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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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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결심중의 결심” 크리스천헤럴드2024.01.12
    매년 새해가 되면 가장 사람이 많아지는 곳이 어디일까? 모두가 예상하는 그곳, 그곳이 맞다. 바로 Fitness 클럽. 저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운동을 해서 몸을 튼튼히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기지만, 통계에 따르면, 2,3 주쯤이 지나고 나면 실제로 클럽에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다시 거의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신앙인들의 경우는 어떨까?어떤 설문조사나 통계를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새해를 맞아 여러 계획들을 세울 것이다. 뭐가 있을까?올해는 성경 일독을 하겠다. 올해는 매일 큐티를 하겠다.  올해는 한명 이상 전도를 하겠다. 올해는 어디가 되었든 간에 선교를 꼭 한번은 동참하겠다. 새해에는 새벽예배를 보다 자주 참석 하겠다. 이번 해에는 교회에서 한가지 봉사를 꼭 맡아서 하겠다. 등등..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시에 나도 뿌듯할 것이라는 생각들을 할 것이다. 나는 뿌듯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 딱히 기뻐하지 않으실 이유는 없으시겠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정말 보기 원하시는 것이 다른것에 있다고 믿는다.하나님은 우리의doing에 열광하지 않으신다. 열광할 이유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것의 주인이시요,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아니면 안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달라지는 것은 없다.대신에, 하나님은 우리의 ‘됨’이 하나님의 자녀다움에 근접해 있는 모습을 기뻐하실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영어로 표현 하자면 being  이라고 할수 있겠다. 짧은 칼럼속에 많은 내용을 담아내기 어려워 간단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쉽고 유감이긴 하나, 그래도 독자들에게 몇가지 부탁을 드려보려 한다.무엇을 해서 better Christian으로 보이려고 애쓰기 보다는, 나의 됨을 점검해 보고 나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됨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떤 결심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를 부탁드린다. 4가지를 점검해 보면 좋을것 같다. 오늘의 내 삶에 사랑이 있는가? 오늘의 내 삶에 기쁨이 있는가? 오늘의 내 삶에 자유가 있는가? 오늘의 내 삶에 평안이 있는가?너무 흔한 단어들을 적어보았지만, 사실 이 네가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들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엇을 하더라도 이 네가지가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이 네가지를 잃어버리면 안된다.필자에겐 무남독녀 딸아이가 하나 있다. 나는 열여덟살 내 딸이 무언가를 이루어 냈을때 물론 이제껏 기뻐했고 칭찬해 줬고 치하해 줬다. 하지만 내가 딸에게 가장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그 무엇을 해서가 아닌, 어떤 순간에라도 딸아이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하고 기쁨이 샘솟는 것을 경험한다. 딸아이가 행복해 하는 순간엔 거의 예외없이, 사랑, 기쁨, 자유, 평안의 요소들이 내제되어 있음이 관찰 되더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다르지 않을것이다.내가 가장 행복할때 하나님도 행복하실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는가? 그 행복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얄팍한 쾌락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나누고 간증할 수 있는, 사랑, 기쁨, 자유, 평안을 누리는 참 행복. 사실 그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을때에 가능하며, 원래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갈때 가능하다.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한가지로만 표현한다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때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누군가 나에게 목사님은 딸을 사랑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하기에 앞서서,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되묻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왜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해줄것 같다. 당신도 자녀가 있어보면 이 질문이 왜 쓸데없는 질문인지를 알게 될것이요, 라고 말해주겠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 할만한 짓을 해서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때 부터, 의지적인 결단을 가지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우리를 사랑 하시는 분 이시다. 그것이 은혜요, 그것을 믿는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싶다는 소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대표성품인 사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올해 소원이 있다면, 제발 doing은 걷어 치우자. 내가 사랑의 사람으로 이미 지음 받았음을 깨닫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인간이 할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결단을 해 봄이 어떨런지.이것을 어떤 이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더라. 예수님 처럼 살고싶다. 라고. 그렇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 처럼 살아가겠다는 가장 거룩한 결단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결단을 가장 기뻐 하시리라 믿는다. 한번 사는 인생,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예수님 처럼 말이다! Live like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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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어 른 크리스천헤럴드2024.01.12
