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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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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선교적 영성 (2)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하나님의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간의 영과 육체를 나누고 영이 육체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하며 육체는 단지 영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부산물 혹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이원론적인 태도에 반하여 영과 육을 단지 다른 두부분으로 본다. 그리고 육을 통하여 구체화된 영이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를 보되 육의 관점에서 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육으로 표현되지 않은 영은 추상적인 개념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을 중요하지 않게보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성을 말하면서 육화(Incarnate)되지 않은 영성을 많이 보게 된다. 오늘날 일상 영성은 육화된 영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세상에 대한 이해에서도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텍스트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컨텍스트를 텍스트가 펼쳐지는 현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였다. 고정된 텍스트가 있고 컨텍스트 (세상)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의 발전으로 점점 더 텍스트의 의미는 컨텍스트가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된다.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따로 어떤 절대적인 의미나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컨텍스트이다.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는 비로소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영성이어야한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 세상의 이슈에 대하여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긍정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 공적 영성 등이 이런 면에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영성, 인간의 영과 육이 통합된 전인적인 영성, 세상을 적극적으로 비판적으로 그러나 긍정하는 모습, 하나로 통합하여 말한다면 선교적 영성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신학을 한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어떤 추상적인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가 참예하는 관점에서 우리의 신학을 한다.  둘째, 성경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에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일하셨는지를 기록한 하나님의 선교를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성경의 몇몇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이나 관심인 것이 아니라 성경은 기본적으로 선교에 관한 책이고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우리의 선교라는 해석학의 틀을 가지고 이해될 때에 바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다.  세째, 기독교 영성은 본질적으로 선교의 영성이다. 존재론적인 영성이 따로 있고 그것의 표현으로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은 선교의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선교라는 틀 안에서 존재의 여러 측면들이 이해되고 강조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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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기억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기억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기억으로 인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며  관계가 형성됨을 봅니다.기억에 문제가 생기는 병이 바로 치매입니다. 비록 40년을 함께 산 부부라도, 그래서 40년 동안 많은 사연,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었지만  치매가 오면 그 기억들이 사라집니다.그러면 어떤 결과가 찾아오나요? 관계가 사라집니다. 감사나 용서는 기억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감사는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용서는 좋지 않은 기억을 바꾸는 것입니다.미움과 쓴 뿌리도 기억과 연관된 것입니다. 미움과 쓴 뿌리는 나쁜 기억입니다. 미움과 쓴 뿌리가 마음에 생기면 관계는 병들게 됩니다.성령님은 감사와 용서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마귀는 미움과 쓴 뿌리를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러니 기억을 잘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신 다음에 광야로 인도하여 40년 동안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광야 40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했습니다.그렇다면 40년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거리는 만들어 주려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은 마치 치매 걸린 사람처럼  잊었다는 것입니다.더 큰 문제는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을 비처 주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우리은 기억을 잘 관리하고 있나요? 감사하고 용서하며 살면  잘 관리하시는 것입니다.그러나 미워하고 원망하면 영적 치매가 온 것입니다. 영적 치매를 치료하는 길이 있습니다.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얼마전에 이런글을 읽었습니다. 어디에 새기고 있습니까?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빰을 때렸다”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고마움이 마음에 남아 누구를 만나도  무슨 일을 만나도 즐겁기 마련입니다.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괴로움이 되어 마음속에 쓴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됩니다.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한번 내 마음을 조용히 돌아봅시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봅시다.내 마음 가득히 원수를 새기고 쓴 뿌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혜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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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상처와 생존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아기는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태어난다. 이 아기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아기는 이 세상을 알아간다. 아이는 많은 좋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즐거움, 여유, 환희, 창조성, 친밀성, 열린 마음, 베푸는 마음, 재롱, 희망, 아름다움, 여러가지 재능 등 정말 많은 좋은 것들의 보고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들을 아무런 방어 없이 이 세상에서 표현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이 거절되고, 무시당하고, 비난을 받으면 그 순간 이 좋은 것들을 숨겨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처음 만난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친밀감을 표현했는데 그 친구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 손을 밀어버렸다면, 아이는 놀라고 당황하고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아무 거리낌없이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친밀감”을 감춘다. 