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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두 번 고난 당하신 예수 크리스천헤럴드2023.03.28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였다. 복음서 강의 시간이었다. 마침 부활절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날 수업은 신학공부 보다는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 묵상하고 교회에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교수님은 로마의 가장 가혹한 형벌인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이 겪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형벌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당하신 수많은 잔인한 고문과 끔찍한 고통을 생각해보며 모두 조용해졌다. 그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듯 눈시울이 붉어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득 한 학생이 교수님께 참으로 뜻밖의 질문을 했다. “정말 예수님은 아셨을까요...?”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잠시 당황한 듯 말이 없다가 이내 침착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적 근거로 예수께서 그가 당하실 일들을 모두 알고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일부 학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는 듯이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알고 있는 이 기본 신학을 정말 신학 대학원생이 몰라서 질문한 것일까. 그 학생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내가 아는 이 사람은 절대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어이없는 질문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신학적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생각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당할 일을 몰랐다면 모를까 어떻게 알면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스스로 겪으려 할까 하는 인간적인 생각이 드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문득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질문이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질문을 한 심정은 이해가 간다.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알면서도 선택하신 것에 대해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 가사를 쓴 사람도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가 막혀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당하실 일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예지의 능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아셨고 정확하게 예언도 하셨다. 베드로가 어느 시간에 몇 번을 부인할지, 십자가에 어떻게 못박혀 죽을지 이미 아셨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도 미리 아셨다. 마지막 만찬에서 “이것은 나의 살과 피” 라 하시며 자신의 살이 갈기갈기 찢기고 피를 쏟으실 것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고통받고, 어떻게 죽으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어날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모두 조금도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치 경험하신 것처럼 일어날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신 것을 볼 때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정도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을 것이다.  알고 당하는 고통은 모르고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 주사 바늘이 몸을 찌르고 들어올 거라는 두려움이 공포를 유발하고, 당할 위치와 시간을 예측할 수 있기에 온몸의 신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고통이 더 가중되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의사가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주사를 놓을 때 생각과 시선을 분산시켜 집중을 방해하고 주사를 넣어 아이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이유가 그렇다. 모르고 당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미 당한 후에는 통증은 남지만 앞으로 겪어야 한다는 공포는 없기 때문이다.  심인성 통증이란 증세에 의하면 생각만으로도 고통을 유발하는 의학적인 현상도 있다. 힘든 일을 또 해야 할 상황을 통틀어 당사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예수님이 겪으신 것이 그와 같다. 예지의 능력으로 당하실 고난을 한번 겪으셨고, 다시 또 한 번 몸소 겪으신 것과 다름이 없다.  또 다시 부활절을 앞두고 있다. 예년처럼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때이다. 사람이 한 번만 겪어도 끔찍한 고통을 이미 경험한 것과 다름없이 아시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겪으셨다는 그 사실은, 나를 살리기 위해 하신 일이 내가 아는 그것 이상이란 걸 알게 해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무게를 더 깊게 생각해보게 한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은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0:18-19) 조영석 목사 choyoungsu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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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순종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22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7-30) 손녀 애리가 50 pound  나간다고 한다. 그런대 내 등에 50pound  짐을 지고 있다면 많이 힘들고 무거울 것이다. 50 pound  손녀를 업고 있다면 무게는 같을지 몰라도 다를 것이다. 같은 50 pound  나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짐이지만 그 짐을 대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7-30절은 모든 사람이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28절의 짐과 30절의 짐이다. 몇 가지로 차이가 있음을 본다. 28절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을 수고하고 무겁게 만드는 짐이다. 