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5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뉴스

  • 161
    [오피니언] 샘신칼럼 - 자족 (빌립보서 4:10-13) 크리스천헤럴드2023.10.26
    운전은 한번 배워 두면 그 운전 기술의 혜택을 평생 누립니다. 운전을 배움으로 평생 그 혜택을 누리듯이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 혜택이 너무나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자족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이라는 단어와 “충분하다, 넉넉하다“는 단어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a self-sufficient and contentment” 스스로 충분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족이라는 단어 앞에 in all circumstances” 어떠한 형편이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어떠한 형편“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이  richness and wealth비천과 풍부라고 말합니다.바울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만족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을 물질에서 찾기 때문입니다.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란 일차적으로는 돈의 많고 적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요 이것을 좀 더 넓게 적용하면 스스로가 처한 환경이나 소유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러면 바울은 이런 놀라운 비결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었습니까? 만일 우리도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어떤 형편이든지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환경이나 조건에 지배를 받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자족을 소유하지 못했기에 가난하면 가난에 지배를 받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부요하면 부요에 지배를 받아 교만하게 됩니다. 이 자족을 배우지 못하면 가난해도, 부자가 되어도 문제가 됩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자전거를 배워야 합니다, 피아노를 치려면 피아노를 배워야 합니다.그렇듯이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배웠다”는 단어는 “실제로 해 보고 배우다,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 배우다, -에 익숙해지다, 습관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즉 우리가 운전을 배우는 원리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운전을 해보지 않고는 배울 수 없습니다. 자족 역시 책상에서 책이나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 보면서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것입니다.가난에 자족하려면 그것을 가난 속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풍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풍부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고서 자신은 풍부해져도 얼마든지 겸손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배웠다는 것은 헬라어 문법상 “부정 과거형”입니다.이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와 훈련을 통해 어떤 과정을 마쳐 이제는 더 배우지 않아도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솔로몬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고 말합니다.바울은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설명합니다. 그 모든 모습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결국 자족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자족을 배우면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떤 수고, 수업료,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배워야하지 않을까요?
    Read More
  • 160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부모 파워 크리스천헤럴드2023.10.26
    상담을 하면서 현장에서 발견하고 놀라게 되는 것은, 상담실을 찾는 많은 분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하나같이 현재 호소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의 원인이 그들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마땅히 자녀를 잘 돌보고 사랑해야 하는 부모가 어째서 자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고통 때문에 상담까지 받아야 하는 걸까? 한 두 명의 케이스가 아니라 정말 과장하지 않고 우리 상담실을 찾는 분들의 99% 가 그들이 상담받는 이슈에 부모가 직/간접적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성/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기가막힌,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렇다고 해서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를 학대하거나 유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에, 상담실을 찾지 않은 분들까지 고려하면 부모의 부정적인 영향이 그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으리라고 희망해 본다. 또한 많은 부모님들이 그들 나름으로는 자녀들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정작 자녀에게는 가슴에 화살로 꽂히고 목을 조르게 되는 것을 부모님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부모, 자녀가 서로의 필요와 공급이 잘 맞지 않아 발생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즉, 자녀들이 정말 필요한 것은 부모가 주지 않고 반대로 부모는 자녀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퍼 주는 경우가 그렇다. 어떤 경우는 부모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자녀들에게 상처가 되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다른 일(부부갈등, 가정경제, 건강문제, 고부문제 등)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녀들이 보이지 않아 자녀들이 방임되는 경우도 있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엉뚱하게 표현해서 자녀에게 사랑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부모 역시 자신의 부모에게서 학대나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이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키우게 될 때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부모가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알려진, 혹은 알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자라고 있다. 