    큰딸이 밥을 먹다 물을 엎질렀다. 동생들과 장난치다가 곁눈질로 물컵을 잡다 놓쳐 식탁에 엎지른 것이다. 가족식사를 하다 말고 흐르는 물을 닦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한눈 팔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는 실수였으니 잘못을 지적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어서 주의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아이들 방이 늘 엉망이다. 옷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침대도, 책상도 정리정돈이 안되어 있다. 조금만 부지런해도 이렇게까지 어질러지지 않았을 텐데, 결국 아이들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다시 한번 잔소리를 했다.그러던 어느 날 큰딸과 둘이서 어디를 가게 되어서 차를 타고 가는데 딸아이가 팝콘을 가지고 옆자리에 앉았다. 딸이 조심성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미리 주의를 줬다. 나도 같이 먹으면서 운전을 했다. 그런데 같이 먹다가 그만 내가 먼저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니 흘린 것을 털어내며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아빠가 불공평하다며 탄성을 지른다. 그리곤 하는 말이 자신은 조금만 실수를 해도 혼나는데 아빠는 아무리 실수를 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로 자신은 식탁에서 조금만 물을 엎질러도 혼나는데 아빠는 비싼 노트북에 커피를 흘려서 키보드를 망가트렸는데도 혼나지 않는다며 억울해 했다.실은 얼마 전 커피숍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던 중 곁눈질로 컵을 잡다가 쓰러트려 키보드에 커피를 조금 엎질렀던 적이 있었다. 빨리 수습을 했지만 이미 늦었는지 자판기 키 몇 개가 작동되질 않아 결국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자판기 전체를 교체해야 했다. 그리고 또 이것은 딸이 모르는 일이지만 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몇 해 전 늦은 밤에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다가 깜박 졸아 물컵을 쓰러트려 노트북위에 물을 완전히 엎질러서 노트북을 새로 구입해야 했었다. 그리고 또 솔직히 말해서 내 서재도 아이들 방 못지않게 어질러져 있다. 여러 번 치우라고 잔소리를 하던 아내도 이미 오래 전에 간섭하기를 포기했다.딸아이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운전을 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딸의 말처럼 나는 실수를 해도 혼나지 않는다. 잘못을 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벌을 받지도 않는다. 왜냐면 우리 집에서 나는 가장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인 나를 혼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집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실수를 해도 괜찮고, 잘못을 해도 덮어진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어른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나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내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방종할 수밖에 없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잘못을 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간섭 받지 않는 어른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내 행위를 바로 하지 않으면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더 나이가 들어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하나님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무엘하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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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세계의 변화와 성도의 마음가짐 크리스천헤럴드2024.01.1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인사를 나누며 힘차게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2024년을 전망하는 10가지 트렌드 기사가 영국의 Economist 잡지사의 편집장인 Tom Standage의 글(Tom Standage’s ten trends to watch in 2024)로 소개되었습니다. 개인적 의견을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 투표 대장정입니다. 올해에는 42억명 인구가 속한 나라의 70개 이상의 선거가 예정되었다고 합니다. 요셉과 대니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공동체에서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2) 미국 대선이 11월 5일 실시됩니다. 60번째 대통령 선거/ 제 47대 대통령을 선출하거나 현 46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선거입니다. 동시에 미국 상하원, 주지사 선거도 진행됩니다.  기독교 영성이 회복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3) 기로에 선 유럽의 분위기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시간끌기 속에 유럽과 세계가 연료와 곡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미국이 전쟁에서 빠지려는 분위기로, 유럽의 군비 증강이 요구되는 현시점입니다.4) 중동 지역의 혼란입니다. 지난 2023년 11월 안식일을 틈타서 1400명을 무고히 살상한 하마스의 선제공격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역 내의 하마스 축출을 명분으로 보복 공격을 진행중이고 이란의 참전이 우려됩니다. 예멘의 후티 반군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무장세력이 이스라엘에 항전을 선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화약고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5) 다중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국제기관의 감시 불능 상태입니다. 먼저 36개 아프리카 국가 중에 6개 국가에서 유혈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둘째로  중국 러시아 이란의 연합 공조 세력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서구 연합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대응의 온도차가 국가별로 다릅니다. 동시에 중국의 대만(타이완) 공격에 대한 각국의 온도 차이가 서로 다른 것도 혼란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6) 제 2의 냉전입니다. 중국은 시진핑 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 있고 기독교 탄압을 강화하며 민주주의 확산방지를 위해서 법과 무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외국신앙서적 반입과 전시 및 출판을 불허하며 온라인 상에서 성경 및 기독교 출판물 상거래를 금지하고 있습니다.7) 새로운 에너지 지형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리튬, 구리, 니켈의 중요성은 훨씬 더 증대된 반면에 석유, 개스, 그리고 이들 자원의 공급을 지배하는 지역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원을 무기화해서 고립시키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8)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서구경제는 2023년에 예상보다 나은 성적으로 마쳤으나 아직 고금리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이고 소비가 위축된 상태이며, 상황이 나빠질 수 있는 금융업, 은행과 상업용 부동산은 주의가 요망됩니다. 