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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희민목사 지상설교 - 부활의 승리 (1)

작성일 :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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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1절 ~ 18절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들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자신의 설교에 담기기 마련이다.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부활절기를 지나는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부활의 승리’라는 제목의 설교 중 첫 번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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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이다. 그중에도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요 극치다.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서양격언에 ‘마지막 웃는 자가 참으로 웃는자’라는 말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끝장나고 패배한 듯 보였다. 그래서 심지어 제자들도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져 옛날 일터로 돌아갔다. 로마 군병들과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부활의 아침과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선이 악을, 진리가 비진리를, 사랑이 미움을, 생명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소망과 힘과 용기를 주었다. 

부활절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누릴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정신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빈 무덤에 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다(He is not here. He is risen)”라는 메시지에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고난, 시험, 두려움, 문제, 질병, 죽음 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군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부활주일 아침에 어린이들에게 부활주일에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무엇이냐? 물었더나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놀라움(Surprise)이라고 엉뚱한 답을 했다. 그렇지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가장 Surprise(놀라운) 사건이다. 


영국의 젊은 저널리스트 프랭크린 모리슨은 무신론자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책들과 역사자료를 수집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오히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됐다. 예수의 구주 되심과 부활을 변호하는 책을 쓰게 됐다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다. 

그가 감동받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으며 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는 사실이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마가는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말에 끌려 다니다가 순교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예수의 동생 유다는 화살에 맞아 순교했다, 세상에 거짓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명 속에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사도행장 16장에 보면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1차 선교여행 때 갔던 소아시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성령이 그 길을 가로막아 하는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다가 밤에 한 마케도니아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 복음을 전하게 시작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 장면을 해석하면서 이때 바울을 태운 배에는 새로운 유럽을 싣고 갔다고 설명했다. 사실 복음이 들어감으로 그 후 야만적인 해적들이 변하여 지난 2천 년 간 문명국가로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1620년 11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새로운 미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 땅 제물포에 손을 잡고 동시에 발을 디뎠던 것은 바로 새로운 한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이처럼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얼마나 큰 축복을 그 땅으로 이끌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맣은 현대인들은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덤에 앞에서 슬피 울며 살아간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슬피 울었을까?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목격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부활이 더 믿어 지지가 않았다. 마리아는 사건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다. 그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인간 대부분의 슬픔과 눈물, 좌절과 절망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네 믿음의 눈을 떠서 그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라는 음성이 담겨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있다. 어느날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길을 잃고 많이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늦어 강연장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어 자존심도 상하고 많이 침울해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거스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는 그룹에서 자객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어거스틴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내 계획, 내 뜻대로 안 되었다고 안타까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내가 오히려 사는 길이였고 은혜의 길이였고 축복받는 길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발을 구르며 초조했던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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