매일같이 부모에게 받은 상처로 성인이 된 후까지 고통 속에 신음하는 내담자들을 만나면서, 이런 현실을 마주하는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안타깝고 슬프다. 심지에 그 부모들 중에는 예수 잘 믿는 사역자나 교회 지도자들도 부지기수 포함되어 있으니 이 상황에 더 가슴을 치게 된다. 고통에 신음하다 더이상 견디기 어려워 상담실을 찾는 분들은 상담사들이 상담이라는 방법을 통해 치유와 회복 과정을 돕겠지만, 이것은 늘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을 배운 많은 분들이 각자의 교회나 지역에서 부모나 예비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모 세미나 같은 것들을 많이 개설해서 부모를 위한 교육을 많이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상담실을 찾는 분들이 줄어 들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비록 나는 상담을 가르치고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아무도 상담받을 일이 없는 그 날이 오기를, 그래서 상담이 이 땅에서 필요없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상담을 가르치고 있다.우리는 모성애를 포함하여 부모의 사랑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자녀를 늘 따뜻하게 품어주고 수용 해준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녀에게 고통을 주는 엄마를 보면서, 그래도 저 엄마는 자녀를 사랑하기는 하겠지, 단지 표현을 못하는 것 뿐이야, 라고 단정짓고 싶어진다. 상담실을 운영하면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기가 막히게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고 자녀를 사랑할 수 없는 부모가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자녀들은 그 부모가 언젠가는 사랑, 관심, 인정을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애타게 부모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온 세월이 어떤 분은 이십년, 어떤 분은 육십년이 된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것은 죄성으로 인해 타락한 인간 모습의 한 단면이다. 마땅하게 기대되는 부모의 사랑조차 죄성으로 이렇게 망가져 버렸다. 이렇게 부모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가진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기독교 상담에서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49:15)    다음 호부터는 부모로 인해 자녀들이 어떻게 상처를 입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눠보려고 한다. 
    Read More
  • 159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하이터치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10.26
    대통령, 교육부 장관이 바뀌어 교육 정책이 바뀌고 교육부 장관을 부총리로 해도 대학 입시 중심의 교육이 계속되고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는 사람들의 인식이 계속되는 한 교육의 개선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급격한 경제 성장이 짧은 시간에 이뤄지고 일할 사람들이 필요하니 교육은 주입식과 획일화의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엘리트를 양산해 내었고 그 시대에 필요한 성과도 만들어 내었다. 이때 당시로서는 이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들어선 지금은 각 개인의 재능과 창의성이 중요한 때가 되었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교육으로 성적으로 평가하던 방법에서 각 개인의 특성에 맞는 ‘하이터치 High Touch’의 방법으로 이 시대가 필요한 인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 중심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도 그동안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여 학교 교육의 방법을 도입하여 사용해 왔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도시의 교회들은 대형화가 되었고 그 사람들을 지도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여러 훈련 프로그램들을 만들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직분을 주고 교회에서 섬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회도 역시 획일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교회에서 학교 커리큘럼처럼 정한 과정을 성실하게 거친 사람만 교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형교회가 주도하고 자신들의 프로그램 세미나를 열고 그 교회처럼 커지기를 원하는 수많은 목회자가 몰려들어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교회가 그 교회처럼 되기를 노력했다. 마치 기업들처럼 자기들 프로그램을 그대로 베낀 교회 중에서 성공하여 자기들처럼 된 교회들을 선전하고 또 그렇게 그룹을 만들어 뭉칠 때 그것을 바라보던 다른 교회들은 조급하였고 소외감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 모임에 참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몇 교회나 진짜 효과를 보았는지는 미스터리이다. 그런 프로그램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여긴 목회자들은 다른 대형교회의 프로그램에 또 참석하고 그렇게 몇 군데를 기웃거리지만, 자기들은 그 교회처럼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하다.교회는 공동체이지만 각 개인의 특성과 은사로 섬기는 공동체이다. 이제는 예전과 같은 획일화와 주입식에서 벗어나 개인 맞춤 신앙 콘텐츠를 만들고 지원하고 시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목회자는 각 교인을 잘 알아야 하고 그 교인 개인에게 무엇이 신앙적으로 필요한지를 파악하고 양육해야 한다. 교인들의 가정, 사회생활, 직업과 사업의 내용들을 신앙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지도해서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과 세상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지금은 어지간한 주제들은 CHAT GPT를 통하여 정리가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예전과 같은 문제 풀고 답 달기 정도가 아니라 각 교인들의 성향과 역량에 맞는 데이터가 만들어져서 그것을 기반으로 그 교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양육과 훈련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어느 곳 보다 더 ‘하이터치 High Touch’가 필요한 곳이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봉사하는 사람을 만들고 직분을 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업을 어떻게 운영하며, 어떻게 소통을 하는 것, 자신의 비전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한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잘하는 일꾼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과 인성 그리고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야 한다. 
