주지 못한 사랑을 이제라도 주고 싶어서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이 실수 만큼은 만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옳은 일을 할 기회를 저버리는 것을 죄라고 했다 (약 4:17). 이 때를 놓치면 어쩌면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만큼 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모든 순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셨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제나 사랑과 온유로 대하셨다. 힘들 때도, 지치실 때도,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해도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이전과 똑같이 사랑하셨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당하는 순간에도 그를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구하셨다. 피 흘려 죽으시면서도 남은 자들을 위로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끝까지 사랑하셨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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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5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증폭되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4.13
    요즘들어 ‘사랑’ 이라는 단어를 묵상함에 있어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진짜 사랑은 점점 증폭 되어 진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짜 사랑엔 과거란 없고, 기약없는 미래도 없는 법이다. 가장 큰 사랑 역시 ‘지금’ 이며, ‘현재’ 일수 밖에 없다.얼마전 올해의 사순절과 부활주일을 지켰는데, 그 기간 중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가장 많이 입에 담았던 단어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부활과 십자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지난주 엘에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부탁을 받고 설교를 하는 시간에 성도들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예수님의 사랑의 가장 드라마틱한 클라이막스는 뭐라고 생각하세요?그랬더니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십자가’ 입니다, 라는 대답들이 들려왔다. 올해 부활주일 전 까지는 필자 역시 예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십자가 라고 생각해 왔었고, 그 신념 이랄까? 여튼 그 생각이 평생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하지만 여러 순간들을 통해 성령님이 조명해 주신 사실 한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관한 것 이었다.  아모스야, 너는 정말 십자가가 예수님 사랑의 클라이막스 라고 생각하니?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부터 지금까지 그 오랜 세월동안 더 큰 사랑을 행하신 적이 없으시니? 라고 물으시는것을 듣는 영적체험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그 문제에 관해 여러날에 걸쳐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여러가지가 새로 정리가 되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야기 하면 너무 길어서 다 서술할수는 없지만, 간단히 요점만 말하자면, 크리스찬의 삶은 그저 예수님 믿고 죽으면 천국가는 것, 그것이 복음의 99%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종교적인 생각 이라는 것이다.만약 그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십자가가 예수님 사랑의 최고 클라이막스 라고 얘기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천국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전까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떤 의미란 말인가?생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성령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삶의 지향점이 아니던가?우린 오늘도 그 삶을 살아가고 있고, 놀랍게도 그런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증폭된 사랑으로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우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더 자세하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사랑 하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하셨고, 그것으로 사역을 마치시고 천국 보좌에 올라가셔서 뒷짐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시며 내가 걷는 길, 살아가는 삶에 함께 하시되, 할수 있는 가장 큰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요 복 임을 잊지말자.요한복음13장 1절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아, 정말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의 사람들의 범주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음이 기적이 아닌가? 그리고 나 역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에 어찌 감동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성경에 있었던 이야기들과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으로 다 말했노라 말하지 마라.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더 증폭되는 그런 사랑이며, 그 사랑은 바로 지금 나를 향해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란 사실에 아멘! 하는 자들은 복이 임할 줄 믿는다.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서너구절을 암송해 보자. 이 말씀의 핵심 메세지는 ‘명령’ 인줄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이 더 크게 눈에, 마음에 다가오는 것을 경험한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라는 사랑의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Again, 진짜 사랑은 점점 증폭된다. 진짜 사랑은 지금이 클라이막스다. 그랬기에 그 사랑의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빌라도의 법정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곳으로 찾아가셔서 만천하가 떠들석하게 승리를 선포하시지 않으셨다. 대신에, 두려움과 절망가운데 떨고있던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들을 바라보시며 나지막히 미소지으며 한마디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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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미래 준비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다음 세대가 없어지는 교회의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니다. 