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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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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 목사 칼럼 - 공평한 복수 "Getting Even"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본문: 에베소서 4:25 - 5:1 우리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복수(get even)”는 절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학 교수인 루이스 스메즈 박사(Dr. Lewis Smedes)는 ‘용서와 망각(Forgive and Forget)’이라는 책에서 용서함에 대해 심도 있게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사이가 나빠진 사람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절대로 동일한 산술로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공평한 복수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용서만이 불평등한 고통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 맴도는 것을 끊어주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견은 왜 바울 사도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고 다급하게 편지 썼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용서하는 마음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영적으로 살아남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하여 호소하였습니다.우리 모두 생각 해 보시길 바랍니다:  스메즈는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도, 양해하는 것도, 일을 무마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용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무너뜨리고, “불공평한 과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새로운 평등의 가능성을 창조합니다. 용서는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중 가장 어려운 일이며 또한 가장 위험 부담이 큰 일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강력한 파도의 정상을 타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수를 자유롭게 놓아 주는 것이며 그 죄수가 당신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꼭기억해야할 것:복수는 우리를 가두지만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Revenge imprisons us; forgiveness sets us free. 샘신 목사SAM Community Church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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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FISH 전도법 - 제자와 판매자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팬으로 남고 싶다고 팬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다. “제자가 되어 제자를 남기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와 교회에 주신 사명이다. 명령이다. 성도를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제자 되기를 원하신다.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사를 주신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중 사회적으로 엄청난 지위와 능력을 소유한 자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에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로 사람을 구하고 생명을 구하는 제자가 되게 하셨다.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약속이다. 영혼 구원은 바로 제자가 하는 일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그 일을 하기 원하신다. 제자 되는 것이 싫고 힘드니, 그냥 팬으로서 응원만 하겠다고 결정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자와 팬으로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우리 각자가 져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팬으로 산다는 것이 문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잘 아는 가롯 유다는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제자가 아닌 판매자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누가복음 22:47-48)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돈 몇 푼에 예수님을 파는 판매자가 되어버렸다. 예수님을 팔기로 이미 판을 다 짜놓고, 태연스럽게 예수님 앞에 나와 입맞춤을 했다. 가롯 유다라는 이름에 수식어가 붙는다. ‘예수를 판 자’. 가롯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 되기를 거부했고, 종국엔 판매자가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여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제라도 예수님을 다른 것과 맞바꿀 수 있는 판매자가 될 수 있다. 가롯 유다가 돈과 예수님을 트레이드(trade) 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 어디 돈뿐이겠는가? 예수님과 바꿀만한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지 않은가? 이미 성경에는 예수님과 바꿀만한 것들을 산더미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나만큼은 판매자가 아니라고, 가롯 유다가 아니라고 꿋꿋하게 말할 자신이 있는가? 제자와 판매자 사이에 모호한 회색인은 없다. 제자와 판매자 사이에 은근슬쩍 서있을 수 있는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제자로 부르신 엄중한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다양한 크리스천 문화와 화려한 설교와  여러 교회 활동을 즐기는 팬인지, 언제라도 예수님보다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판매자인지, 죽기 전에 예수님 앞에 서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프로가 되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때로는 절망하는 아들을 통해 몇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온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서야 할 자리를 결단하게 되었다. 팬이 아닌 성도, 판매자가 아닌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도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노력과 달리 이 일은 전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을 위해 샤워를 하면서 전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리는 물줄기처럼 머릿속을 강타하는 말씀이 있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9)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많이 듣고 자랐던 말씀이었다. 