    Read More
  • 158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3천번 외친 영광스런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천헤럴드2023.10.26
    지난 토요일 저희 부부가 함께 참석했던 소중한 모임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회를 10년이 지나도록 쉬지않고 진행하는 중국교회(은혜의 여정 교회)의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마침 저희는 중보기도의 후원이 절실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중에 “교회에 기도가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새벽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라고 도전을 드렸는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성도님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장 월요일부터 우선 40일만 하기로 하고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모임도 어색하고 피곤하고 졸려서 힘들었는데, 기도하는 동안 교회 공동체가 뜨거워지고 기도응답이 임하고 예배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40일을 마치고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셔서 1년능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예배에 집중하고 평일에는 기도회를 쉬지않고 모였습니다. 처음 선교를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분들이 지금은 기도제목을 제작하며 한 영혼부터 온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중보자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펜데믹으로 모일 수 없을 때는 줌으로 기도회를 이어갔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기도하는 분들이 서로 정이 들었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하셔서, 팍에 모여서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두고 간절한 예배와 뜨거운 기도회를 여러 차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셔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생활이 없던 자녀들도 모임에 나와서 부모님들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핍박하던 남편과 친척들도 기도모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두겹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가족들이 모여 감동스런 세례식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지난 주말에는 응답의 10년을 감사하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서로 감격하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은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지난 10년의 기도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의 기도영성과 세계선교를 향한 마음은 더욱 확고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선교현장과 사역을 이해하고, 타문화권에 대한 관심과 나누고 베푸는 은사와 능력이 향상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과 목회의 동역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제가 배운 경험은 기도가 기도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사역의 원동력인 것을 누구나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씩 품고 기도하며 한 생명,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알기 원하는 간절함이 깊어졌습니다. 이번 감사/축하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믿게되었습니다. 우리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기도는 역사하며 응답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민생활에서 느끼고 삶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모든 내용들이 우리가 드려야 할 마땅한 기도제목들입니다. 지금도 이 땅 곳곳에서 은밀하게 눈물로 기도하는 중보기도 사명자들이 계십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중보기도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의 눈물과 땀을 주께서 보고 듣고 계십니다. 이제 곧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조금 더 힘을 내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우리 함께 기도의 역사를 통해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오늘도 그 사랑이 그립고 목마릅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사랑때문에 가슴이 뛰고 설레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춤추게 합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샬롬!
    Read More
  • 157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텐트 메이커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나는 목회를 하면서 동시에 회사를 다닌다. 전도사 시절 신학교를 다니면서 아는 지인의 소개로 아르바이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의원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한의원이나 카이로프랙틱 의료원에 물품을 공급하는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생소한 분야였다. 그래도 가난한 전도사로 신학교 등록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열심히 일했다. 다른 학우들이 수업 후 커피를 마시러 패스트푸드점에 간다고 할 때 함께 갈 수가 없었다.내심 부러웠다. 함께 공부하는 동역자들과의 교제가 너무나 부러웠고 아쉬웠다.나에게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즐거움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기억들도 많았다. 아내가 식당에 일하러 가면 어린 꼬맹이 딸을 맡길 때가 여의찮았다. 미국에서 아이를 맡길 때는 상당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신학교 수업에 데리고 갈 때도 있었다. 다행히 외국인 교수들은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가난한 신학생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셨다. 아이가 도서관을 뛰어다니다 사서에게 경고받기도 했다. 물론, 그 사서도 다른 학생들의 항의가 있었기에 부득불 나에게 전달한 것이다. 수업 중 아이가 큰일을 보게 되면 화장실에서 뒤처리해야 했다. 아무튼, 어려운 시절을 지나가기 위해 나는 한의원 물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재는 이 회사의 매니저가 되었고, 목회와 글 쓰는 일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나는 이 회사에 다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 담임 목회와 영혼 구원에 전념하면서 이 회사를 통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도하겠다고 마음먹기 전의 당신이 처한 상황이 전도 하기로 마음먹은 후의 상황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처음 내가 이 직장에서 일할 때, 나는 나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일하는 시간에 열심히 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일 못 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이 직장과 일은 나의 어려운 상황을 위한 최소한의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복음과 전도의 다양성을 깨닫고 나니 사람이 눈에 들어 오고,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이 전도를 위해 엄청난 잠재된 힘과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직장에서 판매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물건 하나하나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어제까지 똑같았던 환경인데 전도하기로 마음먹고 결단하니 직장도, 가정도, 교회도 다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 회사에서 알게 된 많은 정보 가운데 약재나 보약, 공진단과 같은 제품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회를 개척하고서 주변에 몸이 아프거나 약한 사모님들과 성도들 또 태신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지속해서 보약이나 약재를 통해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친절과 섬김으로 몇 년간 꾸준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꼭 내가 다니는 교회에 등록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내 마음과 나의 정성 어린 섬김과 헌신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생각해보라. 어제까지 물고기와 배와 그물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사람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의 배와 그물을 버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이것이 예수님과 사람에게 미친 제자들의 이상한 모습인 것이다.