이미 그 현상들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위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 특히 다음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부분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면, 너무나 그 이유가 많고, 그 이유를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것들도 있지만 어느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도 하다. 그 이유 중 어느 것들은 교회가 감당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나, 어느 것들은 교회가 전혀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물론 사회가 세속화로 변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교회가 강조하는 진리와 구원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뿐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의 확산 영향도 오히려 교회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개인적인 이유도 많이 있다.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소속감이나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교회가 너무 정치적으로 되어 영적인 성장이나 신앙적 성숙보다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목회자나 교회의 직분자들의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이중적인 말과 태도, 세상 문화와 너무나 동떨어진 듯한 교회의 문화와 설교 등에 지루함을 느끼는 등의 문제들은 너무나 아쉽다.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해보자. 교회는 변화를 위하여 무엇을 해볼 의지나 있나? 교회는 혹시 ‘빅브라더’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의 방식대로 교회가 여전히 각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이 따르기를 바라며, 자신들은 무엇이든 모든 것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그래서 여전히 뜻맞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걱정하며 토론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할 만큼 했다고 만족하지 않을까?만일 교회가 계속 이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 교회는 텅 빈 건물만 붙들고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가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교회는 그동안 수없이 ‘한 영혼’을 구호로 외쳤지만, 사실은 구호로만 그쳤던 한 영혼에 이제부터라도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교회는 이 구호를 습관처럼 외쳤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말하지 못하였다. 한 영혼에 집중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치와 그 가치에 맞는 영적 성장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과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그리고 각 개인에게 적합한 교회의 영적인 돌봄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모두 같은 영적인 과정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각 개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맞춤형 돌봄과 양육의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그동안 교회는 일방적으로 준비한 프로그램에 성도들을 참여시켜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교육과 훈련을 해왔고 상당한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각 개인의 영적인 성숙도를 분석하고, 그 개인의 영적인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성장 배경 등을 파악해서 그 한 사람에게 적합한 양육과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 한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그 한 사람과 함께 말씀 묵상하고, 그 한 사람과 함께 정기적인 상담과 피드백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신앙적인 공동체에 참여하고 형성하도록 돕고, 그 한 사람이 잘 세워져서 다른 한 사람을 양육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회는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한다.교회는 예전의 좋았던 때를 그리워하고 그때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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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
    [오피니언] 샘신칼럼 - 죽음과 부활 (Death and Resurrection)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만일 지금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 설 떄 돈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정말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 앞에는 무력합니다. 움켜 쥐고 살았던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진실해집니다. 그리고 깨단게 되는것은 자신이 바보처럼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속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꽉 붙잡고 살았왔음을 죽음 앞에 와서야 깨닫게 된다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큰 사업을 하며 분주하게 살던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기의 인생을 정리합니다. 그동안 너무나 바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바쁘다는 것은 삶에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게 너무 분주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배치해야 합니다. 이 사업가도 그리하게됐습니다.이 사람이 우선순위를 재배치함에 있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내가 죽었을 때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는 바로  그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할 것을 결심합니다.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님 밖에 의미가 없습니 다.