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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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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은혜 안에서 성장이 어려운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2.12.06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린 아이를 보며 부모가 행복해 하는 것은 그 아이가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이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모습은 부모에게 고통이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심각한 문제가 있듯이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영적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그러면 영적성장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영적성장이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더 많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주님은 점점 더 커져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주변 사람들은 유익을 얻을 것이며, 본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함을 경험하게 됩니다.본문 말씀은 우리가 성장해야 할 분야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라야 할 분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더 깊게 아는 것이 곧 영적성장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더 깊게 안다면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하게 될 것이며, 그 사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와 겸손이 사라졌다면 그 상황이 너무나 심각합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은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호의”인데 우리는 이 은혜가 너무나 어색합니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서 스페인어 나라에 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영어가 세상의 공용 언어라 하지만 수 십년 동안 한국말을 하며 한국에서 살다가 스페인어를 못하면서 스페인에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저도 이곳 미국에서 경찰생활을 하면서 제일 아쉽었던것은 스페인어를 못한는것 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삶을 살다가 모든 것이 은혜인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오니 너무나도 어색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타락한 죄성은 은혜와는 정반대로 철저히 율법적이기에 은혜가 더욱 생소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이란 이 은혜를 더 깊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1절로 10절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2)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그 죽음과 삶 사이에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넘치는 큰 사랑, 은혜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중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은혜를 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것을 이 은혜의 자리에 넣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가 아주 심각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공로로 살아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동시에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위해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은혜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때 그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임종의 은혜를 오늘로 당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임종의 은혜는 언제 임합니까? 임종할 때 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내일의 은혜를 바랍니다. 오늘의 은혜는 오늘 임할 것이고 내일의 은혜는 내일 임할 것입니다. 내일의 은혜가 오늘 임하기를 바라는 것을 성경은 “염려”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루 하루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적인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은 은혜에 아주 부정적으로, 그리고 거칠게 반응합니다. 한 평생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함정, 곧 자랑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자라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시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샘신 목사 SAM Commun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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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4: 불안 집착형 불안정 애착 크리스천헤럴드2022.12.06
     만 3세까지의 아기는 전적으로 엄마(나 아빠)에게 의존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오직 엄마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엄마가 아기에게 일관적으로 사랑과 관심의 돌봄을 주는 게 아니라 변덕적으로 돌봄을 준다면 아기는 매우 불안해진다. 엄마가 자기 기분이 좋을 때는 아기에게 아주 잘 대해주다가 자기가 기분이 나쁘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아기의 필요를 채우기 보다 자신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엄마는 아기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엄마의 양육이 이런 식이면 아기는 엄마가 잘 해 줄때에도 언제 다시 엄마가 돌변할 지 몰라 안심하고 편안하게 느끼지를 못한다. 이런 아기들이 형성하게 되는 불안정 애착 유형이 불안 집착형이다. 불안 집착형의 아기는 엄마에게 일관적이고 안정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애정 결핍에 시달린다. 늘 엄마의 사랑은 아기에게 감질나게 찔끔찔끔 주어지고, 아기는 언제 엄마가 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고, 언제 그것을 철수할지 몰라 늘 불안해 한다. 또한 스스로를 사랑받을 만 하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이 심한 아이로 자라고,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은 청소년기에 더 악화되면서 성인이 되어서까지 유지된다. 불안 집착형 불안정 애착의 아기가 성인이 되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늘 자신이 없고 주눅이 들게 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해 줄 다른 사람을 간절히 찾는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결핍을 채우고자 무의식적으로 애쓰는 것이다.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잠시동안 무척 감격하고 행복해 한다. 하지만 곧 (마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도 곧 전적인 사랑을 주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떠날까 봐 불안해한다. 이 불안은 곧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그 사람의 전부가 되기를 원한다. 그 사람이 잠시라도 연락이 안되면 버림받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연락이 될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한다. 