    Read More
  • 156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징 계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때가 많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사랑은 애정만 아니라 징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다. 실수가 아닌 잘못을 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 따끔하게 혼을 내고 벌을 세웠다. 이제 말귀를 알아듣는 다 큰 자녀에게 매를 들 수는 없고 딸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고 애지중지하는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일주일동안 사용금지를 했다. 사실 그것도 많이 봐준 것이다. 당시 마음 같아서는 더 오랫동안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이 마음이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날 밤이 되자 화가 가라앉고 마음이 누그러지자 딸에게 너무했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핸드폰 없이 많이 불편할 텐데 적당히 하고 돌려줄까 망설였다. 내 책상위에 보관중인 큰딸의 전화로 계속해서 전화와 문자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딸의 친구들이 연락이 안되니 계속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딸아이를 훈계할 목적으로 전화를 빼앗은 건데 마음이 누그러졌다고 해서 없던 일로 한다면 아니 한만 못한 일이 되고 말 것 같았다. 징계를 중단하고 전화를 돌려준다면 결국 아이를 벌한 것이 화풀이한 것밖에는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둘째 날이 되자 아이가 측은해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좀 심한 것은 아닌가 싶어 다시 또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셋째 날이 되자 이젠 오히려 내가 안달하며 돌려줄 명분을 찾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핸드폰 없이도 잘 지내고 익숙해져 괜찮아 보이는데 오히려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를 볼때마다 안쓰러워 징계를 하는 내가 벌을 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늘 핸드폰을 쥐고 살던 딸아이 손이 어느 순간 책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방학때라서 집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TV 도 볼만하게 없어 심심하니까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원래 책을 좋아하고 잘 읽던 아이였는데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부터 필요에 의한 게 아니면 예전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핸드폰이 없어지자 이전에 좋아했던 책으로 다시 눈을 돌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은 것이 잘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주일 후에 전화기를 돌려줄 때 딸아이에게서 아무런 섭섭한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딸 둘 다 이 과정을 잘 넘긴 것에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딸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줬고, 아내도 딸에게 징계기간을 잘 견디고 핸드폰을 돌려받은 것을 칭찬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마치 무슨 작은 경사라도 생긴 듯 축하를 건네고 함께 결과에 기뻐했다. 딸아이도 아무런 원망없이 밝은 모습으로 핸드폰을 돌려받고 좋아했고,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 같았다. 이 과정을 지나며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에서 마음과 생각이 멀어지면 그 방해하는 것을 빼앗으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 순서가 바뀔 때 다시 순서를 바로 하시기 위해 잠시 빼앗아 놓기도 하신다.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약 나에게서 어떤 소중한 것을 취하실 때가 생기면 내가 그것을 하나님보다 먼저 두었던 것은 아닌지, 혹 그랬던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1-12절)
    Read More
  • 155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천국은 어떤곳이라고 생각해?'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필자가 주중 세상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 하기 위함이다. 경험해 본 바로는,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실현은 상대방의 아픔에 함께 아파해 주는 것 이다. 오늘 칼럼은 10여년 전쯤 개인 SNS 에 올린 짧은 글로 대신해 보려한다. '천국은 어떤곳이라고 생각해?' 달라스 큰형네 방문했을때 어느날 저녁 큰 형님이 내게 한 질문이다. 얼른 생각난 것이 아담스의 '거룩한 성' 노래가사였다. '유리바다, 황금길, 보석으로 꾸며진 방들, 찬란한 곳,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곳, 또 뭐가 있더라....'듣고있던 형이 씨익 한번 웃으시더니만 "난 그런건 필요없고, 원배와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서로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서로 알아들을 수 있고, 서로 웃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원배.. 큰형수님이 결혼 후 10년만에,그것도, 3번 유산후에 4번째 임신만에 낳은 큰 조카..남들보다 똑똑하게 자라던 아이가 돌 지나서 얼마 후에 자폐 진단을 받았다. 지금 현재 형님 부부의 간절한 소원은 이런 것들이다. '날 엄마라고 한번만 불러 줬으면…'아빠 사랑해,  라고 하며 한번만 안아줄순 없니..' 그런 것들인 것이다.사람들은 저마다 아픔을 안고 산다. 죽을때 까지 해결되지 않는 아픔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천국이 필요함에도 조그마한 천국이 되어야 하는 교회임에도 상처있는 사람들, 아픔있는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 분명함에도 그 상처를 부여잡고 함께 울어주기는 커녕 서로 '바보들' 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있다.상급이 어쩌니 축복이 어쩌니 응답이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눈물, 상처, 아픔 따위의 문제들엔 관심가질 시간이 도무지 없는 듯 하다. 교회가 병원이기를 포기한 그 순간 더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울고있다. 말끔한 찬양팀 단복입고 멋진 소리의 찬양을 들려주는 것으로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허공에 외쳐대는 '받은 복을 먼저 세어보아라'는 설교로도 그들의 상처를 싸매줄 수 없다. 죽을때 까지 아파할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것만이 유일한 치료의 방법이다.오늘 따라 큰형님 생각이난다.형! 천국은 형이 생각하는 정말 그런 모습일꺼야.  형! 미안해, 이제껏 같이 울어주지 못해서..
