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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희민 목사 지상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2)

작성일 :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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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8장 22절 ~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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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제목의 설교 두 번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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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사람을 데리고 왔다


사람들이 눈 멀어 보면 그 불편하고 비참 함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길을 가다 잠시 눈을 감고 백 미터만 걸어보자.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 인가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눈먼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 앞에 나오고 그를 만나면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된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잠재력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잃어버린 삶의 이상과 비전을 되찾았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삶을 살며 방황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참된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죄된 생활을 청산하고 인류역사에 빛나는 훌륭한 영적 리더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감동을 주고 변화시키는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이 우리 삶도 만져주셔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만져주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은 한 번에 완전히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왜 두 번이나 안수를 했을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보면 이곳에서만 두 번 안수를 해 주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단번에 주님을 밝히 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이웃과 세상을 밝히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양육 받고 훈련을 받으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3: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오직 앞에 있는 표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했다.


“다시안수 했을 때, 그가 주목하여 보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했다.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더욱 깊이지고 깊은 진리의 말씀과 은혜 안에 잠기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믈을 던져라고 하셨다. 그가 순종했을 때 그믈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떠서 진리의 세계를,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인생과 사물의 외모만 보지 아니하고 그 중심과 핵심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남으로 믿음의 눈이 뜨여질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된다. 피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의 외모나 소유나 지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과 그의 잠재력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 속에 있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없는 생명을 바라보게 된다.


신령한 눈이 뜨이고 밝아질 때 자기 경험을 중요시 하거나 자기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며 아름답게 보인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새 눈이 뜨여졌다.


사물과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안이 뜨여져야 한다. 영안이 띄여지게 될 때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역사관이 달라진다. 삶의 이상과 비전이 달라진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을 보면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했다.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동과 삶이 달라지게 된다. 새로운 자아상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오늘 분문 뒤에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자 베드로가 그리하시지 말라고 애원하자,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거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은 떴지만 영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냐? 사람들의 눈을 말씀으로 뜨게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히려 눈을 멀게 하는 일을 할 때도 많다.


H.G.웰스(H.G.Wells)라는 작가가 쓴 ‘The Country of the Blind(시각장애인들의 나라)’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높은 곳을 팀과 함께 탐험하다가 혼자서 절벽으로 떨어진다. 다행히 눈 쌓인 절벽이라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아래 마을은 전설의 마을이었는데 앞을 못보는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었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I can see.”라고 말한다. 이곳 주민들은 “see?” 처음 듣는 말이다. 결국 이 사람은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 된다. 그리고 바위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덜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말도 더듬는다고 생각하면서 한마디로 개발이 덜 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란다. 그래서 손을 꼭 붙잡고 안내를 한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를 하고 있다. 길을 가면서 주인공은 말한다. “I can see it(나는 볼 수 있다).” 이에 답변한다. “There is no such word as see(볼 수 있다는 말은 없어).


이렇게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그곳의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다. 청원했는데 부모는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 보낸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러면 이 어리석은 자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는데 그곳 의사가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낸다. 주인공의 두뇌가 병이 들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데, 두뇌가 이처럼 개발이 안 된 이유를 찾았다고 한다. 두뇌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눈이 문제라고 말한다.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두뇌에 손상이 왔다는 것이다. 이 눈을 빼어내면 두뇌도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딸을 시집보내도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한다. 주인공은 수술하는 날 아침 자신의 눈이 없어지는 날 아침 탈출한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소설이다. 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있다. 눈을 빼야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나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을 보면서 살아간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자라는 편견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이솝우화에도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한 눈 가진 원숭이가 사는 마을에 가서 완전히 바보 취급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디. 영안이 먼 사람들은 오히려 영안이 뜨인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을 할 때가 있다. 오늘날 교회도 눈먼 사람들이 판치니까 눈뜬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취급 받을 때 많다.


그럼 왜 눈이 멀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주님처럼 영안을 떠서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

우리의 죄와 욕심, 이기심과 정욕 때문이다. 

이 설교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영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며, 이웃과 세상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의 장애인은 눈을 떠서 무엇을 보기를 원했을까?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실존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하셨으며 세상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 삶의 뚜렷한 소명과 사명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 우리가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가까운 집으로 가서 우리 가정 안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이다. 우리 가정과 친척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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