혹은, 자기와 항상 붙어있고 늘 소통하고 있지 않으면, 잠시라도 거리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점점 집착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상대방은 이런 집착이 너무 부담스럽고 숨이 막혀 결과적으로 그렇게도 걱정했던 대로 그 사람이 떠나게 되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러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픈 상처를 받게 되고, 자기가 못나고 모자라서 이런 결과가 생겼다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누가 나 같은 걸 사랑하겠어” 라는 한탄이 가슴 깊은 곳에 늘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불안 집착형은 자기 부정, 타인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어서 자존감도 낮고 열등감이 심하다. 반면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느끼는데, 결국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만 열등한 자신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 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애착 유형은 만 3세까지의 기간 동안 엄마(일차 양육자)의 양육 방식으로 인해 형성되어 성인이 된 후 인간관계 양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불안 집착형의 유형을 갖게 된 것은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모의 영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일관적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고 늘 한결 같은 돌봄을 주었어야 했다. 부모가 그렇게 해 주지 못해서 아기는 불안해지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불안한 인간 관계 속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슴을 조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애착 유형은 부모로 인해 만들어지지만, 성인이 된 후에 본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도 있다. 비록 불안정 애착 유형이었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서서히 안정형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획득형” 안정 애착이라고 한다. 불안 집착형 유형이 획득형 안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를 바리고 떠날까 봐 불안이 올라올 때 자기 내면의 불안을 달래줄 수 있어야 한다. “불안해 하지 마. 그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해. 잠시 그와 떨어진다고 해서 그의 사랑이 변한 건 아니야”라고 불안해 하는 자신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거리를 두려 할 때 그 사람의 공간을 존중해 주려 노력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획득형 안정 애착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히 노력할 가치가 있다. 결과적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고 친밀한 인간 관계들이 더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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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12.06
      얼마 전 한국에서는 너무나 놀랍고 마음이 아픈 일이 일어났다.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이태원 참사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금은 함께 슬퍼하고 함께 위로할 때인데 이런 슬픔에 의견이 나누어지고 서로 비난하는 모습이다. 특히 정부 당국자들의 무책임한 말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던 참사이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기도 하지만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면서 더더욱 실망감을 주고 있다. 예전에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부터 그 이후 이번까지 정부의 대응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더욱 안타깝다. 그동안 언제나 그때 당시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런데 몇몇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많은 실망감을 줄 수 있는 태도를 보였다. 비참한 사고를 당한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것 보다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말들이 무성하였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 소셜미디어나 신문 등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이번 문제뿐 아니라 이와 유사한 앞으로 일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자기 마음에 옳은 대로 의견을 말하고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인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예수라는 단어와 연관 지어 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기독교 등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구약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대상은 ‘왕, 대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과 뜻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계시해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참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 32문) 그러므로 이런 혼란스러울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면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는 왕으로서 죄와 마귀와 대적하여 싸워 이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세상의 빛으로서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고 이 어둡고 깜깜한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야 한다. 또한 선지자로서 복음의 증거 자로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여야 바르게 살 수 있는지를 세상에 외쳐야 한다. 예수님은 어두운 죄악의 세상에 오셔서 어둠을 밝히셨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하셨고 잘못된 것을 가만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감당하셨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맡기실 때 잘못과 죄에 대하여 비난하고 정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이제 세상을 향해 비난의 손가락질을 멈추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외로운 사람들 곁에 있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때이다.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담임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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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오직 열정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2.12.06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고 계획할 때에 확신과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처럼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는 없던 힘과 능력과 지혜와 마음을 끌어모으는 강력한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개인과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사람을 대할 때마다 보여지는 이것을 저는 열정(compassion)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열정에 대한 경험을 지난 10월 24일부터 멕시코 샌루이스 지역 성시화를 위해서 초청을 받아서 한 주간 강의와 중보기도로 섬기면서 새롭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다른 몇분 일행들과 함께 선교에 오신 강사님들의 이야기 입니다. 한 분은 멕시코에 처음 선교를 나오셨는데 깜빡잊고 보청기를 두고 오신 은퇴목사님이셨습니다. 전립선 수술로 배출에 장애가 생겨 기저기를 한 가방 준비하셨다고 아주 큰 소리로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선교회를 설립하신 목사님은 신장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최근에 제거수술을 받으시고 회복중이셨고 또 시력이 갑자기 약해져서 간곡히 일정을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젊고 건강한 저는 떠나기 전날부터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펴지질 않아서 진통제를 먹고 견뎌야 했습니다. 