중국은 현재 디플레이션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미국은 불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라도 나머지 국가들은 위험군에 속해 있습니다.  9) 인공지능의 현실화입니다. 2023년 Big Teck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해였습니다.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등의 주가 지수는 올 한해 80% 이상 상승했습니다. 앞으로 규제들이 더 강화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됩니다.10) 요원한 세계 통합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Tom 편집장은 전 세계가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즐기게 될 것이고, 우주 비행사가 달 주위를 돌고, 남자 20세 이하 크리켓 월드컵을 관람하는 동안에 국가간의 이념, 빈부, 정치, 종교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합니다.한편 비즈니스 10대 키워드 중에서는 특이하게 전 세계 인구 10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는 점과 펜데믹 이후 재택 근무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미국 기업은 60%가 재택근무를 허용하면서 사무실의 1/5이 빈 공간이 되어 주거용 단지로 개조될 가능성이 높다는 두 가지 이슈가 주목됩니다.성경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라’(마24:7~8)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인자가 오실 날’에서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과 능력의 기도로 무장하고 깨어있는 크리스쳔의 삶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더 기도!( The Pray!’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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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세대 간 신앙 전수를 위한 자녀 양육 크리스천헤럴드2024.01.12
    1. 부모-자녀 관계  파울러는 만2-3세까지의 단계를 미분화된 신앙(Undifferentiated faith)의 단계라고 말하는데, 이 시기에는 아이의 인지 발달의 수준도 미성숙하고 언어도 유창하게 발달하지 못한 단계여서 신앙에 있어서도 언어가 아닌 느낌과 감각으로 어렴풋하게 형성하는 단계이다. 파울러는 이 시기가 신앙의 발달이라기 보다는 신앙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덕목과 성품들이 발달하는 시기이며, 이 발달은 대부분 무의식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파울러에 의하면, 이 시기에 경험하는 부모와의 첫 상호 관계와 신뢰, 사랑 등은 아이 내면에 가장 근원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사회발달심리학자인 에릭슨도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와의 관계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기본적인 신뢰와 자율성을 획득해야 하는 시기로서 이 때 형성된 기본적 신뢰는 아이의 전반적인 인간관계와 성격, 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적인 틀을 만들게 되지만, 부모의 양육방식이나 환경이 충분하게 지지적이지 않은 경우 기본적인 불신감이나 수치심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애착심리학자인 보울비(John Bowlby) 역시 이 시기가 부모의 양육방식을 통해 아이가 특정 유형의 애착을 형성하게 되고 이 때 형성된 애착 유형은 평생동안 아이의 인간관계 방식과 성격 특징으로 굳어진다고 말하였다. 정신과 의사이며 정신분석학자인 리주토(Ana-Maria Rizzuto)는 이 시기 부모와의 관계와 부모의 이미지가 그대로 하나님의 이미지로 투사되어 최초의 하나님 이미지가 형성된다고 하였다.이런 여러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이 시기 아이들은 양육자,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일평생 지속될 신앙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아직 인지발달이 미숙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교리나 성경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대신 양육자가 크게 신경써야 하는 것은 바로 부모-자녀 관계이다. 부모-자녀 관계를 통해 아이가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게 되면, 아이는 이 세상과 타인, 자신과 미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갖게 되고, 이는 긍정적이고 편안한 성품, 원만한 대인관계, 그리고 안정적인 정서를 얻게 된다. 이 기본적인 신뢰감은 다른 사람에 대한 편안한 신뢰감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과 연결된다. 즉,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이는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게 된다.또한 부모-자녀 관계의 성격은 자녀에게 평생동안 유지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를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늘 수용적이고 용서하고 지지적이라면, 이런 부모에게서 양육된 아이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역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수용해 주고 용서하는 분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부모가 엄격하고 불친절하거나 거리감이 있고, 조건적으로만 사랑과 수용을 보여주었다면, 혹은 처벌적이거나 비난형이고 심지어는 아이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그 아이는 평생동안 하나님도 사랑보다는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초기의 하나님 이미지는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어 원초적인 뇌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에 좀처럼 교육이나 설교 등을 통해서 수정되기 어렵다.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과 몸으로 느낄 수 없는 경우는 대부분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하나님의 이미지가 그 이후 교회 교육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이미지와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3세 이전 아이를 양육할 때에는 신앙의 전수를 위해 명시적인 신앙 교육에 치중하기 보다는 아이와 따뜻하고 친절한 사랑의 관계를 잘 맺어 아이가 기본적인 신뢰감과 안전감, 그리고 긍정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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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마음을 관리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4.01.12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즉 문제보다 더 문제인 것은 그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을 합니다. 