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추구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죽음 앞에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더 빛나는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이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부활은 죽음 앞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부활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감격으로 다가오려면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죽음의 건너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성경적 의미를 아는 사람 만이 부활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며,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 집으면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실이며, 우리의 부활 역시 사실입니다. (The Lord’s resurrection is true, and our resurrection is also true) 어느 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One day we will realize that we are the most blessed people)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 죽음에 넘기 운다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다닙니다. (Death and resurrection always go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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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 부흥의 시작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3.30
    1492년 스폐인령의 지브롤터 해안 끝에 작은 팻말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Ne Plus Ultra / No More Beyond)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 세상의 땅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대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곳을 통하여 세상의 끝을 넘어갔고,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신대륙이 펼쳐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후부터 그곳에 세워진 팻말의 문구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맨 앞에 씌어진 ‘Ne / No’ 를 떼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너머에 더 많은 것이 있다’(Plus Ultra / More Beyond) 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당하면 한없이 슬퍼하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강조하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곧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대면하여 보았지만 사실을 믿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해 주셨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이후에 성령충만해진 제자들은 나가서 ‘예수 부활하셨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소식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매주일마다 예수는 살아계심을 예배로 드립니다. 2천년 전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명의 사람들로 부터 시작된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라는 부활의 소식은 놀랍게도 코리안 디아스포라 750만 명과 1천만 대한민국 성도들, 그리고 온 세상의 25억 명의 크리스쳔들이 이 땅에 존재하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냐고 의심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 세계의 지상의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의 삶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제가 섬기는 원웨이 쳐치는 해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체 교인을 비율로 볼 때에 60% 이상 참석하여 큰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주 먼 거리에서는 인근 지역 교회로 출석을 합니다. 주차장 밖에서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차량들, 성전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성도님들, 서로 손을 잡아드리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오르시는 권사님들의 새벽 모습을 보면 늘 새벽기도에 힘쓰시던 앞서가신 기도의 용사들이 생각납니다. 미리와서 찬양을 준비하는 분들, 은혜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합심기도로 주여~! 외치며 구하고 찾는 간절한 기도가 성전에 가득 울려퍼집니다. 저희 부부도 25마일을 달려가야 하지만 성도들이 보고 싶고 기도드리고 싶어서 빨리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아내도 부활주일 달걀을 준비하려고 벌써부터 기쁨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에 해마다 부활절 달걀 메시지를 받고 성장한 타주에 있는 자녀들에게서도 ‘아빠 부활주일 메시지가 뭐냐?’고 내용을 미리 알려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성도님들은 부활절 축하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교회를 중심으로 부활의 기쁨속에 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부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우리도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목숨을 걸고 이것을 증언했습니다.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합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전해지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마다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기쁨이 교회와 가정마다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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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성직(聖職)”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아시다시피 필자는 주중에 식당 두 곳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주일에 교회에서 하는 사역과 마찬가지로 성직으로 여긴다.2년 반 전쯤부터 일하고 있는 카레집에는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 wait staff로 일을 하고 있다. 대부분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학생 청년들인데, 조금 친분이 쌓인 후로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한가지 공통점(?)이 그들에게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어보면 다들 크리스찬 이라고 대답들은 하는데, 어느 교회 다니냐 물어보면 교회는 딱히 다니지   않는다고 대답들을 한다그 청년들도 필자가 목사 인것을 알고 있는 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고, 급기야 몇주전에 그 청년들 중 2명이 날더러 모임을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기꺼이 해주기로 약속을 하고 지난 주일 아침에 카레집 오픈하기 전에 그곳에 모여 첫 모임을 가졌다.무슨 이야기로 모임을 시작할까 생각하던 중에 첫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어떤 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니?그 질문에 한 청년은 교회 열심히 다니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라고 대답을 했고, 다른 한 청년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편안하게 잘 지내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 라고 대답을 하더라. 