제 몸이 불편하니 일정을 앞에 두고 제 마음은 무겁고 긴장할 수밖에 없어서 성도님들께 기도를 부탁드리고 떠났습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서로의 인사와  소개를 마친후, 하나님께서 왜 저를 멕시코로 부르셨는지 깨달았습니다. 강사로 초청된 분들이 한결같이 외형상으로는 병원에 계셔서 치료와 간병을 받거나, 아니면 집에서 편한 자세로 쉬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옷가방 하나 약가방 하나씩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건강해야 선교합니다” , “내 발로 걸을 때 선교해야 합니다” , “선교지에 오면 힘이 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담당자 목사님은 제가 복무했던 같은 부대의 선배기수였습니다.  저는 첫날 집회를 열기도 전에 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한분 한분의 면모를 보며, 저는 이러한 열정과 헌신에 감동되어서 기도하는 중에 저 또한 우리 성도님들이 기도해 주실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쏟고난 후 허리와 어깨가 펴졌습니다. 할렐루야!  주께서는 첫날 찬양을 부르며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당했던 아픈 경험과 쓴 기억들을 치유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회개와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서로의 회개와 고백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는 이렇게 귀한 분들에게 영성과 인성과 사역을 배우고 깨닫게 하시려는 뜻과 중보기도 사역인 것을 알았습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 밤에도 서너 번씩 일어나셔서 화장실을 다녀오시고,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수면과 기상 시간이 모두 다르고 식습관도 달랐지만, 그럼에도 집중력과 열정만큼은 불이 타오르듯 뜨겁고 외치는 자의 목소리에서는 절규와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떠날 때엔 어느 새 그리움으로 남아 눈물로 손을 잡고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어딜가나 빼놓을 수 없는 열정은 역시  앉아서 구만리를 살펴보시는 사모님들이셨습니다. 특히 우리 사모님들만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수백킬로 떨어진 멕시코에서도 마치 곁에 계신듯이 우리를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약이 갯수가 맞지 않으면 사모한테 혼나요”, “식탐을 버리고 오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지 말라고 했어요” 등등…., 이렇게 작은 가족들의 사랑과 열정의 헌신과 묵묵히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후원과 사랑과 간절한 중보기도가 은혜의 강물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영혼 구원의 열정이 모여 인생과 건강과 국경을 넘어 쓰임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준비기도하고 일정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앞장서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응답과 감사를 올려 드리며 울었습니다. “주께서 다하셨습니다. 아멘”. 샬롬! 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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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피시전도법 - 전도란 무엇인가? 크리스천헤럴드2022.12.06
      내가 처음 전도에 대해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전도에 대한 정의를 먼저 내려야 했다. 전도의 사전적인 의미는 ‘종교를 세상에 널리 알려 그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인도한다’라는 뜻이다. 내가 믿는 종교(기독교)를 알리는 것이 바로 전도다. 성도들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는 생명의 도를 믿도록 인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전도인 것이다. 전도는 문자 그대로 도(길)를 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길’이라 함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근본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그 예수님의 길을 소개하여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그토록 듣고 들었던 전도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도의 핵심이신 예수님과 그의 오심은 모든 이에게 복음이다. 복된 소식인 것이다. 이 복된 소식이 전도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도의 핵심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고, 그 복음의 핵심이 바로 좋은 소식, 구원의 소식,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전도다. 그런데 많은 경우 교회나 성도나 목사들이 말하는 전도는 이와는 좀 다른 개념이 더 첨부되어 있다. 항상 교회 건물과 연결하여 교회에 데려오는 것을 결국은 전도라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사람을 데려다 놓은 것으로 전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전도에 대한 바른 개념이 정리가 안 되면, 시작은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 끝은 상당히 다른 결과치, 아웃컴(outcome)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을 본다. 이런 맥락으로 생각하면, 결코 예수님도 전도에 성공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전도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그 정리된 바른 개념 위에 구체적인 전도의 방법을 정리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매일같이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전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림도 그려보고 표도 만들어 보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도를 정리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모태서부터 교회를 다니다 보니 전도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듣고, 배우고, 실천하면서 자랐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좋았던 기억들보다 굉장히 무섭고 부끄럽고 피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불편함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 나는 전도에 대해 이리도 부정적인 감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까?’ 전도는 이미 내가 마주하거나 대면하기 힘들어 피하고 싶은 토픽(topic)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이유를 청소년기 경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때 교회에서 하는 노방전도를 나가게 되었다. 노방전도 중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것 중 하나는 버스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버스 안에서 껌을 판매하는 소위 껌팔이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부모가 계시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모습으로 생활 전선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버스에서 여러 가지 생필품을 승객들에게 파는 호객행위를 많이 했다. 나는 마치 그 보육원 아이들처럼 불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많은 승객 앞에서 복음을 판매하는 마음으로 전도라는 것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당시 나 뿐 아니라, 이 일을 하는 다른 학생들도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지고 버스에 오르긴 마찬가지였다. 뭔가 죄지은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로 사람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수없이 외웠던 원고를 읽어 내려가야만 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담당 전도사님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뿐이 아니었다. 