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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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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사모함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15
     2월 한 달은 기독교계가 미국 켄터키에 있는 애즈베리(Asbury)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 계속하여 많은 뉴스와 유튜브를 비롯하여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내용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여러 의견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 일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사람의 의견들은 나름대로 분석하며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참 부흥이 아니라는 의견들을 말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참 부흥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한 것은 그 자리를 사모하여 몰려든 사람들이다. 모임이 있는 채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채플 밖에서 8시간 또는 9시간씩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그 학교로 모여들어서 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에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교회는 이런 모습에 집중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그 먼 거리인데도 몰려드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이런 부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고 그 은혜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코비드 이후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예전처럼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모이게 하려는 것에 힘쓰고 있다. 특히 온라인에 익숙해진 교인들이 예배 현장에 참여할 수 있기를 광고하고 독려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는 예배를 더 이상 온라인으로 하지 않겠다는 광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할수록 더욱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미 세상이 변하였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예배의 역사가 교회에 있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 아니라 예배를 살려야 한다. 목회자가 계획하고 주도하며 진행하는 예배가 아니라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더 좋은 악기와 더 멋진 조명과 음향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찬양 그리고 기도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흥분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오직 삼위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 예배를 참여하기를 사모하고 기다릴 것이다. 교회는 이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이다. 목회자는 책상 앞에서 머리를 쓰고 인터넷을 뒤져 자료를 찾아낼 때가 아니라 강단 앞에 나아가 주님 앞에 엎드릴 때이다. 몇 시간이든 엎드려야 한다. 다른 교역자들을 독촉하여 교인들을 모으려 하지 말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먼저 그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 목회자가 먼저 주님 앞에서 가슴을 찢고 울어야 한다. 목회자 마음에 오직 주님으로만 사모하며 가득 찰 때까지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교회 밖에 몰려들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교회 내에 예배를 회복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부흥을 사모하며 눈물로 가득 채워야 할 때이다. 김병학목사 / 주님의교회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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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내가 먹는 게 곧 나 자신입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3.15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나는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목회와 교수사역을 감당했다. 2년 정도는 신학교에서 선교학 수업을 들으며 가르침과 훈련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월 선교주일을 정하고 국내외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현장의 소식을 듣고 배우려는 노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마침 지난 주일을 선교주일로 드렸다. 오랜기간 펜데믹과 환절기로 몸이 불편하여 출입이 불편한 성도들이 생기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성도님들의 건강을 검진할 기회를 주셨다. 한의사이신 오 장로님을 모시고 마련된 치유의 시간은 참 유익했다. 선교를 많이 다니시는 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을 해주셨다, 말씀 가운데 ‘지금 내 몸의 건강상태는 이전에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자기 몸이 건강의 신호를 보내서 대신 말한다’고 하셨다. 먼저 연로하신 성도님들부터 치료해 주셨다. 진맥과 문진으로 혀를 쑥 내밀어 보라고 하실때는 나도 창피하기도 했지만, 너도나도 쑥. 쑥. 쑥 혀를 내밀며 진료를 받았다. 전문가의 손길이 살펴주니 내가 몰랐던 증상도 알게되고 몸의 상태와 앞으로의 건강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내 몸의 건강상태는 지금까지 내가 투자하고 살아온 지난시간의 흔적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찔림과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건강을 위해서 노력하고 힘을 쏟았는지, 귀한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기를 소원하며 살아왔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 영혼은 건강한가?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 성도들의 영적상태는 어떠한가? 영혼의 증상과 치유는 사실 더욱 중요하다. 목회자가 전능하신 예수님께 간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각자의 영혼 진찰을 언제 해보았는가? 내 심령, 영혼의 상태는 어떤가? 혼자있는 시간에 생각과 태도는 어떤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부분은 정직한가? 성실한가? 내 영혼의 성숙함을 위해 나는 무엇을 집중/노력/투자했는가? 늘 부족함을 느끼며 어떤 노력을 하는가? 내 영혼이 병들고 나약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나? 영적고통이 느껴질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 질문을 하며 고민하게 된다.