즉 28절의 짐은 마음에 쉼을 주지 않는 짐이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어 한다는 것은 28절의 짐을 지고 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들이 28절의 짐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반면에 30절의 짐은 가볍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이 든다는 것은 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짐의 무게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엄청난 짐처럼 보이지만 막상 당사자가 그 짐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짐이 28절의 짐이냐 아니면 30절의 짐이냐의 차이이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본문 말씀의 일차 청중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말씀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주어졌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일차 청중을 알려면 이 말씀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마11:20) 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책망”임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권능을 본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면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열매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 같으면 낙심할 환경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사역의 열매가 없으면 낙심을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감사를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왜 낙심하지 않고 감사했는지를 찾아야 한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낙심하지 않고 감사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사역의 성공을 기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기준이셨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았기에 낙심하지 않고 감사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소원이요 기준이요 가치라면 우리에게 어떤 환경과 사건들이 찾아와도 낙심, 분노하지 않고 감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에 그러하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힘들어 하는 성경적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힘든 이유를 회개와 순종에서 찾지를 않고 다른데서 그 이유를 찾는다. 무엇보다 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배울 수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와 순종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오지를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보면 우리에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악한 자는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담과 하와는 그 거짓말에 속았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면 더 힘들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고 산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듯이, 그래서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쉽듯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창조되었고 순종하고 사는 것이 훨씬 쉬운 삶 임을 믿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주님의 짐으로 바꾸어 주시고 함께 져 주시기에 마음에 쉼이 있고 그 짐은 가볍다. 그래서 주님은 30절의 짐이 “내짐”이라고 말한다. 무거운 내 짐을 가벼운 주님의 짐으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마음의 쉼은 그렇게 회개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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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 칼럼 - 이기적인 지도자 크리스천헤럴드2023.03.22
     가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은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방송을 통하여 위기상황의 대체 요령에 대하여 안내를 받는다. 그때마다 꼭 나오는 말이 위급한 상황에서 산소 호흡기를 연결해야  할 때에 항상 자신에게 먼저 산소 호흡기를 달고 그 다음에 주위에 있는 노약자들을 도와주라고 한다. 특별히 자녀하고 동승하였을 때에도 자신에게 먼저 호흡기를 달고 그 다음에 자녀들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좀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인과 자녀 다 위험해 질수있다. 좀 냉정한 것 같지만 본인에게 먼저 호흡기를 달고 주위에 있는 자녀를 도와야한다. 어떤 의미로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도력하면 섬기는 지도력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 지도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선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좋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좌절감에 빠지고 한다. 그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섬기는 지도력을 발휘하려고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망가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 하지만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기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자가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되 잘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건강하게 관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할 때 비로서 건강한 지도력이 나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다.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남을 행복하게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사랑하고 섬기기에 앞서서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즉 좋은 의미로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지도력은 건강한 지도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한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의 책을 보았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우리 모든 부모들에게는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까가 가장 중대한 관심사이다. 그래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 노력들이 어떤 때는 도리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아이가 따라오지를 않으니까 부모 자신이 불행해지고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되고 그 결과로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행복해지면 그 영향을 받는 자녀들이 행복해지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아이를 행복한 자녀로 만들기 원한다면 아이들을 조절하려고 하지 말고 엄마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해져라. 그러면 아이들이 자연적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라는 것이 그 책의 메세지이다. 나도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한번은 파커 팔머라는 분의 책을 한번 읽었다. 