동네 사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율동하면서 지나가는 많은 사람에게 전도했던 경험도 있다. 전도하고 있는데 학교 친구나 동네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내 의지와 다르게 부끄럽고 민망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는 친구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이처럼 나는 전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두렵고 부끄럽고 민망하기까지 한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과 전도하자 하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전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내가 어떻게 전도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되었는지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이처럼 전도를 부정적이고 왜곡된 감정으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전도에 관한 두 가지 사실(진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전도는 내가 다니는 교회 건물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도의 다양성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의 학습된 경험치와 무지함에서 오는 왜곡된 전도의 개념이 오랜 기간 지속됐다. 심지어 목사가 되어서도 전도에 대해 여전히 불편하며,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것은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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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네비게이션과 내 인생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하늘 길과 바다 길, 그리고 땅끝까지 다니려면 중요한 필수품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네비케이션입니다.  그냥 줄여서 ‘네비’라고 편하게 부릅니다. 어디로 가든지 핸들을 잡으면 습관적으로 목적지를 입력하고찾게 됩니다.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성능에 따라서 최근에 만들어진 길로 안내를 받기도 하고, 막히고 정체되는 오래된 길로 안내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로 가고 싶어도 계속해서 ‘네비’는 다른 길을 추천하고 나의 이동 경로를 이끌어갑니다.  네비게이션을 믿어야 하지만 오래되고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엉뚱하게 안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한 번은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 근처에서 길을 잃었는데, ‘네비’는 엉뚱한 길로 인도했습니다. 잠시 이동을 하는데 화면에서는 제 차가 바닷 속으로 들어가 주행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동승한 저희 가족들이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이젠 저 여자분 말을 잘대들으면 안되요!…..  ”라고 말입니다. 배꼽이 빠지도록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네비 여사님’ 때문에 웃기도 하고 소중한 시간과 약속에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아침마다 발송하는 문서 사역중에 하나는 바로 말씀 큐티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인도함 받는 인생은 최신의 도로 정보를 업데이트한 영적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밤새도록 소화되고 비워진 몸 속에 활력이 넘치는 에너지를 공급해서 다시 또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게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오래전에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예전의 정보로 오늘 안내를 받는 것처럼 예전의 은혜의 감격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영적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업테이트 되지 않은 도로정보를 장착한 ‘네비’를 통해서 먼 길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모르긴해도 여행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예정된 것입니다.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풍성한 양식을 먹고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유초등부, 혹은 중고등부 시절에 받은 은혜만 좋다고,  그 방식과 스타일만 고집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신앙과 공동체의 모습이 다르다고 깎아내릴 필요는 없지만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핵심 영양소입니다. 자기가 준비한 만큼, 변화한 만큼,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은혜를 위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난 번 글에서 밝혔듯이 펜데믹을 통해서 혼란기, 적응기, 도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펜데믹 기간동안 자신을 준비하고 투자하고 노력한 사람들은 분명히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영적 도약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반드시 은혜는 받아야 삽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새로운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최신 정보를 업그레이드 한 네비게이션이 여행에 꼭 필요하듯이, 오늘의 다양한 은혜가 이민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큰 은혜의 바다를 항해하는 기쁨이 있기를간구합니다.  말씀만이 소망이요, 기도만이 살 길입니다. 샬롬! 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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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공평한 복수 "Getting Even"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본문: 에베소서 4:25 - 5:1 우리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복수(get even)”는 절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학 교수인 루이스 스메즈 박사(Dr. Lewis Smedes)는 ‘용서와 망각(Forgive and Forget)’이라는 책에서 용서함에 대해 심도 있게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사이가 나빠진 사람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절대로 동일한 산술로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공평한 복수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용서만이 불평등한 고통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 맴도는 것을 끊어주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견은 왜 바울 사도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고 다급하게 편지 썼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용서하는 마음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영적으로 살아남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하여 호소하였습니다.우리 모두 생각 해 보시길 바랍니다:  스메즈는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도, 양해하는 것도, 일을 무마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용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무너뜨리고, “불공평한 과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새로운 평등의 가능성을 창조합니다. 용서는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중 가장 어려운 일이며 또한 가장 위험 부담이 큰 일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강력한 파도의 정상을 타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수를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이며 그 죄수가 당신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꼭기억해야할 것:복수는 우리를 가두지만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Revenge imprisons us; forgiveness sets us free. 