평소에도 신약을 통독할 때마다 몇 번이고 읽었던 말씀인데 그 날따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말씀의 영어 번역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선명하게 기록된 ‘FISH’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물고기란 네 단어에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전도에 관련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로 출근하자마자 나는 내가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전도에 대한 글들을 뒤적였다. 많은 그림, 표, 정리되지 않은 글들… 나는 그 모든 내용을 ‘물고기(FISH)’라는 네 개의 영어 단어 안에 빠른 속도로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이 ‘물고기(FISH)’라는 네 단어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낚시 전도법’이다.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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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동식 교수 칼럼 - 신학, 공부해야 하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2.11.10
      ‘’신학 무용론“이 만연하다. ‘신학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은 ‘신학이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채플에 오셔서, 신학 공부보다 목회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들은 신학생들이 어떤 마음을 품었겠는가. 큰 교회를 맡으려면 신학 공부보다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과연 바람직한가?   그런 목표 의식을 가지니 신학을 하더라도 ‘실천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당장 교회 현장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신학을 한다. 설교를 위해 설교학을 공부하고, 교인 상담을 위해 상담을 전공하며, 성도들의 영성을 키우기 위해 영성학을 공부하고, 효과적 선교를 위해 선교학을 공부한다. 이런 흐름이 무엇 나쁘겠는가마는 생각을 좀 해보자.   흔히 신학을 나무에 비유해 4개 분과로 구분한다. 성서신학이 뿌리요, 역사신학이 몸통이요, 조직신학이 가지요, 실천신학이 열매다. 학생들에게 어디에 관심이 있냐 물으면 대부분 실천신학 쪽이다. 그래도 성경은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있어서 성서신학에 관심 있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특히나 조직신학은 별로 관심이 없다. 복잡하기만 하고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당장 교회 현장에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좀 씁쓸하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 당장 쓸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신학의 중요성, 특히나 이론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윤철호 교수도 언제가 이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론 신학도 이론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칠 때 태도를 보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스 7:10).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연구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고’ 그 율례와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 바른 이론을 알아야 바른 실천이 나오는 법이다. 기본이 중요하다. 줄넘기도 하나씩 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이단 뛰기, 삼단뛰기, 뒤로 뛰기, X자로 뛰기 등 다양한 형태들이 응용되어 나왔다. 기본이 먼저며 기본이 근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로 알려진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신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참된 신앙의 기초를 이루는 ‘요리문답 공부’다. 둘째는 일반적이며 좀 더 난해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총론 공부’인데 신학교에 어울린다. 셋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여 요리문답과 총론을 성경에서 얻고 다시금 성경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순환적 과정이 신학 공부에서 필요하다고 한다. 이론 신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공부한 내용들을 교회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 적용하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몸으로 말하기’ 게임이 있다. 제시된 단어를 보고 그것을 뒷사람에게 몸으로 표현해야 한다. 앞 사람의 표현을 본 뒷사람은 그다음 사람에게 또 몸으로 표현해서 끝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맞춰야 한다. 얼마만큼 정확하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그런데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가다 보면 처음 표현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럴까? 전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 모두 전달하는 내용을 오해하기도 하며 잘못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 본래 것은 왜곡된다. 우선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한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유용한 것, 실용적인 것만 따라 움직인다. 신앙도 번영만을 추구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기는 도중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른다. 그때 소들이 날뛰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잡는다. 그는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 집으로 보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나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오벧에돔 집이 하나님의 궤를 보관했기에 복을 받는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한다. 복 받기 위해서였다. 바람직한가? ‘화와 복’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 부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학,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다. 신학은 부차적이거나 곁 다리가 아니다. 목회지에 쓸만한 것만을 배우는 곳이 신학교가 아니다. 