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인 삶의 노력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 부분이 우리 인생을 위해 음식과 영양분이 필요하듯 영혼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준비되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자신을 성결하게 돌아보는 사순절이다. 영성을 위한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다. 성경공부, 새벽기도, 특별 세미나 등..,  우리를 위해 영성회복의 기회가 주어졌다. 영적자각의 결과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남모르게 더 간절한 심정으로 거룩한 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아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답답하고 어리석은 중증 환자로 살아가지 말자. 분명한 사실은 환자는 절대로 자기 몸을 고칠수 없다. 예수님은 내가 영적 소망을 품고 복된 삶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나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만병을 치유하시고 고통과 상처를 싸매어 주실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료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면 죄도 사함받고 영원히 살게된다.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아픔과 고통의 멍에를 가지고 주께로 나아가는 투자를 하길 바란다. 아픔과 고통을 간직할 필요가 없다. 은혜를 먹고 배부르게 사는 자녀들이 행복하다. 영생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을 묵상해 본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사는 건강한 성도가 되길 바란다. 즐거움 가득한 가정의 웃음소리, 감사의 외침이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울려퍼지기를 소원한다. 샬롬!“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6:53)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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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7: 불안정 애착의 치유: 재양육, 재경험 크리스천헤럴드2023.03.07
      이제까지 만 3세까지의 엄마(양육자)의 양육방식이 아기에게 어떻게 애착 유형을 형성하고 그것이 성인이 된 후 인간관계 방식으로 굳어져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사실 아기가 만 3세가 될 때까지는 엄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힘도 약하고 말도 못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때 엄마가 아기에게 적절한 돌봄과 사랑을 주지 못해서 불안정 애착이 형성되었다면, 이것은 무척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아기들은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면, 이것은 아기의 잘못이 아니다. 아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기는 부모의 부적절한 양육을 그저 당하고 견디면서 살아 남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 결과 굳어진 인간관계 방식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순간에 바꾸기는 참 어렵다.  만약 당신이 거부회피형, 불안집착형, 혼란형의 애착이라면, 이제 성인이 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양육에 무기력했기 때문에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성인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불안정 애착의 사람도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안정형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을 획득형 안정 애착이라고 한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서서히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양육이 부적절했다면, 성인이 된 이후에 적절한 방법으로 다시 양육을 받을 수 있다. 이 때 양육자는 당연히 부모는 아니다. 가장 결정적인 양육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면서 나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양육해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나 자신을 느낄 때마다 마치 엄마가 그렇게 해 줬다면 좋았을 방식으로 내 마음 속의 아이에게 대해 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친절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쓰다듬어 주고 관심 가져 주면서 어린 시절 결핍되었던 것을 내가 나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자기 부정, 타인 부정의 생각이 불쑥 올라올 때 그것을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 내가 이 모양이지 뭐, 누가 나 같은 거한테 관심이나 주겠어? 라는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을 말하는 내 마음의 한 부분에게 친절하게 말해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나도 하나님이 지으신 작품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관심 받을만 해, 저 사람이 나의 진가를 잘 못 알아본 건 내 잘못이 아니지”라고 반복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왠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거 같아, 내가 뭐 잘못했나, 저 사람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아, 이런 생각이 올라오면, 가슴에 손을 얹고 내 마음에게 말해준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꼭 그런건 아닐 수도 있어, 저 사람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야, 나는 할 만큼 했으니 괜찮아, 저 사람이 날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거야” 라고 따뜻하게 말해 준다. 이런 반복적인 노력이 끊임없이 들어가야 획득형 안정 애착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양육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해 보자.  좋은 사람이 새로운 애착 대상이 되어준다면 새롭게 안정 애착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 애인, 배우자, 선생님, 목사님, 상담사 등을 만나 이들을 통해 인정과 사랑을 경험하고 이들과 좋은 애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당히 축소될 수 있다. 즉 새로운 경험이 이전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인 역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애착 대상이 되어줄 수 있다. 새로운 애착 대상으로 가장 완벽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도 십자가에서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사랑은 이전에 부모로부터 받은 아픔을 녹여서 무력화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 속에 안고 있었던 얼음 덩어리를 녹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은혜를 주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그런 치유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불안정 애착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결핍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을 수 있고 해결될 수 있다.  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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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3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진정한 예배의 회복 크리스천헤럴드2023.03.07