같은 조건의 환경이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문 제가되기도하고,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같은 환경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거침돌이 되기도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 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마음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지킬 만한 것보다"라는 표현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서 최고의 우선 순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지키고 돈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고와 희생을 지불합니다. 그래서 권력과 돈과 건강을 지켰지만 교만함으로 망했다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망한 것이 됩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께 서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유령으로 오해한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지금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은 평안을 상실하고 두려움에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이 평안을 잃고 두려워하게 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이유가 곧 우리들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두려워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 졌음 이러라” 성경은 제자들이 평안을 상실하고 두려워 한 이유를 영적 무지라고 말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주님은 물위를 걸을 수도 있으시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고 믿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영적 무지는 모든 악의 뿌리가 됩니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은 명령문입니다. 어떤 말씀이 명령문일 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책임 문제입니다. 모든 명령에는 순종이라는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 져야합니다. 누구에게도 내 생각의 책임을 길 원하십니다. 전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관리하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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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새해를 시작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Happy New Year! 크리스쳔헤럴드 애독자 여러분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생업 가운데 충만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새해를 다른 말로 원단(元旦)이라고 부릅니다. 원단이라는 뜻은 ‘삶 위로 하늘이 열리는 태초에 떠오른 해,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모든 날짜와 연한의 기준점, 시간의 원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원단의 의미처럼 모든 인간은 빛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며 시편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하고 약속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를 세밀하게 보호하심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새해를 시작하며 누구에게나 설레임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크게 소망이라는 단어로 함축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펼져질 일들을 생각만해도 기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바라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모든 제목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어제보다 더 행복한 오늘을 꿈꾸며 힘차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꿈꾸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실 분에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힘과 능력으로 일으켜 주실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걸음을 인도해 주실 분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 여정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을 바라보면 걱정도 되고 힘이 들고 고생이 되겠지만 큰 산을 지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도우실 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믿음입니다. 저는 새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에게도 큰 산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고백도 간절한 기도제목 가운데 드려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새해에도 분명히 우리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벅차고 감당못할 일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급한 일도 만나고 당황스런 일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누구에게는 메마른 땅이 되고, 광야같은 길이 될 것입니다. 물론 시온의 대로같은 형통한 은혜의 시간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가 해야할 것은 시편의 저자처럼 그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당연히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넘어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그때마다 우리가 일어설 수 있고 마음에 의지가 되는 생명의 말씀을 암송하며 되새기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을 만났을 때에서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죄에 빠져서 죽어가던 우리들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는 자들은 산 소망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되새길 성경말씀을 품고 암송하십시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찬송을 부르십시오. 