샘신 목사SAM Community Church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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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FISH 전도법 - 제자와 판매자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팬으로 남고 싶다고 팬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다. “제자가 되어 제자를 남기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와 교회에 주신 사명이다. 명령이다. 성도를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제자 되기를 원하신다.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사를 주신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중 사회적으로 엄청난 지위와 능력을 소유한 자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에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로 사람을 구하고 생명을 구하는 제자가 되게 하셨다.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약속이다. 영혼 구원은 바로 제자가 하는 일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그 일을 하기 원하신다. 제자 되는 것이 싫고 힘드니, 그냥 팬으로서 응원만 하겠다고 결정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자와 팬으로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우리 각자가 져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팬으로 산다는 것이 문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잘 아는 가롯 유다는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제자가 아닌 판매자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누가복음 22:47-48)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파는 판매자가 되어버렸다. 예수님을 팔기로 이미 판을 다 짜놓고, 태연스럽게 예수님 앞에 나와 입맞춤을 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에 수식어가 붙는다. ‘예수를 판 자’. 가롯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 되기를 거부했고, 종국엔 판매자가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여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제라도 예수님을 다른 것과 맞바꿀 수 있는 판매자가 될 수 있다. 가롯 유다가 돈과 예수님을 트레이드(trade) 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 어디 돈뿐이겠는가? 예수님과 바꿀만한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지 않은가? 이미 성경에는 예수님과 바꿀만한 것들을 산더미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나만큼은 판매자가 아니라고, 가롯 유다가 아니라고 꿋꿋하게 말할 자신이 있는가? 제자와 판매자 사이에 모호한 회색인은 없다. 제자와 판매자 사이에 은근슬쩍 서있을 수 있는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제자로 부르신 엄중한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다양한 크리스천 문화와 화려한 설교와  여러 교회 활동을 즐기는 팬인지, 언제라도 예수님보다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판매자인지, 죽기 전에 예수님 앞에 서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프로가 되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때로는 절망하는 아들을 통해 몇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온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서야 할 자리를 결단하게 되었다. 팬이 아닌 성도, 판매자가 아닌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도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노력과 달리 이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을 위해 샤워를 하면서 전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리는 물줄기처럼 머릿속을 강타하는 말씀이 있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9)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많이 듣고 자랐던 말씀이었다. 평소에도 신약을 통독할 때마다 몇 번이고 읽었던 말씀인데 그 날따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말씀의 영어 번역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선명하게 기록된 ‘FISH’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물고기란 네 단어에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전도에 관련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출근하자마자 나는 내가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전도에 대한 글들을 뒤적였다. 많은 그림, 표, 정리되지 않은 글들… 나는 그 모든 내용을 ‘물고기(FISH)’라는 네 개의 영어 단어 안에 빠른 속도로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이 ‘물고기(FISH)’라는 네 단어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낚시 전도법’이다.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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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동식 교수 칼럼 - 신학, 공부해야 하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신학 무용론“이 만연하다. ‘신학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은 ‘신학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채플에 오셔서, 신학 공부보다 목회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들은 신학생들이 어떤 마음을 품었겠는가. 큰 교회를 맡으려면 신학 공부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과연 바람직한가?   그런 목표 의식을 가지니 신학을 하더라도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당장 교회 현장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신학을 한다. 설교를 위해 설교학을 공부하고, 교인 상담을 위해 상담을 전공하며, 성도들의 영성을 키우기 위해 영성학을 공부하고, 효과적 선교를 위해 선교학을 공부한다. 이런 흐름이 무엇 나쁘겠는가마는 생각을 좀 해보자.   흔히 신학을 나무에 비유해 4개 분과로 구분한다. 성서신학이 뿌리요, 역사신학이 몸통이요, 조직신학이 가지요, 실천신학이 열매다. 학생들에게 어디에 관심이 있냐 물으면 대부분 실천신학 쪽이다. 그래도 성경은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있어서 성서신학에 관심 있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특히나 조직신학은 별로 관심이 없다. 복잡하기만 하고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장 교회 현장에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좀 씁쓸하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 당장 쓸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신학의 중요성, 특히나 이론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윤철호 교수도 언제가 이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론 신학도 이론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칠 때 태도를 보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스 7:10).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연구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고’ 그 율례와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 바른 이론을 알아야 바른 실천이 나오는 법이다. 기본이 중요하다. 줄넘기도 하나씩 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이단 뛰기, 삼단뛰기, 뒤로 뛰기, X자로 뛰기 등 다양한 형태들이 응용되어 나왔다. 