      꽤 오래 전 부터 많은 이들이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라는 말들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면서 덧붙여 하는 이야기 들을 듣고 있노라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갖게 된다. 잘 갖춰진 예배를 구축하고, 그 예배에 어떻게 해서 든 많은 성도들을 오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수십년 빠지지 않고 매주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음에도 그 오랜기간 동안 거의 영적으로 하나도 성장하지 않은 성도 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더 큰 문제는 그런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교회가 얼마나 큰 교회이며, 얼마나 잘 준비된 예배를 가지고 있는지를 자랑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관심은 예배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산에서 예배하던,저 산에서 예배하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던, 큰 교회 혹은 작은 교회에서 예배하던, 거기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에 관심이 있으시고, 심지어 그런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영과 진리로 자신을 채우고 가다듬는 일을 잠시라도 멈추면 영적상태가 그 마지막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묶지 않은 풍선을 놔 버리면 순식간에 바람이 빠지듯, 영적 상태가 확 줄어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가 성도의 영적상태, 영적성장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주일에 교회에만 와 주면 온갖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거기에 꾸준히 십일조를 내고 교회 봉사 하나쯤 맡아주면 그들을 최고의 성도라고 부추겨 주는 일엔 인색하지 않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부부가 사이가 좋은 지, 자녀들과의 반목은 혹여 없는지, 영적으로 무엇을 갈급해하는지, 교회 밖에서의 증인의 삶은 어떠한지, 어떤 영적인 부분에서 더 성장을 해야 하는지 그런 부분들을 자세히 민감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에너지를 최고의 예배를 갖추기 위한 것에 다 사용해 버린다. 예수님은 길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인을 선하다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셨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일주일에 며칠은 거룩한 설교준비를 하는 날들이니 연락조차 하지 말라고 선포 하기도한다.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옛사람, ‘육’을 다 버리지 못했음에 애통해 하며 그럼에도 어찌하든지 예수님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예수님 처럼 살기 위해 매일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 몇몇만 모여도 하나님의 가득한 영광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결국은 ‘한 영혼’ 이다. 이 ‘한 영혼’은 아직 예수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성경에서의 한 영혼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나’ 자신임을 잊어선 안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 에게 있으시다. 아들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내’가 영적으로 계속 자라나는 것, 그래서 예수님 처럼 되어져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간절히 보기 원하신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를 찾으신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멈추면 안된다. 예수님의 영성에 이를 때까지 절대 멈추면 안된다. 그런 의지적 결단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 그리고 그런 ‘너’ 가 함께 모이는 교회라면 음향시스템 빵점 목사, 설교 빵점, 주일 점심식사 빵점, 성도라고는 사모 한 명, 찬양팀, 성가대 없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님을 춤추시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온 몸 구석 구석까지 체험하는 예배하는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제발 형식과 전통에서 벗어나서,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매 순간 춤추는, 그런 진정한 삶의 예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내자.이아모스 목사LA씨티교회 선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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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휴게소에 들리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3.03.01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9) 우리가 사는 미국은 프리웨이 휴게소가 한국의 휴게소 같은 여행자들을 위한 다양함과 편리시설들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된다. 미국으로 여행을 오신 분들이 휴게소를 들렸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잠시 한국의 휴게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한국에서 해안선을 따라서 전국을 돌아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용인에서부터 남해안을 방문하면서 고속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여러 휴게소를 들려서 잘 쉬었던 소중한 기억이 있다. 휴게소는 대부분의 대형 트럭기사들과 여행객들이 졸음을 이기고, 별미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고 쉬는 공간이다. 혹여 바쁘다는 핑게로 깜빡하고 휴게소를 지나치면 동승했던 어린 아이들은 대성통곡을 한다고 한다.잠자던 아이들도 깨워서 들려야만 하는 곳이 휴게소란다. 그만큼 중요한 장소이다. 휴게소는 다시 재충전하고 특산품과 간식도 챙기고 연료를 채워넣고 소식을 나누는 목적과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곳에 세워진다. 그리고 다시 최종 목적지까지 여행 길을 서둘러 떠나는 곳이 바로 휴게소의 기능이다.  우리는 이민 생활을 하며 누구나 참된 쉼과 안식을 소원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푹 쉬고 싶은데 그 쉼을 방해받으면 무척 불편하고 몸이 피곤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가끔은 쉼과 안식을 혼동해서 살아가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쉼은 고된 운동이나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간이 쉼이다. 또한 우리들이 누리는 영혼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때에 가능하다고 성경은 창세기 2장에서 말씀한다. 