그러면 굳이 신학교가 아닌 목회 기술 훈련 학원 같은 곳을 세워서 단기 집중 코스로 끝내고 수료증 받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교회의 문제는 어쩌면 목회자의 문제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어쩌면 목회자에게 있다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목회자를 잘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때 부지런히 공부하자. 교회와 목회 없는 신학은 공허하지만, 신학 없는 교회와 목회는 맹목적이다. 신학교 때 공부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목회 성공이라는 헛된 꿈만을 키울 것이 아니라, 엉덩이 의자에 붙이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고민했는지, 그런 선상에 있는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고민하는 시간이기를 소망한다. 기독교가 하락하는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endom)에 굳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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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그들을 용서는 해주되 잊지는 말자!” 크리스천헤럴드2022.10.18
      지난 9월 26일 월요일은 이스라엘의 설날인 로쉬하샤나 데이였습니다. 우리와 절기가 다르지만 그들만의 성경적 절기를 지켜나가며 후손에 대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는 “야드 바셈”이라는 역사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이사야 56:5말씀,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드’는 ‘기억, 기념’이라는 뜻이고 ‘셈’은 ‘이름’ 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이 박물관을 세운 목적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남겨서 기억하려는 의도입니다. 박물관의 크기는 작지만 누구든지 관람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손수건을 손에 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당했던 과거 역사의 아픔, 수난사를 재현해 둔 박물관이기 때문입니다. 출구로 나오기 전 벽면에는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는 해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는 문구입니다. 목이 메이는 글입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서 6백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후로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6백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으면서 눈물로 민족의 혼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역사를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들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  우리 대한민국도 일제 강점기 시절에 민족 고통의 수난시대가 있었습니다. 민족 전통과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일본이름으로 바꾸고, 강제 징용과 위안부로 전쟁에 끌려나갔습니다. 전국 강산에 나라의 소중한 자원과 정신을 다 빼앗겼던 수난의 역사를 견디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슬프고 쓰라린 역사입니다. 이런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잊지 말고 다음 세대에게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크리스천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우리 이후의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거룩한 신앙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사안입니다. 우리의 정서와 신앙이 함께 후대에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의 하신 기업이로다”(신명기 32:7~9). 하나님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중심으로 세계 열방을 섭리하고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자손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이 땅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역사와 흐름은 우리 크리스쳔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배후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크리스쳔들이 마주하는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허락하시고 교회공동체를 사용하셔서 영혼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롬11:36).  억지로 빼앗긴 것은 다시 찾을 수 있어도 내가 스스로 내어준 것은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힘들고 고단한 이민생활 중에도 주 예수를 믿으면 삽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온 세상을 이기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역사를 써 나감으로 주를 기쁘시게하는 삶과 사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최재홍 목사쉴만한 물가교회joshchoi033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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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안전장치 크리스천헤럴드2022.10.18
      빨래건조기가 고장이 났다. 전원도 들어오고, 건조기도 돌아가고, 모든 스위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만 이상하게 뜨거운 열만 나오지 않는다. 드라이기에서 찬바람이 나와 빨래를 말릴 수 없으니 다른 것이 다 잘 작동된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다. 수리하기 위해서 서비스사에 연락했다. 다음날 수리사가 와서 건조기 뒤 뚜껑을 열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뭔가를 만지는듯 싶더니, 불과 몇 분만에 다시 뚜껑을 닫고 바로 드라이기를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고치지도 않고 뚜껑을 닫아버리니 이상하다 싶어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보니 뜻밖에도 드라이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곤 드라이기 뒷면에 장착 되어있는 통풍 호스를 빼서 보여주었는데 그 크고 굵직한 호스가 먼지와 이물질로 가득했다. 알고 보니 이것들 때문에 호스가 꽉 막혀 통풍이 되지 않아 드라이기가 너무 뜨거워져 안전장치가 작동되어 열을 차단한 것이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드라이기마다 이런 안전장치가 있어 만약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열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 드라이기가 과열되면 안전스위치가 가동되어 화염사고를 예방한다고 한다. 호스를 빼서 이물질을 제거하고 안전장치를 리셋하고 다시 드라이기를 돌려보니 뜨거운 바람이 잘 나오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상적으로 잘 작동되기 시작했다.  