그 친밀감을 표현한 것 때문에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아프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은 친밀감을 마음껏 표현하면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상처의 경험으로 배운다. 그리고 친밀감을 더이상 표현하지 않는다.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치를 봐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차라리 아무에게도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 게 상처받을 위험이 없으니 안전하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면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는 과정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많은 좋은 것들을 하나씩 숨긴다. 이렇게 숨겨진 좋은 것들은 내면 세계에서 억압되어 버린다. 그래서 어느새 나에게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억압되어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여전히 내 안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무방비 상태에서 나의 선의와 호의가 거절당하고 나의 존재 자체가 부인당하고, 상당히 조건적으로만 관심과 인정을 받았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죄인들이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많은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나이를 먹을 수록 정도의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런 저런 상처를 받고 그 결과로 우리의 많은 좋은 것들을 억압해 나가며 살아간다.풍부한 좋은 것들을 다 억압시키면서 우리의 마음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상처받기 쉬운 이 험한 세상에서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기 위한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생존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위험한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삶이 메마르고 단조롭고 피곤해진다. 점점 무기력감을 느끼고 지치고 삶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1:3)들을 다 억압해 버리고 그저 하루하루 안전하게 지나가기만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한번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 지금 나는 얼마나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잃어버린 나의 좋은 성품과 재능들은 어떤 것들인가?위에도 언급했듯, 그것들은 아주 사라진 게 아니라 내 안 어딘가에 숨겨진 채로 억압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주님이 약속한 풍성한 삶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모든 좋은 성품과 재능들을 다시 회복하고 일상의 삶에서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이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상처를 받아 억압한 그것들을 이제 주님 안에서 완전한 안전감을 누리면서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님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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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소통은 전인적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한국과 미국에서 심각한 것은 자살이다. 한국에서 10대 청소년들의 2023년 자살률이 작년에 비하여 벌써 18%나 높은데 연령에 맞는 예방 대책이 없다는 뉴스가 충격이다. 미주 한인들의 자살률도 연 200명 이상으로 14%가 증가하였다는 뉴스도 역시 충격이다. 그런데 공통의 이유가 코로나 펜데믹의 영향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펜데믹이 누군가에게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펜데믹 기간에 대부분 뉴스는 경제적인 상황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정부나 기관들은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데 집중하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심지어 교회들조차 경제적인 지원을 주로 하였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그런데 펜데믹이 끝나면서 사회 어느 곳에서는 생명과 직결된 안타깝고 슬픈 일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고통과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펜데믹이 끝나고 엔데믹이 되는데 지난 펜데믹의 후유증이 너무나 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나? 펜데믹 기간 어려움을 당했던 교회들은 이제 그 보상을 받으려는 듯, 아니면 속히 예전처럼 복구하는 것에만 노력하는 듯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교인 중에도 분명히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있을 것인데 교회는 얼마나 파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하여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나. 펜데믹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라는 것은 모두 공감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고 그렇게 달라진 것들에 대하여 교회는 어떤 대응과 준비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정부, 기업, 학교, 단체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방안을 마련하기에 골몰하고 있고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펜데믹 이전보다 더 높은 성장을 하고 실적도 만들어 내고 있다. 이후로 교회도 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 몇몇 교회들은 펜데믹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들을 강사로 부흥회를 하고, 그동안 진행하지 못한 단기 선교팀들을 세계 여러 곳으로 보내고 있다. 또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시작하여 교인들을 여러 훈련 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있다.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교인들을 위하여 전문가들의 세미나와 상담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어설프게 전문가도 아닌 교역자들이 형식적으로 떼우듯 하지 않아야 한다. 각 연령층에게 맞는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고 상담이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 기독교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대형 교회들은 이런 기관에 후원금을 많이 보내 기관을 활성화하고 전문가들을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 전문가들을 파송 선교사처럼 후원해야 한다. 앞으로 교회들이 교인들의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을 겪지 않으려면 이 일을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교회는 영혼뿐 아니라 마음도 강건해지는 전인적인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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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크리스천헤럴드2023.09.29