대답이 맞다 틀리다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대답들을 들은 직후에 곧바로 한마디 해 주었다하나님은, 너희들 한사람 한사람, 너희 존재 자체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 이란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너희가 드리는 어떤 것들, 너희가 행하는 어떤 행위들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작정하고 살아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라고도 말해 주었다. 청년들의 반응이 어땠겠는가?  의외의 대답에 덤덤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둘 다 그러겠노라 긍정의 고개를 끄덕 거린다. 주일의 셋이 만난 그 모임을 난 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이름도 간판도 없는 모임 이지만, 단 세사람이 모인 모임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고 주님도 함께 하셨음을 믿기에 그 모임은 분명 교회 모임이었다. 청년들이 교회에 수년간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한마디도 지적하거나 정죄하지 않았고, 동시에 주일 아침에 필자와 만나는 그 모임에도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와야 한다는 약속도 받지 않았다.너희들 하고 싶은대로 하되, 한가지만 부탁하자, 어떤 선택이 너희의 삶이 좋아지겠는가 너희 스스로가 생각하고 선택하라고 말을 해 주었다. 이번달 칼럼에서 필자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나는 일하는 목사다! 그 의미가, 누구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내가 일해서 내가 벌어서 먹고 살고 주말에는 사역을 하는 사람 이라는 말이 아니다. 내 일터가 사역지이고, 내 일터가 선교지 이고, 내 일터에서 만나는 영혼을 돌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라고 믿고 일터에 나간다. 이와 비슷한 모임이 두개가 더 있으니, 어떤 면에선 필자는 세 곳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셈이라 우겨보고 싶다. 물론 세 곳 모두 이름도 간판도 없지만 말이다. 오라 오라 해서 오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일부러 찾아 가는 것도 녹록치 않다. 지금의 시대는 내 일상과 사역지를 구분짓기를 멈추고, 내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들에 순종하는 이들이 아주 많이 필요한 시대라 믿는다. 교회가 세상속으로 더 뛰쳐 나가야 한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뛰쳐 내 보내신 것 처럼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성직이다.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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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노이즈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세상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다. 그중 들어야 할 소리가 있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다. 들어야 할 소리는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소식이나 정보를 전해주는 말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는 아무런 의미나 유익이 없는 말이나 정보이다. 이런 것들을 다른 말로 노이즈라고 부른다.우리가 피해야 할 노이즈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뻔한 소음이다. 혼잡한 교통 소리,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 공사장의 굉음과 같은 듣기 안 좋은 소리는 귀를 막고 창문을 닫고 차단하면 된다. 이런 노이즈는 구별하기 쉬워서 무시하고 피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분별이 어려운 노이즈다. 언뜻 보면 중요해 보이는 말이나 정보이다. 예를 들어 신뢰할 내용만을 전할 것 같은 뉴스나 기사이다. 제목이나 헤드라인을 보면 중요할 것처럼 보여서 읽어보면 쓸모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경우가 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말도 잘 걸러 들어야 한다. 대부분 한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고, 입장에 따른 치우친 의견인 경우가 많다. 한사람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말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파장을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말을 듣고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노이즈에 불과한 소리를 계속 듣다 보면 분별력을 잃게 되고, 소중한 시간과 자산을 잃을 수 있다. 좋은 투자가 있다는 소리에 혹해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큰 돈을 투자해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있다. 무턱대고 비방하는 소리에 내 목소리도 함께 높여 누군가를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게 할 수도 있다. 때론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잘못된 말과 정보이다.오늘날 언론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 이제는 소셜미디어와 개인방송까지 가세해서 수많은 말과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모두 나름 중요하다 생각해서 각자의 생각과 정보를 전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나 조회수를 늘리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인 경우가 적지 않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 중 내가 정말 들어야 하고, 마음에 담을 소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어느때 보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넘치는 가짜뉴스, 편파된 보도, 잘못된 정보, 무의미한 말들 등등, 이 세상은 온갖 쓸모없는 이슈들과 정보들로 가득하다. 대부분은 관심을 갖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노이즈에 불과한 것들이다.노이즈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 소리 저 소리 다 신경 쓰고 듣고 살다 보면 시간과 삶을 허비하게 된다. 생산적인 삶을 살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과 자산을 잘 관리해야 한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구별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가치 있는 소리만 듣고 나머지는 노이즈처럼 무시해 버려야 한다.예수님 주위에는 늘 수많은 소음들이 맴돌았다. 가시는 곳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자들의 소리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근거렸다. 그가 가시는 길을 방해하는 소리도 있었다. 사단은 예수님을 끝까지 시험하며 십자가가 아니어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무시하셨다. 들어야 할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꼭 가셔야 하는 길을 방해하는 노이즈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각자가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이 길을 방해하고, 집중을 흩트려 놓고, 삶을 낭비하게 하는 소리들이 우리 주변에 늘 있다. 