호스를 청소하고, 안전스위치만 다시 눌러놓으면 되는 것을 모르고 멀쩡한 드라이기를 고치기 위해 수리사를 불러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긴 했지만 만약 이 안전장치가 없었더라면 더 큰 손해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과열로 인해 불이 나거나 가스 폭파까지, 생각해보면 더 큰 사고와 손실은 물론이요, 인명피해까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런 안전장치가 우리주위에 의외로 많이 있다. 집집마다 있는 두꺼비집도, 자동차 계기판에 있는 엔진온도계도, 가전제품을 꼽는 전기 어댑터의 차단스위치도 모두 안전장치들이다. 이것들이 있어 더 큰 사고나 위험을 막아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도 이런 안전 장치를 준비해 놓으셨다.  때때로 우리가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방종하며 살아갈 때에, 그대로 계속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안전장치를 가동시키셔서 우리를 멈추게 하신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다 좋고, 다 잘되고 있는데 갑자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며 그 상황을 못마땅해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 그 일이 있어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상황을 겪을 때는 힘들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더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주님께서 가동시키신 안전장치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을 때 이것이 혹시 주님께서 가동시킨 안전장치는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별 생각 없이 무시하고 그냥 하던 대로, 가던 대로 계속 갔다 가는 더 큰 사고와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주님의 안전장치는 징계나 연단이기 보다는 나로 하여금 더 큰 화를 면하게 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안전장치임을 알아야 한다. 한 순간도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못하시고 눈동자같이 나를 지키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4-7-  조영석 목사choyoungsu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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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칼럼 – “소통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10.13
      교회가 코로나를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코로나 때 교회는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채 너무나 갑자기 겪었지만 정부의 시책과 교회의 적절한 대응으로 오늘을 맞이 하였다. 그동안 교회에 대한 수 많은 분석들과 방향에 대하여 의견들과 방안들이 제시되었고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위증한 시기에 발빠른 출판사들은 코로나와 교회에 대한 책들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코로나 시기에 교회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대체적으로 소그룹과 온라인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코로나 펜데믹이 엔데믹이 되면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교회는 먼저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정리가 되어야 한다. 사실 코로나 때 가장 큰 변화는 예배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교회론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결국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교회론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큰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지식적인 내용은 말할 수 있지만 코로나 이후 시대에 합당하고 현장에 적합한 내용을 누구도 정확히 말하기를 어려울 것이다. 또한 코로나 때문에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지만 교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더욱 변하였고 특히 기존 교인들의 의식은 너무나 크게 변하였다. 코로나 이후 교회에 돌아오는 교인들의 비율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대면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만 숫자로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대형 교회와 소형 교회의 격차도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다. 재정 상태와 새로운 교인들의 유입면에서 코로나 이전보다 더 큰 격차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므로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서 교회에 대한 정의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복음을 받아 들인 후 코로나 펜데믹 보다 더 참담하고 혼란한 민족의 어려움을 함께 겪어 왔다.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교회도 함께 그 때마다 큰 피해를 입었고 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는 변함없이 할 일을 해 왔다. 그것은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돌아 보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교회가 재정 규모가 커지면서 건축과 시설에만 투자하면서 이웃에게 비난거리가 되고 사회의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교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손길들이 있었다. 앞으로 목회적인 필요에 따라 예배의 형태가 변할 수 있고 또한 모임의 방식도 변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정확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변할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가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자들과 가진자들과 가까이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교회의 원래적인 기능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교회는 이제 내부적인 출석율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을 돌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교회에 세우신 이유에 합당하고 세상에서 외면을 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교회가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다가가면 교회는 코로나 이후에 더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할 때이다. 