때로는 몸이 피곤해서 쉰다는 것은 알면서도,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간다.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리면 육신도 새 힘을 얻는 영적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이렇게 공개된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땅의 교회들이 휴게소 같은 곳이면 참 좋겠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영적 휴식과 재충전이 이루어지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눔의 공간이 우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요즘 몇년 동안에는 급피곤함을 느끼는 뉴스기사가 차고 넘친다. 펜데믹 상황의 누적된 피곤함, 지난 해의 홍수와 재난, 최근 여러나라의 지진의 여파, 강대국들의 정치적 피곤함, 개인과 가정적인 일들, 신앙의 혼돈스러움, 가족들의 구원의 확신…, 충분히 쉼과 안식이 필요성을 느낀다. 쉬어야 한다. 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쉬어도 피곤함을 느낀다. 영적 만성피로를 느낀다. 쉼은 편안한 시간과, 음식을 잘 먹고, 마음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쉬어야 한다. 휴게소는 중간기착지이지 최종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쉬는 시간에 운동을 하고 필요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 운동과 배움은 쉬고있는 것이다. 다음을 준비하면 더 유익한 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함께 쉬어야 진정한 쉼이된다. 사랑하는 가족이 더 행복한 여행이 되려면 생활 리듬을 맞추고 다함께 운동하고 배우고 움직여야 한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결코 쉬는 것이 아니다. 손 놓고 있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다.  휴게소는 들려서 잠시 각자가 원하는대로 휴식하는 곳이다. 오랫만에 일정을 맞추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려면 잘 먹고 쉬고 충전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 멀미가 나는 사람, 몸이 아픈 사람, 지치고 고단한 사람, 선물이 필요한 사람, 각자의 볼 일을 보며 쉬지만 우리는 공동체에 속한 가족이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 쉬는 것이다.  다시 마음에 새겨보지만, 순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준비하는 쉼이 필요하다. 천성 길, 순례자, 천국이 우리 목적지다. 더 높은 거룩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 쉬는 곳, 다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며 쉬는 시간, 행복한 가족들이 거룩한 꿈을 꾸며 떠날 준비를 하고 쉬어야 한다. 지금 오후5시, 이제 우리 인생의 주인이 곧 오실 시간이다. 우리 목적지, 천국, 예수님이 맞아주시는 그곳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누릴 곳이다. 우리 잠시 쉬었다가 주의 인도하심 따라 다함께 갑시다. 영원한 안식이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출발~~! 샬롬!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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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평안 크리스천헤럴드2023.02.28
      “평안하세요?”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늘 이렇게 안부를 묻는다. 그냥 잘 지냈냐고 물어보면 특별히 어려운 일 없고, 조금 힘든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도 많을 테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평안하냐는 질문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평안은 내면의 안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별탈없이 잘 지내고 부족한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을 수 있다. 풍족한 환경이 우리를 편안하게 할 수 있지만 평안하게 하지는 못한다.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지만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스트레스, 정신 질환과 자살률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통계에 의하면 자살이 현대인의 사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에 알게 해주는 현시대의 정보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위험한 곳인지를 더 잘 알려준다. 불안한 미래와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평안을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그 답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평안이란 단어를 사전에서는 걱정이나 탈이 없는 상황, 무사히 잘 있는 상태, 위험이나 다툼이 없는 상황으로 정의하고 있다. 세상의 평안은 상황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안은 조건부이며 잠정적이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평안이 상황에 근거해 있고, 나는 그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평안은 제한적이다. 상황이 좋으면 누릴 수 있고, 나쁘면 잃어버리는 일시적인 평안은 여전히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의 한계이다. 불완전한 세상이 평안의 주재이니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다. 평안의 원어인 샬롬의 뜻은 조화, 균형, 화합, 완전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같은 단어이지만 뜻이 다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상황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불완전한 세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불변하신 하나님께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재이시니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질과 속성에 의거한다. 그래서 평안은 내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평안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평안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순간을 통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기에 상황에 따라 요동하지 않는다. 나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평안은 문제가 없는 인생이 아니고, 고통과 어려움이 없는 인생도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인생이다. 평안은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묵상도, 내면 단련도, 요가도 아니다. 평안은 어려움이 없을 때만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평안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선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나의 모든 삶의 순간이 주님 안에 있고,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평안이다. 