그가 말하기를 수업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자신을 개발하게 돕는 것보다는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자신의 삶이 통제가 않되니까 학생들을 통제함을 통하여 자기의 안정감을 가지려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창조적인 공간을 주지 못하고 틀에 꽉 짜여진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가 먼저 자신의 내면에 자유함을 가지고 있다면 학생들에게 자유할수 있는 공간을 주고 그들이 성장할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이 많은 경우에 지도력을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조절할까? 어떻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다른 사람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관점에서 지도력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지도력은 남을 어떻게 조절할 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어떻게 건강하고 바르게 세울까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건강한 부모에게서 건강한 자녀가 나오고, 건강한 선생님 아래서 건강한 제자가 나오고 건강한 목회자 아래서 건강한 성도가 나오고 건강한 가장아래서 건강한 가정이 나온다. 그래서 지도자가 감당해야하는 첫번째 아니 궁극적인 과업은 바로 자신을 건강하고 바르고 행복하게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온 땅에 모든 족속에 복을 주시기위한 통로로 아브라함과 긔의 자손을 부르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하신 일은 아브라함을 복주시는 일이셨다. 아브라함을 복을 주고 그 아브라함을 통로 삼아서 모든 족속을 복주시기를 계획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첫번째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복을 바로 받아서 바로 누리는 것이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신을 바른 의미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일, 이것이 어찌보면 바른 지도력의 출발점이다. 한 가정의 부모이든, 한 교회의 목회자이든, 한 직장의 사장인든 자신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르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든 지도록의 출발점이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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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피시전도법 - 과거를 답습하지 말자! 크리스천헤럴드2023.03.22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보다는 복음을 찾아 헤매야 하는 큰 백화점과 같은 교회에 데려다 놓으려고 한다. 내가 만난 예수님 때문에 내 삶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고 전도의 목적이다. 소개받은 샴푸나 비누를 백화점 안에서 찾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그 넓은 백화점 안에서 자신이 소개 받은 제품을 찾기라도 한다면 다행이지만, 큰 백화점의 화려함 속에 혹은 다른 여러 마케팅 전략에 속아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라도 옮긴다면 소개한 사람이나 소개받은 사람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은 전도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또 전도에 필요한 능력을 은사로, 달란트로 받았다. 물론, 각자가 받은 은사와 달란트가 다르지만, 모두가 적어도 한 달란트 이상은 받았기 때문에 누구나 복음을 전하고 전도할 수 있다. 백화점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경험한 것을 똑바로 전해 주어야 한다.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그 다양한 방법 중에서 나에게 맞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고 또 배워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들은 성도 스스로가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전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 그저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고 교회 일이라면 시키는 대로 잘하고 헌금 잘 내면 믿음 좋은 성도라고 가르치면 안 된다. 제자가 되어야 하고, 제자가 되어 다른 제자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이 다양한 전도의 방법 중에서 가장 본인에게 맞는 전도 방법,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전도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정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모습만으로도 주변에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고만 안 쳐도 하나님이 욕먹지 않는 세상이다. 믿음이 있다는 성도들이, 심지어 목사와 교회들이 앞다투어 사고를 친다. 거짓말도 잘한다. 돈을 좋아한다. 사람 앞에 냄새나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전도는 커녕 오히려 교회와 정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다. 특히,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목사와 교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과거에 화려한 이력이 있고 수많은 성도가 있고 자랑거리가 많다고 해도 오히려 전도를 방해하고 전도의 물결에 역행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을 물게 될 것이다. 요즘은 성도 각자가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사는 것만으로도 수동적인 의미에서 전도에 동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 말씀대로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전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우리의 착한 행실이라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착한 일 가운데 가장 착한 일은 구원과 연관되어 빛 되신 주님을 전하는 일이다. 이 일이야말로 예수님께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착한 일이다.직장인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 그것이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전도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져 보았다. 그런 경험 속에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욕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성도들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목사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욕을 먹는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 관계 속에서 바르게 행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착한 일인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 사람들이나 기업에서 하면 욕먹는 일들을 버젓이 한다. 실상은 전도 길을 다 막으면서도 잘한다고 여기며 산다. 우리 모두 참 뻔뻔한 것이다. 전도하기 위해서 약한 자들과 함께 약한 모습으로 동감하고, 함께 느끼고, 동행하는 것, 이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전도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의 다양성이다. 이 복음의 다양성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우리가 모두 다 전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도는 특정한 사람, 혹은 부류만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전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전도할 의지가 있는가? 