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kim04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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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서민수 목사의 FISH 전도법 - 사라져버린 전도에 대한 자극 크리스천헤럴드2022.09.21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교회 밥을 조금이나마 먹어 본 성도들은 다 알고 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 증인이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전도자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라는 예수님의 유언이 바로 전도자가 되어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유언 안에는 평소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과정에 사도 바울의 그 주옥같은 도전과 교훈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매일 경험하게 된다.  축구선수인 아들에게 수만 가지의 부탁을 매일 해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버지인 내가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만약, 내가 이 땅을 떠나면서 마지막 말 한마디,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마지막 유언이 가지는 말의 의미와 힘은 엄청난 것이다. “프로가 돼라”. 아들은 이 말을 이루기 위해 모든 일상의 반복되는 훈련을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겨워도 자신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하고 끝까지 참고 버티면서 실천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사실은 신앙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교회 밥을 먹고 신앙생활을 좀 했다면 프로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부탁이자 유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언을 기억하고 신앙의 프로가 된 다는 의미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다. 대충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인스턴트식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믿음 생활에서 프로가 된다는 말인 ‘제자’가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제자가 돼라.”라는 예수님의 말 안에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이루며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제자가 되는 것에는 기준점이 있다. 내가 제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또 다른 제자를 삼고, 남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영혼 구원이고, 전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인 프로가 되어야 하는데 그 프로의 단계가 바로 제자이고, 그 제자는 바로 전도하여 영혼 구원할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들이 프로가 되어서 첫 경기를 교체 출전하게 되었다. 나와 가족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들의 경기를 보았다. 경기 시작은 벤치에서 있었기에, 본경기에 불과 30여 분 정도를 뛰었다. 공식적인 프로 데뷔였다. 본인도 가슴 떨렸겠지만, 아들을 바라보는 가족의 마음도 흥분 그 자체였다. 경기의 끝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하나둘씩 필드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팬들을 만나기 위해 관중석 가까이 이동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프로로 공식 경기를 뛰어보지 않은 아들은 우물쭈물 라커룸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팬들의 부름에 다른 선수들이 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몇몇 팬들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싸인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팬들이 있는 관중석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 소녀 팬들이 가져온 티셔츠와 종이에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을 받은 소녀팬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한때 한국에서는 『제자입니까, 팬입니까?』라는 책이 유명했다. 얼핏 들어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제자와 팬은 판이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팬은 결코 제자(선수) 들의 훈련과 고통을 똑같은 분량으로 감당할 수 없다. 오히려 그 고통과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에 제자(선수)들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감동하고, 함께 기뻐한다. 일 반인이나 팬들은 프로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모든 고통과 눈물, 아픔을 똑같이 경험할 수 없다. 영광의 순간을 그저 함께 기뻐하고 응원할 뿐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열광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둔다. 이러다 보니 “꼭 제자(프로)가 되어야 하나?”, “팬도 괜찮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웬만큼 규모가 있는 교회라면 그 가운데는 목회자나 찬양팀, 혹은 어느 특정 부서를 응원하고 좋아해서 그냥 팬처럼 소속된 성도들도 있을 수 있다. 뭐 굳이 모든 사람이 제자가 되어야 할까 하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안되고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민수 목사방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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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동식 교수 칼럼 - 복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야 할 때 크리스천헤럴드2022.09.21