뒤를 돌아보게 하고, 소신을 흐리게 하고, 좌로 우로 치우치게 하는 소리들이다.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노이즈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소리는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인도하시는 분의 목소리이다. 수많은 노이즈 가운데 그분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들어야 한다. 내가 가장 집중해서 들어야 할 소리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끝까지 갈 수 있는지 알려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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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홍보의 핵심은 관계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한복음 1:45-46)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것을 보면, 무엇보다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예수님께 나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관계를 맺고 서로 신뢰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점진성이다. 전도의 점진성은 내 삶 속에 관계 맺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내가 누구인지, 신뢰를 쌓아가면서 시작된다.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점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낚시 전도법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우리가 누구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말할 때, 보통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가족관계, 친구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 전해지는 데 있어 이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복음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전해지기가 쉽지 않다.이 가까운 관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이 신뢰가 전도에 있어서 참 중요하다. 전도에서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신뢰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마케팅에서도 판매자와 고객 사이에 안정적인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코 고객으로부터 구매력을 끌어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도 이 신뢰가 없으면, 환자가 의사의 진단과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고 치료의 효과도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미 신뢰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면 형성된 신뢰 덕분에 좀 더 쉽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지 못해 신뢰가 없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구축할 방법을 만들어야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신뢰를 구축하여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를 쌓으므로 종국에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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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라.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자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보아야합니까, 한 사람으로 보아야합니까?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탈무드는 “두 개의 머리 중 한 쪽 머리 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 라. 그러면 틀림없이 깜짝 놀라면서 어떤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만일 똑같은 반응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합니다.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유태인 족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전쟁이 벌어지고 천재 지변이 일어나고 어수선한 일이 일어났을 때 깊은 동족애를 가지고 가슴 아파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도우려고 힘쓰는 사람이 바로 유태인이다,  반면에, 그런 일이 일어나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 라 "고 권면합니다. 형제의 아픔에 동참한다는 것, 형제의 성공에 동참한다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교회란,  한민족이란, 이렇게 같이 공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너무 안일한 삶을 살고 있었던것은 아닌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되물어 보지않을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자녀교육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었던가요? 캘리포니아에 학부모의 권리와 자녀들의 안전을 보호할 새로운 선한 법이 절실 할 때입니다. 다음세대를 지키기 위해 우리 한인 크리스찬들이 아니 우리 모두가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가정 내 자녀만이라는 안일한 세월속에 캘리포니아에서, 지난 13년간 우리 자녀들, 학부모, 가정, 교회들을 위협하는 악법들이 쓰나미처럼 통과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내 자녀 일, 교회, 가정의 기도제목들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통과된 많은 악법들은 자녀 정체성(젠더, 성향:SOGI) 관련하여 학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상황에서 조차 학부모들을 제외시킬 뿐 아니라, 학교에 동의하지 않는 학부모들은 공식적으로 신원조회 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울고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올 11월 시행될 선거에 주민발의안을 올리기위해서는 올해 4월 18일 까지 CA 정부가 인정하는 유효한 서명 총 550,000 개 필요합니다. 여러 이유들로 무효화 (invalid)시키는 서명들까지 감안한다면 총 700,000 (칠십만)개의 캘리포니아 시민들의 서명이 필요합니다.한인 커뮤니티의 목표는 총서명의 1/10 인 5만 5천개에서 7만개 이상의 서명을 받고자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우리 모두가 나설 때입니다. 누군가를  알고자 하려면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 그를 경험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길을 가다가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3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위대한 결단, 혹은 위대한 선택을 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대한 결단이 없는 한, 위대한 선택이 없는 한 위대한 인생은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위대한 사람들은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위대함과 평범함의 차이 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에 자신의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하게 됩니다. 