진심으로 전도하고 싶은가? 만약 특정인에게만 전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예수님의 대사명은 불완전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 모두가 전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믿기 바란다. 지금 당신은 가난한가? 가난하다면 전도할 수 있다. 돈이 많은가? 그럼 돈이 많아서 전도할 수 있다. 직장이 있고 일이 너무 많은가? 그렇다면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전도를 잘할 수 있다. 직장이 없어서 놀고 있는가? 직업이 없어도 전도할 수 있다. 운동을 너무 좋아하는가? 그럼 그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전도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설계해 놓으셨다. 이것이 전도의 혁명이고 전도의 파워다. 우리는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전도 방법을 찾아 즐겁게 전도하면 되는 것이다.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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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철이 든 신앙, 성숙한 신앙” 크리스천헤럴드2023.03.21
      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선교지에서 내 믿음과 기도가 사람중심으로 타협해 가고 있다는 영적 위기감에 빠진 적이 있어서 한동안 고민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사역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고 전체적인 반성과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던 경험이다. 이런 위기감이 든 이유는 영적리더인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현지인들의 삶을 인도해야 하는데, 주객전도가 되어서 먼저 현지인들의 눈치를 살핀 후, 사역을 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의 원칙 중에 하나인 현지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접근 방법을 삶의 현장에서 잘 이루고 있던 시기에 다행히 발견하게 되어서 크게 놀라고 후회한 적이 있었다. 내가 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너무 무겁고 하나님께 죄송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변한 이유를 생각해 보니, 사역마다 불평하던 사람들은 나를 돕겠다고 앞장서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오래 믿었고, 선교사인 나를 먼저 알고 관계를 맺은 분들, 자기 세계 속에 갇힌, 현실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사고하는 분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역사와 은혜의 시너지를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과의 동역관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어떤 학생이 왜 자기 집안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느냐고 얼굴을 붉히면서 강의 도중에 질문을 하고 즉답을 요구했다. 너무 무례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나는 한 눈에 알아봤다. 그 학생은 창조주 하나님을 동화속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내뜻대로 안된다고 수업시간에 불평을 할 때 기가 차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 분을 모르니까 철부지 신앙이다. 우리 신앙이 성숙하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첫 증거는 나 중심의 사고와 시각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초점이 옮겨지는 것이다. 자기 삶의 주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그런 것처럼 어린 애들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다. 큰 소리치고, 울고, 떼쓰고, 분위기 파악안되고, 눈치없고, 자기감정을 거침없이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안하무인! 그러나 철이 들면, 군대 다녀오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면 그때 더 성숙해 지는 것을 본다. 신기할 정도로 생각이 깊어지고 겸손해지고, 타인들이 얼마나 자기를 배려하고 인내하며 참아줬는지 알게 되는 때가 온다. 지난 자기의 모습을 알고 마음 속으로 큰 사랑의 빚을 진 것을 깨닫고 고마워한다. 그 고마움의 표현이 감사와 배려와 헌신과 수고로 나타난다. 마찬가지 우리신앙이 깊어지면 사고가 달라지고 회개와 간구하는 기도의 수준이 달라진다. 사역의 섬김과 헌신에서 은혜가 전달된다. 생각하는 기준과 태도가 달라지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보는 눈이 없어도 성실하고 보는 눈이 있어도 변함없다. 미련하게 보이고 무식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된다. 의심의 안개와 근심의 구름이 자욱하고 유혹의 바다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께 철든 성숙한 자녀로 인정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샬롬!“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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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6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사모함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15
     2월 한 달은 기독교계가 미국 켄터키에 있는 애즈베리(Asbury)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 계속하여 많은 뉴스와 유튜브를 비롯하여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내용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여러 의견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사람의 의견들은 나름대로 분석하며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참 부흥이 아니라는 의견들을 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참 부흥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한 것은 그 자리를 사모하여 몰려든 사람들이다. 모임이 있는 채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채플 밖에서 8시간 또는 9시간씩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그 학교로 모여들어서 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에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교회는 이런 모습에 집중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그 먼 거리인데도 몰려드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이런 부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고 그 은혜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코비드 이후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예전처럼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모이게 하려는 것에 힘쓰고 있다. 특히 온라인에 익숙해진 교인들이 예배 현장에 참여할 수 있기를 광고하고 독려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를 더 이상 온라인으로 하지 않겠다는 광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할수록 더욱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미 세상이 변하였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예배의 역사가 교회에 있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예배를 살려야 한다. 