      ‘교회 위기 시대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이 말에 다른 의견을 내놓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위기인가? 정말로 지금 교회가 위기임을 실감하고 있는가. 혹 너무 자주 들어서 둔감해지지는 않았는가. 위기라면 극복방안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위기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버리는 시대에, 다시금 교회와 기독교의 회복을 외칠 수는 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말이다. 교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이 함께 만나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럼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실질적 고민이 생긴다. 같은 교단 사람들만 만나면 되는가? 그런데 교회 위기는 교파를 초월해 모든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 아닌가. 그렇다면 교파를 넘어 서로 만나야 한다. 교단 연합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가진 공통의 문제점을 두고 만나야 한다. 또 고민이 생긴다. ‘어디까지 만나야 하는지.’ 이 고민 속에는 어느 특정 교단 사람들은 만나면 안 되는데, 거기는 우리와 교리가 다른데, 하는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같은 경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A 교단에서 자란 성도가 A 교단의 신학교를 가서 A 교단의 목사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되고 나서 B 교단, C 교단 목회자를 만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적 경험으로도 총신 출신 목사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주로 근본주의자(?)들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유학와서 총신 출신 목사들과 교제하고 대화하면서 그런 선입견도 많이 깨어졌고, 그들이 주로 읽는 헤르만 바빙크를 읽으면서 그의 신학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만나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다.   이민 신학교 현장은 그런 면에서는 좀 열려 있다. 교수진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음도 알게 된다. 우리는 사실 어쩌면 서로 너무 잘 모르는지도 모른다. 이미 잘못 입력된 가르침으로 인한 선입견 때문에 만남 자체를 꺼렸으니 다른 교단 사람들이 어떤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이제는 함께 이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 우선 만나야 한다.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뉘어 살았을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도 자기만 옳다고 분열을 거듭했을까? 거기에는 분명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 내려놓고 서로 만나 서로 배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형태의 돌파구도 보일 것이다. 차이점만을 부각할 것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아서 만나야 한다. 이것 달라서 만나지 않고, 저것 달라서 대화하지 않는다면, 자기만 남을 것이며, 연합은 언제 가능하겠는가? 가능하기는 하겠는가?   개신교의 우산 아래 모여보자. 통합, 합동, 기장, 고신, 성결교, 감리교, 오순절, 침례교등 서로 만나서 공동으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보자. 그러다 보면, 서로 스며들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면 장로교적 오순절 신앙이나, 오순절적 장로교 신앙도 나오지 않겠는가. 감리교적 침례교 신앙이나 침례교적 감리교 신앙은 불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론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론에 철저히 동의하고 고백한다면 서로 모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분열의 영에 사로잡혀,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아야’ 한다(엡 4:20).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도 십자가의 피로 허셔서 한 몸’(엡 2:14, 16) 되게 하셨는데, 약간의 교리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값비싼 죽음을 헛되게 하는 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제107회 총회 주제가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하소서' (시 50:5, 롬 12:1)”다. 팬데믹 이후 더 급속히 무너지는 교회를 볼 때, 복음의 사람들이 바른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하다. 복음의 사람들이 교단을 초월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자. 스가랴 선지자가 만들었던 ‘은총과 연합’의 막대기(슥 11)를 십자가로 이어서 그 깃발 아래 모이자. 그리고 함께 더불어 새 부흥을 노래하자. 능력의 하나님께서 다시금 교회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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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치유하시는 하나님(2) 크리스천헤럴드2022.09.21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박희민 목사님의 지상설교 6번째 주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두번째 설교이다. (편집자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은 회개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은 그보다 몇 년 전 1903년에 원산지역에서 화이트라는 선교사와 몇 선교사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했는데 하루는 캐나다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였던 하디란 의료선교사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자기가 한국에 와서 선교사역에 큰 열매가 없는 것은 한국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멸시해 온 교만의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1907년 초 장대현교회에서 10일간 사경회를 갖는데 일주일간 별로 큰 감동의 역사가 없었다. 좀 냉냉했다. 그런데 당시 사회를 하던 길선주 장로님이 자기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성령의 뜨거운 불이 임했다. 자기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부인이 재물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니 재산을 맡아 관리해 달라 했는데 그 중에 얼마를 자기가 취했다고 회개하자, 회중사방에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경직 목사님은 템플톤 상을 받으신 후 축하만찬에서 나는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이라고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스라엘백성이 여리고성을 물리치고도 작은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은 아간의 죄 때문이었다. 2008년부터 미국을 위시해서 세계경제가 무너진 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진실되게 기업을 운영하고 정직하게 사업을 해야 하는데 욕심을 부리다가 거품경제가 되면서 세계가 혼역을 치루게 되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은 그에게 회개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시51:17절).간디는 7가지 죄악을 말하면서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양심이 없는 쾌락, 인격이 없는 교육, 도덕이 없는 상업,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죄를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죄책감에 빠지게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죄에서 해방되어 새 삶을 누리고 자유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둘째로 ‘너희가 스스로 낮추면’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  개역성경에는 겸비 하면이라고 번역했다. ’성경은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를 축복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하바드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성경구절을 새기게 된 이유가 있다. 