    Read More
  • 15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아! 바람… (마 14:28-30)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나 고생을 하고 그 와중에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고, 물속에 빠졌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물속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건입니다.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찾아왔습니다. 흔히 우리는 순종하면 바람이 없고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길에 바람을 만나면 당황하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바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또한 주님은 바람이 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아니 우리의 인생길에서 바람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람을 만날때 제일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이 바람이 우연이 아니라 뜻이 있는 바람이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찾아오는 바림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람은 제자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그 바람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도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들은 바람으로 인해 주님을 더 깊게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람을 허락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즉 제자들은 바람을 겪으며 주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결과 주님께 경배하는 예배자가 됩니다.본문 30절에 “바람을 보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 “현재 분사”입니다. 그 말은 계속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고 결국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이어 그는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우리는 여기서 두려움과 의심은 믿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줌을 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의심을 있다면 우리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과 의심을 허락한 것은 바람이 아닙니다. 바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입니다.우리의 인생에 바람은 항상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바람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 바람이 나에게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두려움, 의심이 찾아옵니다. 해결책은 주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함으로 베드로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베드로는  전무후무한 물위를 걷는 체험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베드로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말씀인데도 마가복음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우리는 바울의 다음 고백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2:1)  바울은 자신이 14년 전에 체험한 삼층 천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론으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환상과 계시를 말하는데 무익하고, 부득불,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 체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고 보았고 깨달았으면 우리는 체험을 말할 것이 아니라 알고 보고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 믿음의 눈으로 보면 기적이 아닌 일이 없습니다.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이 영적인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체험을 위해 바람을 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바람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길에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바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는 바람은 제자들로 하여금 힘들게도 했고, 물에 빠지게도 했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빠졌다가 예수를 보고 물속에서 나옵니다.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았을 때는 물위에 있었습니다.문제는 바람을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볼 것인가를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물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물위에 있습니까?