목회자가 계획하고 주도하며 진행하는 예배가 아니라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더 좋은 악기와 더 멋진 조명과 음향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찬양 그리고 기도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흥분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오직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 예배를 참여하기를 사모하고 기다릴 것이다. 교회는 이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이다. 목회자는 책상 앞에서 머리를 쓰고 인터넷을 뒤져 자료를 찾아낼 때가 아니라 강단 앞에 나아가 주님 앞에 엎드릴 때이다. 몇 시간이든 엎드려야 한다. 다른 교역자들을 독촉하여 교인들을 모으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먼저 그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주님 앞에서 가슴을 찢고 울어야 한다. 목회자 마음에 오직 주님으로만 사모하며 가득 찰 때까지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교회 밖에 몰려들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교회 내에 예배를 회복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부흥을 사모하며 눈물로 가득 채워야 할 때이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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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내가 먹는 게 곧 나 자신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15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나는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목회와 교수사역을 감당했다. 2년 정도는 신학교에서 선교학 수업을 들으며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월 선교주일을 정하고 국내외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현장의 소식을 듣고 배우려는 노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마침 지난 주일을 선교주일로 드렸다. 오랜기간 펜데믹과 환절기로 몸이 불편하여 출입이 불편한 성도들이 생기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성도님들의 건강을 검진할 기회를 주셨다. 한의사이신 오 장로님을 모시고 마련된 치유의 시간은 참 유익했다. 선교를 많이 다니시는 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을 해주셨다, 말씀 가운데 ‘지금 내 몸의 건강상태는 이전에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자기 몸이 건강의 신호를 보내서 대신 말한다’고 하셨다. 먼저 연로하신 성도님들부터 치료해 주셨다. 진맥과 문진으로 혀를 쑥 내밀어 보라고 하실때는 나도 창피하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쑥. 쑥. 쑥 혀를 내밀며 진료를 받았다. 전문가의 손길이 살펴주니 내가 몰랐던 증상도 알게되고 몸의 상태와 앞으로의 건강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내 몸의 건강상태는 지금까지 내가 투자하고 살아온 지난시간의 흔적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찔림과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건강을 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쏟았는지, 귀한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기를 소원하며 살아왔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 영혼은 건강한가?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 성도들의 영적상태는 어떠한가? 영혼의 증상과 치유는 사실 더욱 중요하다. 목회자가 전능하신 예수님께 간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각자의 영혼 진찰을 언제 해보았는가? 내 심령, 영혼의 상태는 어떤가? 혼자있는 시간에 생각과 태도는 어떤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부분은 정직한가? 성실한가? 내 영혼의 성숙함을 위해 나는 무엇을 집중/노력/투자했는가? 늘 부족함을 느끼며 어떤 노력을 하는가? 내 영혼이 병들고 나약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나? 영적고통이 느껴질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 질문을 하며 고민하게 된다.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삶의 노력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 부분이 우리 인생을 위해 음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듯 영혼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준비되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자신을 성결하게 돌아보는 사순절이다. 영성을 위한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다. 성경공부, 새벽기도, 특별 세미나 등..,  우리를 위해 영성회복의 기회가 주어졌다. 영적자각의 결과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남모르게 더 간절한 심정으로 거룩한 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아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답답하고 어리석은 중증 환자로 살아가지 말자. 분명한 사실은 환자는 절대로 자기 몸을 고칠수 없다. 예수님은 내가 영적 소망을 품고 복된 삶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나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만병을 치유하시고 고통과 상처를 싸매어 주실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면 죄도 사함받고 영원히 살게된다.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아픔과 고통의 멍에를 가지고 주께로 나아가는 투자를 하길 바란다. 아픔과 고통을 간직할 필요가 없다. 은혜를 먹고 배부르게 사는 자녀들이 행복하다. 영생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을 묵상해 본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사는 건강한 성도가 되길 바란다. 즐거움 가득한 가정의 웃음소리, 감사의 외침이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울려퍼지기를 소원한다. 샬롬!“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6:53)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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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7: 불안정 애착의 치유: 재양육, 재경험 크리스천헤럴드2023.03.07