새해에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들로 채워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우리 인생에 말씀만이 소망이요 기도만이 살길입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쳔헤럴드 애독자들과 함께 부르고 싶은 새해 첫 찬송이 있습니다. 191장 찬송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I’m rejoicing night and day)’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그럼, 이제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새해라는 첫 길을 기대하면서 걸어갑니다. 출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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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할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성탄의 계절이다. 성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성탄절의 시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조상들을 보면, 그중에는 자랑스러운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운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들은 너무나 엄청난 일을 겪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나라가 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기도 하였다.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서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때가 바로 성탄이다. 교회는 성탄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성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성육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탄을 세상 사람들처럼 마냥 기쁨으로만 보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는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야 하고, 묵상하며, 적용해야 한다. 교회는 어두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어두운 곳으로, 슬픈 곳으로, 배고픈 곳으로, 절망과 한숨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곳에는 캐럴도 없고, 화려한 성탄 장식도 없고, 조그만 선물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하고, 물질이 있어야 하고, 손을 잡아주고, 나눔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사람들의 환영과 기대가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곳, 짐승이 있는 냄새나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두지 않고 눈을 두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한없이 낮아지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오히려 소망을 갖게 되었고, 주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소망을 심어 줄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보다 훨씬 좋고, 그래서 더 이상 냄새도 나지 않고, 어둡지도 않다. 교회는 커졌고, 아름다워졌으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름다운 음악과 음식이 있다.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성탄을 축하한다. 모두 기뻐하고 즐겁다. 이런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매년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즐겁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파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그들은 노래할 수도 없고, 좋은 음식도, 함께 즐거워할 사람들도 주변에 없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하다. 교회는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하고, 함께 즐거움을 나눠야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캐럴은 아름다운 교회당 안에서,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좋은 음향 시설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냄새나고, 외로운 곳에서, 목소리 하나로 불러야 한다. 그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회가 많고, 지금처럼 교인이 많은 때가 없었다. 교회는 더 크고 아름다워졌지만, 세상이 더 어두워진 것은 교회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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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공감적 경청의 실행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오래 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 학생분 중에서 연세가 좀 많으신 여자분이 있으셨는데 가끔 나의 사무실에 오셔서 대화를 나누고 가셨다. 한번은 오셔서 삶 가운데 힘든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아들과 딸이 있는데 딸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잘 하는데 너무 힘들게 사니까 그것을 보는 것이 힘들고 또 아들은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것이 또 답답하여 힘들어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들어 드리려고 노력하였는데 계속 그 속에서 빠져나오시지 못하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등등 조언을 조금해 드렸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교수님도 이제 아이들 커보세요”라고 하면서 일어서시는 것이었다. 그때 “아차, 이 분이 그저 문제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인데 내가 분석하고 가르치려고 하였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내 말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들이었지만 그 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대화였다.우리가 공감적 경청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실행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 같다. 우리가 상대방의 정서 상태를 듣어주고 공감해주기보다는 분석하고 가르치고 수정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혹을 떨치고 공감해주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제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몇가지 실제적인 방안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있다.  