    일상을 벗어나서 여유를 찾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무척 중요하다. 쉼을 통해서 새로운 충전과 힘을 얻고 삶을 재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쁘고 힘든 이민 사회속에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때를 아는 것이다. 때를 아는 것은 지혜이다. 쉬어야 할 때와 일을 해야할 때를 아는 것이다. 주중의 삶과 주일의 거룩함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이다. 구약 성경의 전도서에서도 인생의 중요한 때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강조한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개인 스스로의 삶이 흐트러지고 함께하는 공동체의 거룩한 에너지가 소모되고 방향이 흔들리기도 한다.그래서 목표와 목적이 분명한 집중하는 삶이 되어야 한 걸음 더 성취와 승리로 다가서게 만들어 준다.책에서 읽은 내용중에 조련사들이 사자를 길들이고 훈련하는 방법을 소개한 것을 읽었다. 사자를 조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포효하며 살기등등한 사자앞에서 조련사는 다리 4개인 의자를 흔들어서 보여 준다. 그러면 사자의 눈 앞에 4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고 나타나면 사자는 당황하는데 그 이유는 사자는 한 가지 목표(다리 하나)를 바라보고 바람같이 달려가 먹이를 물어뜯는 습성이 있는데, 갑자기 바라봐야 할 목표가 4개가 되었기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혼란스럽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사자는 목표물이 여러개가 되어서 급기야 목표물을 상실하고 온순해 진다고 한다. 한 가지만 생각하고 본능을 깨우며 살아온 사자에게 목표물이 4개가 된 것은 목표물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의자 조련방법을 통해서 조련하면 바라봐야 할 목표가 많으면 사자에게 있는 맹수의 야성이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사자의 습관을 길들이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도 있다.나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다 잘 할수가 없다.여러가지 일들을 동시에 감당할 능력도 없다. 환경이나 시간 여건이 조성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가 한 곳을 집중해서 바라볼 수 없도록 수시로 유혹과 시험도 다가온다. 우리 신앙생활에 영적도전이 점점 세찬 파도처럼 다가온다. 나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삶의 요소들이 발목을 잡고 멈춰세운다.많은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사자를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인생 길을 달려가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바라보자고 권면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말씀한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면 항상 함께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셨다. 출애굽 여정중에 광야에서는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만 죽음에서 건져 주셨고 생명을 얻고 살아났다. 어둔 죄악 길에서 살았을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게 하셨다. 우리보다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도 오직 한 길, 그 길, 예수님이 가신 생명의 길을 따라갔다. 예수님 한분을 생각하며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신 나를 만드신 여호와께 있다”고 찬양하게 하신다.우리 예수님만 바라보면 힘이 생긴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 골치아프다. 해결할 힘도 능력도 없는 자기 문제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삶은 지치고 신앙의 정상궤도를 벗어나게 만든다. 나는 우리에게도 다리 4개를 번갈아 보다가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지는 맹수의 제왕 사자의 욕심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는 우리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할 때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환난날에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신다. 말씀이 능력이 된다. 우리의 눈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한 분 예수님만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만족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우리 주 예수님이다.” 샬롬!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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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당신은 성경 선생님입니까? (마15:10) 크리스천헤럴드2023.09.14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분노했다. 반면에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주님께 부탁했다.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는 반드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고 되물으셨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겠다.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가 그 말씀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는 사람을 성경은 교사, 그런 일을 혹은 가르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즉 설교란 본문을 다시 한번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이겠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 중 하나가 그 설명(가르침)을 생략한 채 정답만 제시한다. 압축된 정답만을 이야기하다보니 그 정답은 외워서 알지만 그 의미는 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무지만이 아니라 오해를 하고 더 심각한 것은 정답을 외워 알기에 무지나 오해 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렇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 교사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정답을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경 교사는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답만 외우게 하지 말고 그 정답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순종과 복에 대한 개념을 우선 알아야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말씀이다.고대 사회의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또한 백성들의 필요를 채웠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과 필요를 공급을 책임지신다. 하나님께서 안전을 책임져 주시기에 두려울 일이 없고 공급을 책임져 주시기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어 왕으로써 하실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의 안전과 공급을 책임져 주시기에 순종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온다.  성경은 그 평안을 복이라고 말한다.“나는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답만을 외우고 있는가?”를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의 답은 아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으면 이해한 사람이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이다.  나는 성경 선생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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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소중한 지체 크리스천헤럴드2023.09.14
    얼마전 대한항공에서 승객들의 몸무게를 잰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다. 국토교통부 고시에 따른 일시적 행정절차이지만 오해를 살 여지가 있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승객과 수하물의 중량을 측정해서 비행기에 실어야 할 연료양을 정하기 위한 안전수칙으로 보인다. 비행기는 통상 실제 필요한 연료보다 1% 정도 더 많은 연료를 싣고 비행한다. 정확한 무게를 측정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연료를 싣지 않아도 되어서 연간 10억 달러 정도를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승객이 몸무게 측정을 거부할 수 있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며 조사하는 것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에 하와이언 항공 사모아 항공사가 승객의 무게에 따라 가격을 책정할 계획을 밝혀 언론에서 이슈가 되었다. 키가 크고 등치가 큰 사모아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평균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사모아 항공은 승객 몸무게에 따라 비행기 좌석 값을 정하는 첫 항공사가 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왜 항공사들이 이렇게까지 무게 절감에 사활을 거는 걸까? 그 이유는 항공사의 가장 큰 지출이 연료이기 때문이다. 