순교했던 스데반은 저주하는 무리에 둘러싸여 맞아 죽는 순간에도 평안을 잃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도 자신을 돌로 친 자들의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그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성경은 “자니라” 로 표현했다 (행 7:60) 스데반은 어떻게 죽어가는 상황에도 이처럼 침착하고 담대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5).  세상에 근거한 평안은 세상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영원무궁하다. 우리가 구해야 할 평안은 완전하고 영원한 주님의 평안이다.조영석 목사 choyoungsu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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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무서운 함정 크리스천헤럴드2023.02.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18: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빠지는 가장 크고 무서운 함정이 있다.  이 함정은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성경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깨여 있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빠지는 함정이다. 그리고 이 함정에 빠지면 절대로 올바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힘들게 하며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함정이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빠졌던 함정이다. 이때 바울은 열심히 있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사람이다.  이 말은 열심히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러 다녔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증인을 서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게, 아니 더 나아가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함정, 그리고 바울이 빠졌던 이 함정을 “자기 의”라고 부른다. 이 함정에 빠진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 까지도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주님은 그들에게 못박히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모릅니다”라고 기도를 한다. 즉 이 함정에 빠지면 영적인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왜곡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마귀는 우리 모두가 이 함정에 빠지길 원하고, 이 함정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이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공격한다.  반면에 성령님은 진리를 통해 우리를 이 함정에서 나오도록 역사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 함정에 그렇게 취약할까? 우리는 이 질문에 성경적인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음 말씀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성경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율법이 새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 지식이 없고 있다할지라도 자주 잊어버린다. 그러면 마음에 율법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모든 인간은 율법주의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혹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타락하여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나면서 율법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마음에 새긴 율법의 학습이요 체험이다. 반복적인 고발과 참소, 송사, 변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살다가 보면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된다.  문제는 이 습관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도 여전히 내 몸속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만나면 “독사의 자식들아...”하면서 강하게 책망했다. 반면에 세리와 창기를 만나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다음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다. (1) 당시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공격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보는 관점과 기준이 달랐음을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이었나? (3) 예수님의 관점, 기준이 윤리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윤리적이었다면 바리새인과 친구가 되어야 했다. 오늘 본문 속에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다.  주님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이다. 본인은 기도를 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랑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자기 의가 무엇인가를 보게 된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한다. 세리에게는 자기 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 속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6-17) 내가 어느 교회에 설교자로 갔다면 나를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은 내 설교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잘 대접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세리는 비록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자기의 죄를 인정함으로 예수님을 잘 대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나는 지금 그 일을 잘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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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피시전도법 - 세상 마케팅에서 배우는 전도 크리스천헤럴드2023.02.14