세 번째 특징은 위대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고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시험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 했느냐는 점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70 점을 맞은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채 90 점을 맞은 것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결국 뒤지게 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결국 지도자가 됩니다. 자녀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 이번 주민발의안 신청이 이루어질수 있기를 위해 진행되고 있는 서명운동에 우리 모두의 최선이 모아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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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밥값도 못하는 저에게 전도할 능력을 주옵소서!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새해 사역의 우선순위를 전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교회 리더십들도 한마음으로 응원해 주셨기에 너무 감사했고 각자의 의견을 피력해 주셨습니다. 늦은 회의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책장에서 전도에 관련된 서적을 찾고 있는 제 자신을 돌아보며 ‘피식~’ 웃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도부터 하자고 외쳤던 제가 먼저 책장에서 관련 서적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문지식과 전문가의 도움을 무시해선 안되겠지만 기도보다 책을 우선하다니..이런 모습을 누군가 곁에서 지켜본다면 혀를 찰 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주께서 동행해 주시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길 기도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나타난 나의 실제 모습을 보며 내 뼛속의 습관에 부끄러움이 널뛰고 있습니다.결국 여러 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전도의 내용은 불변해도 방법은 시대와 지역과 대상에 따라서 전략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전도의 방법 때문에 전도의 내용마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전도의 방법을 새롭게 바꾸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라는 김 두식 목사님의 글을 발견했습니다. 최근에 ‘복음도 시대와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썼던 컬럼 내용과 일맥상통하면서 마음에 격한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고(마태 28:10~20),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성도의 최선 최고 최후의 사명입니다. 매일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고 복음과 은혜가 전해지도록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또 예수님을 전하고 믿으라는 설교와 글을 계속 쓰면서도 정작 저는 지난해 한 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알면 창피스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목사의 사명이 전도인데 한 명도 못했습니다. 저는 밥값도 못하는 목사입니다.이단들이 우리보다 전도를 더 잘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결국 이단에 속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서, 너무 미안해서 울며 토악질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순수하게 예수님 밖에 모르던 친구와 교인들이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솔직히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목사 선교사인 제가 복음을 더 간절하고 강력하게 전하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마침 오늘 새벽기도는 예레미야 23장인데 말씀에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영혼을 살리지 못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레이너 척도’라는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의 반응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의 전도 전문가 탐 레이너(Tom S. Rainer)는 The Unchurched Next Door(Zondenvan,2008)가 각 불신자 그룹의 특징과 비율을 담은 ‘레이너 척도’를 그린것인데 불신자를 U5에서 U1의 5단계로 구분하고 수치를 냈습니다. U는 불신자(Unchurched person)의 약자로 U5는 복음에 적대적인 그룹으로 5%정도, U4는 복음을 거부하는 그룹 21%, U3는 복음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룹 36%, U2는 복음에 우호적인 그룹으로 27%, 마지막으로 U1은 복음에 매우 열려있는 그룹으로 11% 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탐 레이너는 불신자들의 반응 태도는 거주지역이나 인종, 성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오렌지카운티 대형 한국마켓들이 있는 사거리에는 날마다 전도하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하는 무명의 거리 전도자들에게 감사와 격려,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는 어느 시대든지 마귀의 집중 공격과 거센 도전을 받아왔습니다.우리가 하루 세 끼를 챙겨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전도는 생활속에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욕하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핍박해도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더 간절하고 힘차게 부끄러움 많은 나를 대신해서 목이 쉬도록 외치는 분들의 전도열정을 존경합니다.전도는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한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올해는 전도의 능력을 더욱 간구하려합니다. 골로새서 1:29 말씀처럼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온 성도와 지상의 교회가 참여하는 전도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히 느낍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믿고 순종하면 전도의 아픔과 실패도 영적근육과 경험의 산물로 삼아서 부흥의 성장동력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도 살고 이웃도 살리는 운동입니다. 주여, 밥값도 못하는 저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옵소서! (더 기도! The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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