연료 손실은 고스란히 항공사가 부담하는 것이고 그 손실은 회사 이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연료 절감은 곧 수익이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필요 없는 무게를 줄여야 한다. 이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 오래전 대한항공에서 흥미로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기내에 버려진 과자를 일년 동안 방치해 두었을 때 발생하는 연료손실을 계산한 것이다. 아무리 작은 무게라도 불필요한 것을 싣고 다니면 손해라는 뜻이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야 한다. 이러한 항공사의 사정은 비행기를 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비행기를 탈 때 부치는 짐에 대한 별도의 요금은 없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항공사가 짐의 개수와 무게에 따라 추가 요금을 받고 있고, 받지 않은 항공사도 무게 제한이 있어 초과하면 적지 않은 비용을 내야 한다. 이 정책 또한 한동안 승객들의 불만을 샀다. 항공사들이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내놓은 여러 정책들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연료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필요한 것을 싣지 않는 것이다. 한 예로, 비행기는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새로 외관을 칠하는데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페인트를 다 벗겨내고 맨 살 위에 다시 칠한다고 한다.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보잉 747-400 비행기 외관을 칠하는데 페인트 55통 정도가 사용된다고 한다. 페인트 한통에 10파운드 정도 하니 페인트의 무게만 550 파운드라고 보잉사에서 밝혔다. 그러나 디자인에 따라서 페인트 100통, 즉 1000 파운드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연료에 영향을 미친다. 칠을 벗기는 작업과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 불필요한 무게로 인한 연료손실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은 없애야 한다.비행기는 삼백만 개가 넘는 부품들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수많은 부품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두 꼭 필요한 부품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하나도 필요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모두 각기 제 역할이 있고, 그 기능때문에 비행기의 일부가 된다. 과자 하나도 연료 낭비가 되는데 비행기에 필요 없는 것이 기체에 절대로 포함될 수 없다. 한국의 나로호 로켓이 초기에 여러 번 발사에 실패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손바닥만한 링 부품의 문제였다고 한다. 이렇게 필요한 모든 부품들이 제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안전한 비행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도 같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도를 한 몸으로 비유하며 그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는 꼭 필요한 일부라고 쓰여 있다. 성도들은 몸의 부분처럼 생김새와 역할이 다를 뿐 제각기 필요한 기능을 하고 있고, 함께 있어야 완성된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비행기에 필요 없는 부품은 없듯이 교회에도 필요 없는 지체는 없다. 비행기 몸체에 사용되는 모든 부품이 하나로 부품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다. 비행기처럼 성도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제 기능을 다 할 때에 능력있고 부흥하는 온전한 교회가 이루어진다. 팬데믹이 끝났다. 거리 두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 같이 교제하고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교회로 돌아가도 된다. 그런데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로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한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그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란 존재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교회는 내가 꼭 있어야 할 곳이라 말씀하신다. 나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지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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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 예수님만을!” 크리스천헤럴드2023.09.14
    지역사회를 섬기며 여러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 참석해서 순서를 맡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중에 목사안수식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목회사역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는 남가주프라미스교회 창립 12주년 기념주일에 있었던 목사 안수식에서의 일이다.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참석중이었는데 목사안수를 받을 분을 소개하는 담임목사님은 “이번에 안수받으시는 분은 11년동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찬양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한번도 ‘아니오(NO)!’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예배당은 안은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누군가는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로도 축하의 표현을 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분들도 있었다.어찌 생각해보면 사역자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사실 나도 무척 기쁘고 설레기도해서 아내의 눈을 마주하고 엄치척으로 호응했다. 목사안수를 받는 분의  성품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담임목사님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어서 사역의 출발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참 즐겁고 기쁜 목사안수식이었다.마침 내게 선배의 조언을 부탁하시기에 고심하며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하시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치를 잘 살피셔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셔야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드렸다. 교단 안수위원 목사님의 권면 중에 ‘초심유지’라는 말씀이 와닿았다. 그러면서 내가 맞았던 그 첫 순간들을 기억해 보았다. 1995년에 목사 안수를 받던 감사와 감격스런 순간, 아내를 만난 순간, 딸 리베카가 태어난 순간, 미국에 도착한 첫날, 담임목회를 시작하던 순간 등등 제 인생의 첫 순간들을 생각하니 원망과 불평을 했던 몇가지 일들이 떠올라서 부끄러움과 죄송함으로 가슴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으로는 목사안수식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십자가를 떠올리며 주님께 깊은 회개와 죄송함을 품고 지난 사역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었다.이 교회가 개척한 이후로 새벽 4시 30분에 문을 열고 기도를 드리는 어느 한 장로님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교회를 위하여 고단한 새벽 잠을 깨우고 성전의 문지기로 서원을 드리고 일터로 달려나가는,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내드리는 숨겨신 헌신과 섬김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이 밀려왔다.인생을 마칠 때까지 목적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든 일이다. 