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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희민 목사 지상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1)

작성일 : 20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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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8장 22절 ~ 26절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새생명선교회 박희민 목사는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 중 한 명이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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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을 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두 가지 독특한 치유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7장 31절 이하에 기록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준 사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눈먼 사람을 고쳐준 기적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했다(이사야43장 8절). 예수님은 바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지방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한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다. 그때 사람이 나무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안수해서 그가 눈을 떠서 주님과 자신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병자를 고치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왜 두 번에 걸쳐 고쳐주셨는가? 마가가 이 기사를 기록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각장애자는 인간의 ‘실존’이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예례미야 1장 11절에도 하나님이 예례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질문하셨다. 그러자 예례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살구나무를 히브리어로 쇠카드란 단어를 썼는데 동사가 될 때는 ‘지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를 추운 겨울에도 지켜주셔서 이른 봄에 그 가지에 하얀 새싹과 눈이 나오듯이 유대와 백성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겠다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


1520년에 멜리건(Mallegan)이라는 사람이 남아메리카의 끝 티에라 델 퓨고(Tierra del Fuego)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큰 배를 타고 나타나는 자기들을 원주민들이 어떻게 대할까 많은 염려를 안고 육지에 다가갔다. 그런데 멜리건과 그의 선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있었다. 그곳 원주민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묘히 원주민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왜 그들의 눈에 안 띄었을까? 


원주민들의 눈에는 작은 카누(canoe)는 보이지만 큰 배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큰 배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생각 안에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다. 나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사실은 보았던 것 아니면 상상 안에 있는 것들만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지만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산다. 


사람은 자기가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루지 못한다. 흔히 이것을 비전이라고 부른다. 에스겔은 해골 골자기의 마른 뼈가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다. 조각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버려진 돌과 유리 조각을 통해 멋진 예술품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라이트형제는 하늘을 날으는 새를 바라보면서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에 대한 환상과 비전을 바라보았다. 디지니 월트는 너무 가난하여 창고에서 잠을 자는 어렵고 고생스런 생활에서도 낙심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쥐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어린이들을 기쁘고 즐겁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통해 디즈니 월드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다. 미케란제로는 큰 바윗돌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윗의 조각을 머리 속에 상상했다. 듀츠라는 조각가는 질이 좋지않아 버려진 6미터 대리석을 주워다가 그것으로 불후의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남겼다.


사람은 자기가 꿈꾸고 비전을 갖는 것만큼 큰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나 과학자. 그리고 사업가들을 살펴보면 마음속에 먼저 어떤 비전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영적으로도 거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환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삼손은 불레셋 사람들에 의해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히는 비참한 고통과 실패 속에서 오히려 영안이 뜨여져 자신을 바로 바라보며 블레셋 무리들의 잔인함과 죄악상을 직시하면서 마지막 순간이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으며 영광 돌리는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다. 이것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말한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 The 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라는 말이 있다. 같은 가나안땅을 정탐하고도 12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달랐다. 이것을 해석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꼭 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사람을 볼 때 현재만 보지 않고 그의 미래와 잠재력과 가능성을 바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눈에는 육안, 지안, 영안이 있다. 세상에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지안이 어둡고 멀어서 지적 세계를 바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외국을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한지 모른다. 죽인다는 말인지 살린다는 말인지 몰라 답답하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면 얼마나 세계가 넓어지고 재미있는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가 영안이 뜨여질 때 더욱 광활하고 넓은 진리의 세계가 펄쳐지고 놀라운 영적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이 보지못하는 보이지 않는 넓고 깊고 높은 광활한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한국장의사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는데 어떤 분이 들어와 소변을 보고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불을 끄고 나갔다. 그때 얼마나 캄캄한지 지옥 같았다. 장의사집이 좀 음침하지 않은가?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눈을 떴어도 생명의 빛, 사랑의 빛, 진리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같은 캄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빛이 있어도 또한 사람의 관심이 없으면 매일 다니고 수십 년 산 길 이름도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20년 이상 지금 사는 집에 사는데 집 바로 윗 길목 이름을 모르고 지냈다. 사람은 자기와 상관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밤낮 그 옆을 지나도 길 이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길이 보이게 되고 길이름도 기억하게 된다. 좋은 것들이 보이게 된다. 상대방의 아름다움, 장점과 잠재럭이 보인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 


아내가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는 기억을 잘못하는데 아들의 전화번호와 손주들의 생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관심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이 있다. 놀라운 기억력과 잠재력이 있다. 그것을 발견치 못해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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