      마케팅에서 많이 언급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좋은 제품이나 음식을 경험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소개하거나 홍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개, 혹은 홍보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람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을 선택하고 홍보한다고 한다. 한 사람의 기질과 성향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 환경이나 교육 그리고 가치관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성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각자가 다른 성향에따라 다른 모양으로 홍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비누나 샴푸를 사용했다고 가정해 보자. 가장 간단한 소개 방법은 말로 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거나 자랑한다. 그들의 자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황홀한 경험담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경험을 자랑하며 나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사람처럼 자신의 경험을 침을 튀겨 가면서 자랑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SNS에 자신이 경험한 제품을 자랑스럽게 사진과 함께 올릴 때가 있다. 그들은 상품에 대한 더 많고 더 자세한 내용을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이 애용한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관해서도 알려고 한다. 이들 가운데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사용해본 제품을 구매해서 나눠주는 열성파도 있다. 참으로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은 기쁨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누는 인생을 산다. 대가 없이 자신의 좋았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이것이 바로 전도다. 다른 의미나 대가를 염두하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에게 참으로 좋았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소개한다. 이처럼 전도를 하는 데 있어, 말로 하는 게 편한 사람은 말로 하면 된다. 말로 하는 게 제일 좋고 편하다면 그냥 말로 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그들과 함께 대화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그것으로 전도의 방법을 삼으면 된다. “내가 쓰는 샴푸 참 좋더라”, “냄새도 좋더라”, “머릿결이 부드러워지더라” 등 자신의 경험담을 말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전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진심으로 좋아야 전도할 수 있는 것이다. 전도의 시작은 자신이 자랑하고자 하는 상품(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상품에 대한 확신과 자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는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해 경험했던 부분들을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면 된다. 진심으로 경험했다면 솔직한 경험담을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도다. 글을 쓰는 게 편한 사람은 글로써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 된다. 요즘은 휴대폰 메신저와 같이 얼마든지 글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들이 많다. 얼굴 보기가 힘들고, 또 얼굴 보면서 나의 신앙적 경험을 말하기 힘들다면 얼마든지 글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 글이라는 방법을 통할 때 더 잘 표현하고 자신의 감정, 느낌, 기분을 더 잘 표현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전도하면 된다. 굳이 말이 편한 사람에게 글로 하라고 할 필요가 없고, 굳이 글이 편한 사람에게 말로 하라고 할 필요가 없다. 전도라는 것이 꼭 말로 해야 하고, 글은 안되는 것이 아니다. 전도가 꼭 밖에 나가서 큰 소리로 외쳐야 하고 조용히 하면 전도가 아닌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성향, 특징, 기호를 발견하고 그 특징에 따라 맞는 방법으로 전도하면 되는 것이다.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는 바로 자신이 사용하고 경험한 바로 그 비누에 있다. 그 비누가 어땠냐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표다. 샴푸 파는 가게나 상점에 사람을 데려다 놓는 게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고, 그 상품이 얼마나 좋은가, 그 비누를 썼을 때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처럼 바로 내 행복을 전해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도도 이와 마찬가지다.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알려주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목적이지,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에 데려다 놓는 것이 전도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좋았는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전하는 것이 목표다. 그것이 전도다. 전도를 자꾸 어렵게 만들면 안 된다. 마치 수도원에서 엄청난 훈련을 해야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전도를 오해하면 안 된다. 성경을 사제들만의 전용으로 만드는 것처럼 전도를 특정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것으로 만들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유언으로 남기지 않으셨고, 모든 성도가 감당할 수 있기에 부탁하신 것이다.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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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 칼럼 - “제자도(Discipleship)” 크리스천헤럴드2023.02.14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과 은혜의 통치이다. 그런데 그 통치를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통치로 들어올 수 있게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통치하에 우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통치하심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삶과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우리에게 이전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 하나님의 통치하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몸소 본을 보이셨다. 오늘도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의 신앙이 항상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의 기준이 예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리 삶 가운데 실제적으로 따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가장 쉽게 정의한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또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셔서 우리의 구세주(Savior)가 되셨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주(Lord)의 자리에 앉으셨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저주로 부터 해방시켜주신 구세주(Savior)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둘째, 예수님을 우리의 참 주(Lord)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댓가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삶을 그의 기준에 맞추어서 재 정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 은혜라고 하더니 결국은 다 드려야 하는 것이네 하고 볼멘 소리를 할 수가 있다. 