세월이 지나도, 상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이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성경의 인물들 처럼 환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건 다니엘의 변하지 않는 믿음처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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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선교적 영성 (1)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론 등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선교 활동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신학화하고 영성을 이해하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성을 접근할 때에 존재적인 영성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것의 표현 방식의 한 부분으로 그의 사역과 선교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그의 선교 사역을 이해하고 그것의 기초로써 존재적인 영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영성과 선교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선교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관점이다. 이것은 존재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한 부분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에 놓인 존재의 표현일 뿐인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까지 이루어져야한다는 면에서 선교를 강조한다. 이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을 할 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는 전통적인 신학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선교적 영성이란 이렇게 우리가 존재적인 관점에서 영성을 잘 갖추어야 하고 그 표현으로 활동으로써 선교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다. 선교적 영성이란 본질적으로 영성이란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는 영성의 주변부가 아니라 선교가 아닌 영성은 없는 것이다. 영성이란 활동없이 존재적인 영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선교 활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영성이다. 선교는 영성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영성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영성이란 우리의 존재적인 영성이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고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선교 활등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을 할 때에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즉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알 수는 없다.  단지 그분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일 뿐이다. 존재보다 활동이 우선한다.물론 결국 우리의 신학과 영성에서 존재와 활동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축이 기존의 신학과 영성에서는 존재에 관심을 주었다면 현대 선교 신학에서는 그리고 선교적 영성에서는 하나님의 활동하심과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활동하심을 이해하고 우리가 그 활동에 참예함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존재와 인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중요성은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의 기초이자 동기로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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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목사의 낚시 전도법 -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 소수로 (결론)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우리는 위의 네 가지 카테고리만으로도 적지 않은 전도 대상자(태신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도 대상자를 더 많이 발견하고 또 발굴하여 그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 힘써야 하므로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통해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전도는 기본적으로 성도 개개인이 하는것이지만, 교회적으로 전도하려는 성도들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의 태신자 발굴이 필요하다.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 중 단기적인 행사 혹은 외부 이벤트를 통해 태신자들을 발굴하여 기성 성도들에게 그들을 맡길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기본적인 카테고리에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를 통한 입체적인 방법을 추가하면 더 많은 사람(태신자)을 찾을 수 있다.예를 들어,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목회하는 목사들의 경우 교회는 위에서 열거한 방법에 많은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만나는 모든 손님, 혹은 동료가 다 교인들이다.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전도할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직업을 통해서는 태신자 리스트를 작성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확장된 모델을 만들게 되면 얼마든지 추가로 태신자를 발굴할 수 있다. 목회자인데, 기타를 조금 친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 안에서 찬양 인도를 한다고 하면 이분의 경우, 기타를 가지고 얼마든지 확장된 모델을 만들 수가 있다.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기타 무료 레슨, 혹은 기타 동호회를 조직할 수 있다. 꼭 자신의 거주지가 아니어도 교회에서 기타 무료 레슨과 같은 클래스를 운영하면 교회 바깥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이런 경우 일 년에 한두 번 학생들이 리사이틀을 통해 배운 실력을 자랑할 수 있고, 자신들의 친구나 부모들을 교회(다른장소)로 초청할 수도 있다. 이런 전도 모델은 개인과 교회가 함께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전도 방법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기타를 무료로 지도하는 재능기부의 모양이지만, 이 일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부모들과도 접촉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태신자 발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나의 경우, 운동하는 아들을 바래다주며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많은 학부모와 만날 수 있고, 또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침이면 커피를 사 들고 아침 먹거리와 함께 대접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혹자는 나에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몇 명이나 교회에 전도했고 몇 명이나 교회에 등록했느냐고. 하지만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데려다 등록시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것이다. 나는 거저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의 정성과 열정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나의 섬김과 사랑의 표현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내가 굳이 내 돈을 써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내 개인의 사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많은 목회자의 관심이 주일 교회의 출석 인원과 등록 인원에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분들은 나에게 개척교회인 우리 교회의 상황을 물어보시곤 한다. 분명한 것은 낚시 전도법의 전도는 롱텀 프로세스(Long Term Process)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꼭 사람의 머릿수와 똑같은 결과치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어떤 태신자의 경우 4~5년을 넘게 교제하면서도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짧은 시간 여러분의 교회를 더 많은 사람으로 채우기를 원해 이 전도법을 사용한다면 결과에 실망할 수도 있다. 낚시 전도법은 교회 건물에 사람을 데려다 놓는 획기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하심을 전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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