      이제까지 만 3세까지의 엄마(양육자)의 양육방식이 아기에게 어떻게 애착 유형을 형성하고 그것이 성인이 된 후 인간관계 방식으로 굳어져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사실 아기가 만 3세가 될 때까지는 엄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힘도 약하고 말도 못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때 엄마가 아기에게 적절한 돌봄과 사랑을 주지 못해서 불안정 애착이 형성되었다면, 이것은 무척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아기들은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면, 이것은 아기의 잘못이 아니다. 아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기는 부모의 부적절한 양육을 그저 당하고 견디면서 살아 남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 결과 굳어진 인간관계 방식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순간에 바꾸기는 참 어렵다.  만약 당신이 거부회피형, 불안집착형, 혼란형의 애착이라면, 이제 성인이 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양육에 무기력했기 때문에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성인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불안정 애착의 사람도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안정형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을 획득형 안정 애착이라고 한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서서히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양육이 부적절했다면, 성인이 된 이후에 적절한 방법으로 다시 양육을 받을 수 있다. 이 때 양육자는 당연히 부모는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양육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면서 나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양육해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나 자신을 느낄 때마다 마치 엄마가 그렇게 해 줬다면 좋았을 방식으로 내 마음 속의 아이에게 대해 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친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쓰다듬어 주고 관심 가져 주면서 어린 시절 결핍되었던 것을 내가 나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부정, 타인 부정의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 그것을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 내가 이 모양이지 뭐, 누가 나 같은 거한테 관심이나 주겠어? 라는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을 말하는 내 마음의 한 부분에게 친절하게 말해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나도 하나님이 지으신 작품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관심 받을만 해, 저 사람이 나의 진가를 잘 못 알아본 건 내 잘못이 아니지”라고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왠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거 같아, 내가 뭐 잘못했나, 저 사람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아, 이런 생각이 올라오면,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에게 말해준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꼭 그런건 아닐 수도 있어, 저 사람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야, 나는 할 만큼 했으니 괜찮아, 저 사람이 날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거야” 라고 따뜻하게 말해 준다. 이런 반복적인 노력이 끊임없이 들어가야 획득형 안정 애착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양육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해 보자.  좋은 사람이 새로운 애착 대상이 되어준다면 새롭게 안정 애착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 애인, 배우자, 선생님, 목사님, 상담사 등을 만나 이들을 통해 인정과 사랑을 경험하고 이들과 좋은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당히 축소될 수 있다. 즉 새로운 경험이 이전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애착 대상이 되어줄 수 있다. 새로운 애착 대상으로 가장 완벽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도 십자가에서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사랑은 이전에 부모로부터 받은 아픔을 녹여서 무력화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속에 안고 있었던 얼음 덩어리를 녹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은혜를 주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그런 치유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불안정 애착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결핍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을 수 있고 해결될 수 있다.  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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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진정한 예배의 회복 크리스천헤럴드2023.03.07
      꽤 오래 전 부터 많은 이들이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라는 말들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면서 덧붙여 하는 이야기 들을 듣고 있노라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갖게 된다. 잘 갖춰진 예배를 구축하고, 그 예배에 어떻게 해서 든 많은 성도들을 오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수십년 빠지지 않고 매주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음에도 그 오랜기간 동안 거의 영적으로 하나도 성장하지 않은 성도 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더 큰 문제는 그런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교회가 얼마나 큰 교회이며, 얼마나 잘 준비된 예배를 가지고 있는지를 자랑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관심은 예배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산에서 예배하던,저 산에서 예배하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던, 큰 교회 혹은 작은 교회에서 예배하던, 거기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에 관심이 있으시고, 심지어 그런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영과 진리로 자신을 채우고 가다듬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면 영적상태가 그 마지막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묶지 않은 풍선을 놔 버리면 순식간에 바람이 빠지듯, 영적 상태가 확 줄어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가 성도의 영적상태, 영적성장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주일에 교회에만 와 주면 온갖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거기에 꾸준히 십일조를 내고 교회 봉사 하나쯤 맡아주면 그들을 최고의 성도라고 부추겨 주는 일엔 인색하지 않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부부가 사이가 좋은 지, 자녀들과의 반목은 혹여 없는지, 영적으로 무엇을 갈급해하는지, 교회 밖에서의 증인의 삶은 어떠한지, 어떤 영적인 부분에서 더 성장을 해야 하는지 그런 부분들을 자세히 민감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에너지를 최고의 예배를 갖추기 위한 것에 다 사용해 버린다. 예수님은 길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인을 선하다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셨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일주일에 며칠은 거룩한 설교준비를 하는 날들이니 연락조차 하지 말라고 선포 하기도한다.