기본이 먼저며 기본이 근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로 알려진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참된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요리문답 공부’다. 둘째는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총론 공부’인데 신학교에 어울린다. 셋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여 요리문답과 총론을 성경에서 얻고 다시금 성경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순환적 과정이 신학 공부에서 필요하다고 한다. 이론 신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공부한 내용들을 교회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 적용하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몸으로 말하기’ 게임이 있다. 제시된 단어를 보고 그것을 뒷사람에게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앞 사람의 표현을 본 뒷사람은 그다음 사람에게 또 몸으로 표현해서 끝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맞춰야 한다. 얼마만큼 정확하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그런데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가다 보면 처음 표현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럴까? 전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 모두 전달하는 내용을 오해하기도 하며 잘못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본래 것은 왜곡된다. 우선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한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유용한 것, 실용적인 것만 따라 움직인다. 신앙도 번영만을 추구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기는 도중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른다. 그때 소들이 날뛰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잡는다. 그는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 집으로 보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나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궤를 보관했기에 복을 받는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한다. 복 받기 위해서였다. 바람직한가? ‘화와 복’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 부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학,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다. 신학은 부차적이거나 곁 다리가 아니다. 목회지에 쓸만한 것만을 배우는 곳이 신학교가 아니다. 그러면 굳이 신학교가 아닌 목회 기술 훈련 학원 같은 곳을 세워서 단기 집중 코스로 끝내고 수료증 받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교회의 문제는 어쩌면 목회자의 문제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어쩌면 목회자에게 있다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목회자를 잘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때 부지런히 공부하자. 교회와 목회 없는 신학은 공허하지만, 신학 없는 교회와 목회는 맹목적이다. 신학교 때 공부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목회 성공이라는 헛된 꿈만을 키울 것이 아니라, 엉덩이 의자에 붙이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고민했는지, 그런 선상에 있는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고민하는 시간이기를 소망한다. 기독교가 하락하는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ndom)에 굳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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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그들을 용서는 해주되 잊지는 말자!” 크리스천헤럴드2022.10.18
      지난 9월 26일 월요일은 이스라엘의 설날인 로쉬하샤나 데이였습니다. 우리와 절기가 다르지만 그들만의 성경적 절기를 지켜나가며 후손에 대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는 “야드 바셈”이라는 역사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이사야 56:5말씀,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드’는 ‘기억, 기념’이라는 뜻이고 ‘셈’은 ‘이름’ 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이 박물관을 세운 목적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남겨서 기억하려는 의도입니다. 박물관의 크기는 작지만 누구든지 관람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손수건을 손에 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당했던 과거 역사의 아픔, 수난사를 재현해 둔 박물관이기 때문입니다. 출구로 나오기 전 벽면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는 해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는 문구입니다. 목이 메이는 글입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서 6백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후로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6백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으면서 눈물로 민족의 혼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역사를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들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  우리 대한민국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 민족 고통의 수난시대가 있었습니다. 민족 전통과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일본이름으로 바꾸고, 강제 징용과 위안부로 전쟁에 끌려나갔습니다. 전국 강산에 나라의 소중한 자원과 정신을 다 빼앗겼던 수난의 역사를 견디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슬프고 쓰라린 역사입니다. 이런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잊지 말고 다음 세대에게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크리스천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우리 이후의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거룩한 신앙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사안입니다. 우리의 정서와 신앙이 함께 후대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의 하신 기업이로다”(신명기 32:7~9). 하나님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중심으로 세계 열방을 섭리하고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자손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이 땅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역사와 흐름은 우리 크리스쳔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배후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크리스쳔들이 마주하는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허락하시고 교회공동체를 사용하셔서 영혼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롬11:36).  억지로 빼앗긴 것은 다시 찾을 수 있어도 내가 스스로 내어준 것은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힘들고 고단한 이민생활 중에도 주 예수를 믿으면 삽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온 세상을 이기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역사를 써 나감으로 주를 기쁘시게하는 삶과 사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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