서부에서 명문대 하바드 대학에 엄청난 큰 돈을 기부하기위해 총장을 만나러 학교를 찾아갔다. 허름한 옷을 입고 약속없이 찾아간 노부부를 학교 정문 입구에서 안내원이 귀찮은 도움을 구하러 온 나그네인 줄 알고 들여 보내지 않았다. 실망한 이 노부부는 되돌아섰고 그 돈으로 서부의 명문대 스탠포드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을 알게 된 하바드대학에서는 크게 후회하고 학교 정문에 다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을 새겨 교훈을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교만한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겸손한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중세기에 그레그리 7세는 생의 모든 죄를 7가지로 분류했다. 그 첫째가 교만이다. 그리고 가장 귀한 미덕은 겸손이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 와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했다(마11:29). 온유와 겸손은 사촌간이다. 교만한자는 쉼이 없다 진정한 안식이 없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에게는 치유와 회복을 주시고 천국의 안식을 미리 맛보며 살게 하신다는 뜻이다. 병든 자는 진정한 쉼이나 안식이 없다.  민20장에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했다. 그 온유를 보시고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하나님은 세워주셨다. 그래서 예수님도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자가 땅을 차지 할 것이라 하셨다. 이 말은 부동산 투기에 수지맞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세상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이다.  제가 한번은 미국의 어느 도시에 갔더니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에서 상당히 큰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안식년으로 그곳에 와서 일년간 쉬고 가셨다. 그런데 작은 어떤 교회에 출석하니까 등록하라고 해서 이름과 주소를 써 냈는데 목사라고 밝히지 않고 출석하니까 하달후에 서리집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 부르고 성경도 잘 아니까 3개월될때 구역장으로 임명을 했다. 그런데도 목사라고 밝히지 않고 겸손하게 잘 섬겼다. 그런데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분이 평신도가 아니고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모든 교인들이 그 목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도 이야기를 듣고 그 목사가 참 멋이 있다. 나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가서 서리집사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일년 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목회자들도, 우리 중직자들도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섬길 때 자기를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때 주님이 더욱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 삶과 공동체속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난다. 마틴 루터와 츠빙글리는 함께 종교개혁을 위해 일했지만 한번은 작은 일로 서로 말도 안하고 불화한가운데 지냈다 어느날 마틴 루터가 시골길을 가다가 외나무 다리를 두 마리 염소가 건너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양쪽에서 두 마리 염소가 오다가 서로 마주쳤다.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 얼마동안 서로 응시하다가 더 힘이 있고 큰 염소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그러자 작은 염소가 그 등을 타고 넘어간다. 그러자 엎드렸던 염소가 일어나 다리를 건너간다. 그것을 보고 루터가 크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그리고 츠빙글리를 찾아가 화해했다.  여러분! 짐승도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는데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이 짐승만도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화해는 오히려 힘 있는 자, 윗사람들, 지도자들이,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 힘있는 자, 메조리티가 오히려 겸손히 힘 없는 자들, 아래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겸손히 엎드려 섬기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 용서도 잘못을 덜 한사람이 오히려 엎드려 자세를 굽히고 겸손이 먼저 상대방을 찾아가 자존심이나 똥고집을 버리고 손을 내밀고 용서를 구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다 풀린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은 예수님처럼 자기 비하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셋째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너희 죄를 사하며 이 땅을 고치시겠다고 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주님과의 대화이며 영혼의 호흡이며 생명의 젖줄이다. 기도는 전기 코드와 같은 것이다. 전기 코드를 연결하면 TV가 작동하고 온갖 뉴스가 나오듯이 기도의 코드를 연결하면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내게 넘쳐흐른다.  요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나온다.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을 때 생명이 있고 자라며 열매를 풍성이 맺게 된다. 즉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얻으리라고 했다.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가 있다. 현재 Wallace 총장이 부임해서 지난 20여년간 놀랍게 성장했다. 이분은 다리를 좀 저는 장애인이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는 총장이다. 그가 학교를 차를 타고 전부 캠퍼스를 보여주는데 드라이브 극장이 한때 유행하였는데 안되니까 학교에다 그 넓은 대지를 거이 기증하다시피 팔아 넘겼다. 또한 타운하우스 단지가 있는데 그것도 학교가 싸게 구입해서 가정을 가진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다.  제가 이렇게 크게 확장되고 만명이 넘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대학의 하나로 성장한 비결이 무엇이야 물었더니 기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말로 하는 이야기로 받아드렸는데 총장이 기숙사를 보여주는데 층층마다 기도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캠퍼스 가운데 조그만 건물이 있는데 그곳은 Cooperate Prayer Room 라고 했다 교수나 학생 누구나 기도하고 싶으면 그곳에 가서 성경 읽고 기도하도록 방석도 해놓고 성경도 비치해 두었다. 