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옛사람, ‘육’을 다 버리지 못했음에 애통해 하며 그럼에도 어찌하든지 예수님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예수님 처럼 살기 위해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 몇몇만 모여도 하나님의 가득한 영광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결국은 ‘한 영혼’ 이다. 이 ‘한 영혼’은 아직 예수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성경에서의 한 영혼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나’ 자신임을 잊어선 안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 에게 있으시다. 아들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내’가 영적으로 계속 자라나는 것, 그래서 예수님 처럼 되어져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간절히 보기 원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를 찾으신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멈추면 안된다. 예수님의 영성에 이를 때까지 절대 멈추면 안된다. 그런 의지적 결단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 그리고 그런 ‘너’ 가 함께 모이는 교회라면 음향시스템 빵점 목사, 설교 빵점, 주일 점심식사 빵점, 성도라고는 사모 한 명, 찬양팀, 성가대 없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님을 춤추시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 구석 구석까지 체험하는 예배하는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제발 형식과 전통에서 벗어나서,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매 순간 춤추는, 그런 진정한 삶의 예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내자.이아모스 목사LA씨티교회 선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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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휴게소에 들리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3.03.01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9) 우리가 사는 미국은 프리웨이 휴게소가 한국의 휴게소 같은 여행자들을 위한 다양함과 편리시설들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된다. 미국으로 여행을 오신 분들이 휴게소를 들렸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잠시 한국의 휴게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한국에서 해안선을 따라서 전국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용인에서부터 남해안을 방문하면서 고속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여러 휴게소를 들려서 잘 쉬었던 소중한 기억이 있다. 휴게소는 대부분의 대형 트럭기사들과 여행객들이 졸음을 이기고, 별미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고 쉬는 공간이다. 혹여 바쁘다는 핑게로 깜빡하고 휴게소를 지나치면 동승했던 어린 아이들은 대성통곡을 한다고 한다.잠자던 아이들도 깨워서 들려야만 하는 곳이 휴게소란다. 그만큼 중요한 장소이다. 휴게소는 다시 재충전하고 특산품과 간식도 챙기고 연료를 채워넣고 소식을 나누는 목적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곳에 세워진다. 그리고 다시 최종 목적지까지 여행 길을 서둘러 떠나는 곳이 바로 휴게소의 기능이다.  우리는 이민 생활을 하며 누구나 참된 쉼과 안식을 소원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푹 쉬고 싶은데 그 쉼을 방해받으면 무척 불편하고 몸이 피곤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은 쉼과 안식을 혼동해서 살아가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쉼은 고된 운동이나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간이 쉼이다. 또한 우리들이 누리는 영혼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때에 가능하다고 성경은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한다. 때로는 몸이 피곤해서 쉰다는 것은 알면서도,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간다.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리면 육신도 새 힘을 얻는 영적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이렇게 공개된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땅의 교회들이 휴게소 같은 곳이면 참 좋겠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영적 휴식과 재충전이 이루어지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눔의 공간이 우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요즘 몇년 동안에는 급피곤함을 느끼는 뉴스기사가 차고 넘친다. 펜데믹 상황의 누적된 피곤함, 지난 해의 홍수와 재난, 최근 여러나라의 지진의 여파, 강대국들의 정치적 피곤함, 개인과 가정적인 일들, 신앙의 혼돈스러움, 가족들의 구원의 확신…, 충분히 쉼과 안식이 필요성을 느낀다. 쉬어야 한다. 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쉬어도 피곤함을 느낀다. 영적 만성피로를 느낀다. 쉼은 편안한 시간과, 음식을 잘 먹고, 마음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쉬어야 한다. 휴게소는 중간기착지이지 최종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쉬는 시간에 운동을 하고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 운동과 배움은 쉬고있는 것이다. 다음을 준비하면 더 유익한 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함께 쉬어야 진정한 쉼이된다. 사랑하는 가족이 더 행복한 여행이 되려면 생활 리듬을 맞추고 다함께 운동하고 배우고 움직여야 한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결코 쉬는 것이 아니다. 손 놓고 있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다.  휴게소는 들려서 잠시 각자가 원하는대로 휴식하는 곳이다. 오랫만에 일정을 맞추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려면 잘 먹고 쉬고 충전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 멀미가 나는 사람, 몸이 아픈 사람, 지치고 고단한 사람, 선물이 필요한 사람, 각자의 볼 일을 보며 쉬지만 우리는 공동체에 속한 가족이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 쉬는 것이다.  다시 마음에 새겨보지만, 순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준비하는 쉼이 필요하다. 천성 길, 순례자, 천국이 우리 목적지다. 더 높은 거룩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 쉬는 곳, 다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며 쉬는 시간, 행복한 가족들이 거룩한 꿈을 꾸며 떠날 준비를 하고 쉬어야 한다. 지금 오후5시, 이제 우리 인생의 주인이 곧 오실 시간이다. 우리 목적지, 천국, 예수님이 맞아주시는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누릴 곳이다. 우리 잠시 쉬었다가 주의 인도하심 따라 다함께 갑시다. 영원한 안식이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출발~~! 샬롬!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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