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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수의 이름

작성일 :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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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묵 교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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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초등학교 때 교통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교통이라는 글귀의 완장을 차고 거리에 나아가서 교통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학교 앞뿐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까지 가서 교통정리를 하고 오기도 했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멀리까지 교통정리를 하고 오는데 끝이 나면 차를 얻어타고서 학교로 와야 했다. 

어렸지만 교통이라고 쓰인 완장을 들고 흔들면 큰 트럭이 와서 서고 태워주어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차를 타는 것이 귀한 시절이고 아주 기분 좋은 일인데 그 교통이라는 완장을 흔들어 큰 차를 세울 때면 아주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았다. 

비록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학교와 경찰서에서 발급해 준 교통이라는 완장 때문에 트럭이 서서 태워준 것이다. 그 완장은 경찰서와 학교의 권위를 담고 있는 작은 표시였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손에 아주 귀한 완장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라는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예수라는 이름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소중한 것이다. 그까짓 교통 완장 하나 가지고도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하나님의 권세를 담고 있는 예수 이름은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 이름인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에 따라서 우리를 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존재이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귀한 신분을 회복해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선물을 주셨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하나님 나라와 권위를 누릴 수 있도록 그 귀한 이름 ‘예수’를 값없이 주셨다. 마치 시골의 꼬마 어린이가 교통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찰서와 학교의 권세를 누리듯 예수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요한복음 16:23-24절은 이 점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귀한 이름 예수를 주신 것은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이름 예수를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삶은 충만한 삶이다. 생명과 사랑, 기쁨과 즐거움, 열매와 성취, 깊이와 의미,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충만한 삶을 우리에게 의도하셨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혹시 결핍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가? 삶의 문제로, 인생의 고난으로 지쳐있고 마음이 상해 있지는 않은가? 여기 우리 손에 귀한 이름이 주어져 있다. 두려움과 걱정이 지배하는 삶이 아닌 갈등과 소외에 눌려 사는 삶이 아닌 풍성한 삶, 기쁨의 삶, 생명의 삶이 예수 이름 안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좌절을 모두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우리의 꿈과 소망 그리고 우리의 바람을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그 이름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늘 나라의 권위를 담은 이름이다. 그 이름은 영원하신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많은 경우에 걱정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간다. 삶이 이런 것들로 찌들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삶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간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것을 미리 걱정한다.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들을 걱정한다. 걱정 때문에 걱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우리는 걱정이 아니라 평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죄악으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죄에 이끌려 다니고 살아가고, 죄의 마땅한 값을 받고 살아간. 그래서 정죄와 죽음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이렇게 살아 마땅하다는 정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께 우리의 죄악을 고하여 드리고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이고 화해이다. 예수의 이름 안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다. 

삶의 환경들로 인하여 마음의 소망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는 안된다. 손에 쥐어진 예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꿈과 소망을 이루어주신다. 미리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선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이름을 통하여 충만하고 새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야한다. 그 이름을 누리고 전해야 한다.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한다. 그 이름이 어떤 종교지도자의 이름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 이름이 어떤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 때문인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이름은 참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권세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야 한다.



신선묵 교수

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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