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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우리가 붙잡을 것 – 은혜

작성일 : 20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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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거나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에 엉뚱하게 주님이 받아야 할 관심을 다 빼앗아버리는 은 주전자가 있는지 살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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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에 달리기 시합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별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해서 특별한 좋은 추억은 없지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장면이 생각난다. 저학년 어린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선생님이 신호를 보내면 결승선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한다. 부모님들은 옆에서 열심히 소리치고 응원을 한다. 그런데 이따끔 어떤 아이는 결승선 목표를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하게 엄마가 있는 곳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아무리 앞을 향해 달리라고 손짓하며 소리쳐도 아이는 엄마에게 열심히 달려간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달리기는 잘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데 잘못 달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열심도 있고 능력도 뛰어난데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달려야 할 방향이 무엇일까? 빌립보서 3장 7절~14절에 나온 사도바울의 권고 속에는 ‘영적 지도력의 비밀’이 들어있다.

첫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다. 3장 8절을 보면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지 말고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렸다. 역사상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다빈치가 처음 그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께서 만찬 중 사용한 주전자를 은주전자로 아름답게 그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고서는 다 “와 주전자, 참 멋있다. 나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주전자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빈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아, 내가 그림을 잘못 그렸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엉뚱하게 사람들이 주전자에 관심을 다 빼앗기니 이는 실패작이다”하고 하고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한다. 

개인적 신앙생활에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자주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삶에서 관심을 받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삶의 관심이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엉뚱하게 주전자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거나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에 엉뚱하게 주님이 받아야 할 관심을 다 빼앗아버리는 은 주전자가 있는지 살피자. 만일 있다면 다빈치처럼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한다. 달려가야 할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

삶의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여기에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말이 때로는 편협한 축소주의적인 (Reductionism)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만을 말하면서 다른 부분들을 외면하는 신앙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란 그런 편협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의 편중이나 편협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으로 신앙의 중심이 잡혀있는 사람은 유연성이 있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풍성하게 살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다. 우리 삶의 중심이 분명히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삶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거나,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포괄적인 모든 부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나간다는 것이다. 즉, 중심이 분명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그다음 나는 놈 위에 붙어다니는 놈이 있다”고 했다. 맞다. 신앙생활은 뛰는 것도 나는 것도 아니라 붙어다니는 것이다. “예수님께 붇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은혜를 붙잡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는 것이다. 개인 신앙 여정에서 또 영적 지도력에서 처음에 은혜로 시작했다가 나의 의나 노력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에서 시작은 하지만 종국에는 지혜와 노력과 의로 채우려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은혜를 붙잡지 못하고 나의 의와 노력을 의지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나의 의와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조급함과 정죄함에서 잘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조급해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타인의 부족함에 대해 정죄하고 분노한다. 우리는 죄인이고 구원받는 것은 100% 은혜로 인한 것이다. 나의 의가 1%도 가미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 삶 가운데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영화스러운 존재로 설 수 있는 것도 100%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도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지도력도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작은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그리스도의 은혜’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고 삶을 향하여 아름다운 계획과 그림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친히 이루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전한 사도바울도 아마 자기의 의와 자기의 계획과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일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 것 같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두셨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가시 때문에 그는 큰 비밀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신 것. 그 가시 때문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시 때문에 힘을 빼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로 아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



신선묵 교수

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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