그런데 거기에 쟁반이 있는데 거기에 10불 20불 자리가 몇 장 놓여있다. 그것은 돈 있는 학생들이 돈 없는 학생들을 위해 도네이션한 돈이라고 했다. 그것을 거저다 책도 사고, 간식도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홈리스가 그것을 알고 찾아와서 집어가서 어떻게 하나 고민한다고 했다. 그리고 캠퍼스 가운데 prayer tree가 있어서 자기 기도 제목을 써서 걸어 두고 오고 가며 기도하게 했다. 저와 총장이 헤어지면서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나누고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제가 많은 미국사람들 만나도 기도하고 헤어지자는 사람을 별로 못 만났다. 민14:28절에 보면 네 말이 내게 이른 대로 내가 네게 행하리라 하였다. 다니엘은 누구보다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라가 바뀌는 그런 상황에서도 네 분의 왕을 모시면서 국무총리로 섬겼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축복과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기도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단6:10절을 보면 왕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처형되는 왕의 조서가 내린 가운데서도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마틴 루터에게는 프레드릭 마이코니우스란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1540년에 병으로 죽게 되자 친구 마틴 루터에게 곁에서 돕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서 미안하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를 받은 마틴 루터는 그 자리에서 친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으며 즉시 편지로 자네는 나보다 죽을 수 없네 내가 나보다 더 오래 살면서 함께 동역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병에서 완쾌되리라 믿는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친구는 병성에서 그 편지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도대로 마틴 루터보다 2달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막9).  북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프레드릭 놀란 선교사는 박해로 피신하다가 한 동굴속으로 들어가 피신하였다. 그런데 그 때 거미가 입구를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였다. 뒤따라오던 관원들이 굴 앞에 와서 거미줄이 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이 지금 들어 갔을 리 만무라고 생각하고 되돌아 갔다. 여러분! 기도하면 거미줄도 성벽이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성벽도 거미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죄악에서 돌아서며 회개하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유자가 되셔서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시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이 땅마저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시간 치유의 하나님, 치료하시는 주님이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한다.박희민 목사 (새생명 선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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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카톡큐티 - ”하나님도 후회하실까?” 크리스천헤럴드2022.09.20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이민생활 속에서 혹은 지나 온 일이나 계획에 대한 아쉬움으로 후회를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학교나 직장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 사랑하는 자녀를 양육하고, 사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에 대해서,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사역을 나누는 과정에서 더 잘할 수 있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믿고 기대했던 일에는 아쉬움이 더 크게 남습니다. 그간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중에 사역과 은사가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할 때에 무척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은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을 볼 때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목회적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 영혼을 품고 예수님께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도 후회를 하실까요? 하나님도 후회를 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라”(삼상 15:11)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의미는 ‘슬퍼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전과 다르게 대하시고 행동하셨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대하십니다. 하나님도 처음과 달라지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왕이 여호와를 향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영적순수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번의 사건을 통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역했을 때(신 32:36), 그리고 다윗에게 전염병을 내리셨을 때(삼하24:16) 후회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우린 후회를 통해서 마음의 다짐과 준비와 내일의 소망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후회와 안타까움이 모여 열정과 간절함이 됩니다. 후회는 최선을 다했어도 만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혹시 우리가 간과한 부분은 영적인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믿고 마음을 내어드리지 못한 결과는 아닐까요? 내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부분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현실의 삶에서, 대인관계에서, 직분과 사명에서, 선택과 결정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어도 여전히 후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부족함과 아쉬움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은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시선을 주께로 향하도록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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