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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동식 교수 칼럼 - 신학, 공부해야 하는 이유

작성일 :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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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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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 무용론“이 만연하다. ‘신학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은 ‘신학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채플에 오셔서, 신학 공부보다 목회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들은 신학생들이 어떤 마음을 품었겠는가. 큰 교회를 맡으려면 신학 공부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과연 바람직한가? 


  그런 목표 의식을 가지니 신학을 하더라도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당장 교회 현장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신학을 한다. 설교를 위해 설교학을 공부하고, 교인 상담을 위해 상담을 전공하며, 성도들의 영성을 키우기 위해 영성학을 공부하고, 효과적 선교를 위해 선교학을 공부한다. 이런 흐름이 무엇 나쁘겠는가마는 생각을 좀 해보자. 


  흔히 신학을 나무에 비유해 4개 분과로 구분한다. 성서신학이 뿌리요, 역사신학이 몸통이요, 조직신학이 가지요, 실천신학이 열매다. 학생들에게 어디에 관심이 있냐 물으면 대부분 실천신학 쪽이다. 그래도 성경은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있어서 성서신학에 관심 있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특히나 조직신학은 별로 관심이 없다. 복잡하기만 하고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장 교회 현장에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좀 씁쓸하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 당장 쓸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신학의 중요성, 특히나 이론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윤철호 교수도 언제가 이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론 신학도 이론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칠 때 태도를 보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스 7:10).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연구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고’ 그 율례와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 바른 이론을 알아야 바른 실천이 나오는 법이다. 기본이 중요하다. 줄넘기도 하나씩 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이단 뛰기, 삼단뛰기, 뒤로 뛰기, X자로 뛰기 등 다양한 형태들이 응용되어 나왔다. 기본이 먼저며 기본이 근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로 알려진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참된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요리문답 공부’다. 둘째는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총론 공부’인데 신학교에 어울린다. 셋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여 요리문답과 총론을 성경에서 얻고 다시금 성경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순환적 과정이 신학 공부에서 필요하다고 한다. 이론 신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공부한 내용들을 교회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 적용하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몸으로 말하기’ 게임이 있다. 제시된 단어를 보고 그것을 뒷사람에게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앞 사람의 표현을 본 뒷사람은 그다음 사람에게 또 몸으로 표현해서 끝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맞춰야 한다. 얼마만큼 정확하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그런데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가다 보면 처음 표현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럴까? 전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 모두 전달하는 내용을 오해하기도 하며 잘못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본래 것은 왜곡된다. 우선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한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유용한 것, 실용적인 것만 따라 움직인다. 신앙도 번영만을 추구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기는 도중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른다. 그때 소들이 날뛰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잡는다. 그는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 집으로 보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나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궤를 보관했기에 복을 받는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한다. 복 받기 위해서였다. 바람직한가? ‘화와 복’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 부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학,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다. 신학은 부차적이거나 곁 다리가 아니다. 목회지에 쓸만한 것만을 배우는 곳이 신학교가 아니다. 그러면 굳이 신학교가 아닌 목회 기술 훈련 학원 같은 곳을 세워서 단기 집중 코스로 끝내고 수료증 받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교회의 문제는 어쩌면 목회자의 문제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어쩌면 목회자에게 있다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목회자를 잘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때 부지런히 공부하자. 교회와 목회 없는 신학은 공허하지만, 신학 없는 교회와 목회는 맹목적이다. 신학교 때 공부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목회 성공이라는 헛된 꿈만을 키울 것이 아니라, 엉덩이 의자에 붙이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고민했는지, 그런 선상에 있는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고민하는 시간이기를 소망한다. 기독교가 하락하는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ndom)에 굳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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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식 교수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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