    Read More
  • 153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쌓인 설거지와 밀린 중보기도 크리스천헤럴드2023.10.14
    우리 삶에서 예정된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일할 때에도 즐겁고 대체적으로 유익합니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며 맡은 일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마음에 여유와 넉넉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일피일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떠밀려서 버티다가 마감시간에 임박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불안정하고 조급하고 긴장된 순간의 연속일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면 수정이나 교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복이나 보충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점을 발견했을지라도 기회와 시간을 상실했기에 불리함/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전문가의 탁월한 조언이나 지혜를 첨부하고 포함시킬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서로 약속된 큐티나 부탁을 받은 기도제목을 뒤로 미루셨던 경험을 해보셨나요? 특히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지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저는 얼마전 저희 집 앞에 전기배선 작업때문엔 시멘트 블럭을 깨고 파헤치는 큰 공사를 진행하느라 이틀동안 단수와 정전이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냉장고에 음식은 녹아내리고, 전자제품들 충전을 못했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은 캄캄해서 아무일도 못했습니다. 조금씩 집안 일들이 밀리고 식사하고 남은 설거지가 수북하게 싱크대에 쌓여만 갑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주일 설교시간 만큼 신기하게도 다음 밥 때가 이렇게 빨리 다가오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설거지는 절대로 뒤로 미루면 안된다는 주방에서의 삶도 함께 터득했습니다.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던 그릇들과 음식을 치우는 설거지가 금방 산더미가 되듯이 우리 삶 속에서 기도제목이 뒤로 밀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바빠서, 귀찮아서 나중으로 미루고 또 미루다가 보면 어느새 싱크대가 차고 넘쳐서 설거지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당장 팔을 걷고 수세미를 들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놓치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정리하려면 더 많은 수고를 해야합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기도할게요’라고 말만하고 기도하지 않는 분들을 많이봅니다. 당연히 습관적으로 ‘기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기도할게’ 라고 말하고 지키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린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는 기도한다는 말을 더욱 신중히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설거지는 말로만 할 수가 없습니다. 깨끗하게 치우는데는 시간과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기도 역시 온 맘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평안하고 시간될 때에, 간절한 기도는 우리 영혼의 힘과 능력과 활력소가 됩니다. 영적 피노키오가 되지 마십시오. 기도를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지금 생각나는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시대적 사명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대로 살아계신 주께서 베푸실 기도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샬롬!“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 아멘!
    Read More
  • 152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선교적 영성 (2)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하나님의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간의 영과 육체를 나누고 영이 육체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하며 육체는 단지 영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부산물 혹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이원론적인 태도에 반하여 영과 육을 단지 다른 두부분으로 본다. 그리고 육을 통하여 구체화된 영이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를 보되 육의 관점에서 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육으로 표현되지 않은 영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을 중요하지 않게보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성을 말하면서 육화(Incarnate)되지 않은 영성을 많이 보게 된다. 오늘날 일상 영성은 육화된 영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세상에 대한 이해에서도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텍스트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컨텍스트를 텍스트가 펼쳐지는 현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였다. 고정된 텍스트가 있고 컨텍스트 (세상)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의 발전으로 점점 더 텍스트의 의미는 컨텍스트가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된다.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따로 어떤 절대적인 의미나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이다.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는 비로소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영성이어야한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 세상의 이슈에 대하여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긍정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 공적 영성 등이 이런 면에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영성, 인간의 영과 육이 통합된 전인적인 영성, 세상을 적극적으로 비판적으로 그러나 긍정하는 모습, 하나로 통합하여 말한다면 선교적 영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신학을 한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어떤 추상적인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가 참예하는 관점에서 우리의 신학을 한다.  둘째,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에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일하셨는지를 기록한 하나님의 선교를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성경의 몇몇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나 관심인 것이 아니라 성경은 기본적으로 선교에 관한 책이고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우리의 선교라는 해석학의 틀을 가지고 이해될 때에 바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다.  세째, 기독교 영성은 본질적으로 선교의 영성이다. 존재론적인 영성이 따로 있고 그것의 표현으로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은 선교의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선교라는 틀 안에서 존재의 여러 측면들이 이해되고 강조되어져야 한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