첫째, 아주 간단한 공감적 경청의 방식으로는 “구나”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기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그랬었구나”라는 간단한 말을 통하여 그분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공감적 경청을 하기위해서는 우리가 윤리적인 논리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당신이 무조건 옳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그 느낌 자체가 옳다는 것이다. 모든 감정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고 그 감정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우리가 반영적 경청 듣기를 실행할 수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상대방의 느낌과 반응을 내가 정리해서 반응해 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느낌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느낌의 원인까지도 이해해 주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이가 힘들어했다. 자기는 수학을 잘 못해서 큰일이라고 하면서 3학년에 올라가면 공부가 힘들텐데 하면서 짜증을 내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너는 충분히 똑똑하고 잘할거야, 걱정하지마, 그러면 지금 예습을 좀 해볼까” 등등 온갖 격려와 조언과 문제해결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짜증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은 그러지 않던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떻게 하던데?”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이 “네가 3학년 올라가서 공부가 힘들까봐 걱정이 되는 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순간 “아차”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아, 선생님 말씀이 맞네. 네가 3학년 올라하고 공부할 것이 걱정되는구나”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의 어려움을 아빠가 비로서 이해해주니까 곧 얼굴이 밝아지고 조금 있다가는 오빠가 쓰던 3학년 책을 가져다가 공부한다고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감의 힘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계와 지도력의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데이빗 옥스버그 (David Oxberg)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Being listened to is so close to being loved that most people cannot tell the difference.)”  다시말하면 사랑이라는 말과 경청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라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또 공동체 속에서 정말로 듣는 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사실 기독인으로써 좋은 관계와 공동체를 찾지만 찾지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싶어하지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말하려고 하지 들으려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섬김을 말하지만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들이 대화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기에 관계와 공동체를 통하여 도리어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한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경청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여도 경청하지 않고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 잘하는 훈련보다는 경청하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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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아이들의 신앙 발달 단계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인간은 기본적으로 영적 존재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종교성이 표현되는 구체적인 종교 전통과 예식은 부모, 사회, 문화를 통해 전수받게 된다. 일차적으로 신앙의 틀을 전해주는 사람이 부모 혹은 양육자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한 개인의 신앙 발달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은 매우 결정적이다. 종교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개인의 신앙은 평생 동안 몇 번의 질적 변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는데, 이 발달 과정은 인지적, 정서적, 관계적 발달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반적인 성격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와의 상호작용과 관계가 결과적으로 자녀의 신앙 발달을 건강한 방향으로 촉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신앙 발달을 저해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신앙을 가진 부모는 그 신앙이 자녀들에게 잘 전수되기를 바라지만, 신앙의 전수는 단순히 교리와 예식을 주입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신앙의 발달 수준을 잘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신앙이 전수되는 매개가 되는 자녀-부모 관계를 건강하고 신뢰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을 교육한다면 신앙의 세대 전수가 더욱 촉진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세대 간 신앙 전수를 위해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발달 심리학과 파울러의 신앙 발달 단계 이론의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신학자이자 목사이며 동시에 심리학자였던 파울러는, 당시에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발달심리학자들인 피아제(Jean Piaget), 에릭슨(Erik Erikson), 콜버그(Lawrence Kohlberg), 길리건(Carol Gilligan) 등의 이론들을 신학적으로 탐구하여 인간의 성격, 인지능력, 도덕성 등의 발달과 함께 신앙 역시 단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방대한 인터뷰와 연구를 통해 이를 체계화시켰다. 파울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영적 존재로 누구나 영성을 타고 나며, 이는 특정 종교적 배경과는 상관이 없다. 영성은 삶을 이끌어가는 동기가 되는 삶의 목적이며 의미이고, 타인과의 관계, 궁극적으로는 초월자와의 관계를 향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경향성이다. 영성은 한 개인이 성장하고 발달하면서 다양한 관계 속에서 공동체와 문화를 통해 특정 모양의 종교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어떤 유형의 종교의 틀을 띄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모든 인간은 인지 능력과 관계성, 그리고 성격이 발달함에 따라 영성과 신앙도 질적인 변화를 겪으며 발달한다. 