이런 상태를 잘 표현해 주는 좋은 예화가 하나있다. 오래 전에 찰스 스원돌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본 것인데 아마도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않은 때 만들어진 예화이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는 아직도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뉴욕에 여행을 가려고 L.A. 국제 공항에 나아갔다. 그런데 시간이 궁금해서 한 청년에게 지금 몇시냐고 물어봤다. 그랫더니 그 청년이 몇시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은 어디를 가느냐고 되물었다. 뉴욕을 간다고 하니까 뉴욕의 지금 시간은 몇 시이고 온도는 어떻고 날씨는 어떻고 지금 뉴욕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줄줄 정보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신기해서 그 시계 속에서 그 모든 정보를 다 받을 수 있느냐고 묻고는 그 청년에게 그 시계를 자기에게 팔 수 없느냐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이 청년이 적절한 가격을 요구하여 팔았다. 그 시계를 구입한 사람이 좋은 보물을 찾은 느낌으로 막 가려고 할 때에 그 청년이 그 사람을 불러 세우면서 그 시계를 사용하려면 이것도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이민 가방 두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그 시계가 좋은 정보를 다 주는 것만 좋아해서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가려고 한 것인데 사실은 그 시계를 사용하려면 이민 가방 두개를 들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불편한 줄 알았으면 내가 시계를 사지 않았을 텐데 후회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가고 또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민 가방 두 개처럼 불편하고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결국은 한마디로 묶으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스런 감정이 든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예수 안 믿지… 하면서 구세주로의 예수는 받아들이지만 주로써의 예수는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 쪽 자리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 하시고 우리에게 죄와 저주로 부터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심이 없이 자유를 허락하셨다.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도 허락해 주셨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이제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주었으니 이제는 너희들이 내 부하가 되어서 나의 요구들을 다 들어야 한다고 말하시는 그런 의미의 주, 혹은 왕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은 또 우리가 그의 다스림 안에서 살도록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구세주로서 과거의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또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해 주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과거나 미래의 일만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삶 가운데 우리 가운데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로써 왕으로써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를 착취하고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평안으로 이끄시기 위한 진리로 초대하는 것이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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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성경적 사랑이란 크리스천헤럴드2023.02.07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사랑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관계 속에서 필요한 단어이다.  관계가 없다면 믿음이라는 단어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억지를 부린다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자동차에도 사용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인격적인 대상에게 사용하는 단어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그 속성상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랑에 대상이 없거나 그 대상이 자기가 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학교에 찾아간 어머니는 많은 학생들 가운데 자기 자식을 찾아낸다. 그 어머니의 눈길을 따라가면 그의 자식을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시선 끝에 사랑의 대상인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대상이 필요하기에 그 대상이 없으면 사랑은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그 대상을 잃어버리면 사랑은 고통스러워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 대상이 필요했고, 그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필요한 사랑의 대상이다. 그렇게 창조된 인간이 죄를 범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기에 그렇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안다면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이 이해 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이며, 그것이 왜,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대상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가 소유한 것 중 일부를 주고 만족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 즉 전부를 준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나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신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선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를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여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사49:14) 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빗대어 말씀하신다.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설명하신다.   진정한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빈 껍질 밖에 남지 않은 어머니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안 자식들은 그 어머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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