파울러는 전 생애를 통한 신앙의 발달 단계를 크게 7단계로 구분하였는데, 각 단계를 미분화된 신앙, 직관적-투사적 신앙, 신화적-문자적 신앙, 종합적-관습적 신앙, 개인적-반성적 신앙, 통합적 신앙, 보편적 신앙으로 칭하였다.만 2-3세까지의 미분화된 신앙 단계에서 아이들은 신앙에 있어서 말보다는 느낌, 감각, 그리고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어렴풋하게 배워나간다. 그 다음 3-7세에 해당하는 직관적-투사적 신앙 수준에서는 아이들이 언어를 익히고 글을 배우고 또한 인간관계도 넓혀 나가면서 이미지, 스토리텔링, 감각 등을 통해 신앙을 익히게 된다. 그 후, 초등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신화적-문자적 신앙(Mythic-Literal faith)의 단계로서 이 때의 아이들은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체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이 발달한다. 이와 같은 이 시기 아이들의 인지 발달 수준을 고려할 때, 유치원 단계의 아이들은 그림이나 동화 구연의 방법으로 신앙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있고 초등학교 단계의 아이들부터는 본격적인 교리 교육이나 성경공부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청소년기는 종합적-관습적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에는 부모나 가까운 어른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친구들의 경험이나 미디어 등을 통해 훨씬 다양한 참조를 얻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신앙의 체계를 발전시킨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점차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파울러는 이 시기의 신앙의 모습을 개인적-반성적 신앙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남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에서 자기만의 신앙을 정립하려 한다. 그래서 이전에 순순히 받아들였던 공동체의 신앙 내용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이전의 신앙이 교회의 신앙, 부모의 신앙, 주변의 신앙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자기만의 신앙을 찾아가는 단계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을 배우고 내면화해 나간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하고자 하는 부모와 교회 지도자들은 아이들의 신앙발달 수준에 맞게 적절한 신앙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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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새해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자 (창 25:21) 크리스천헤럴드2023.12.29
    만일 친구 아들의 첫 돌에 1돈 짜리 반지를 선물했을때 그 친구도 내 아들 돌 때에 한 돈짜리 금반지를가져 왔다면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두 사람이 금 1돈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됩니다.  남은 것도 없고 손해 본 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같은 액수를 주고받은 것이 되므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고받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고받지 아니한다면 그 관계는 죽은 관계입니다. 성경은 관계가 단절된 것을 죽음이라 표현합니다. 반면에 주고받으면 생명이 역사합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것을 사랑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삭이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이삭의 환경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반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삭은 자식을 얻기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가 잉태를 했습니다. 위 본문을 보면 이삭이 아들을 얻은 것이 마치 이삭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이 기도해서 아들을 얻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이삭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기에 반드시 이삭에게 아들을 주어야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삭이 아들을 얻은 것이 마치 이삭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고보서에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고 온 것이 마치 엘리야의 기도 때문인 것처럼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열왕기 상 17장과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엘리야에게 나타나 비가 오지 않을 것과 비가 올 것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도록 기도한 것도 먼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겠다고 말씀을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비가 오고 오지 않고가 엘리야의 기도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약 성경에서 그 모든 공로를 엘리야에게 돌리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음을 볼 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때문에 제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효자이며 기본이 갖추어진 아들입니다. 그때 수준 있는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니야, 네가 공부하느라 수고를 많이 했지”  누구의 말이 정답입니까? 만일 여기서 정답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본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며 고마워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삭을 보며 이삭의 아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가, 아니면 기도응답으로 받은 것인가를 따지고,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고 온 것이 하나님의 주권 인가, 아니면 엘리야의 기도 때문인가를 따진다는 것은 너무나 수준이 낮은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시면서도 마치 기도했기에 주신 것처럼 기록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배려와 사랑을 보면서 동시에 같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고했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였노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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