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17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뉴스

  • 49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 칼럼 - 돌아볼 여유 크리스천헤럴드2022.08.09
     바쁘다고 인사를 생략하고,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 추월해서 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고, 그렇게 해서 딱히 얻은 것도 없다. 대신 잃은 것들은 분명하다은행에서 줄을 서서 내차례를 기다리는데 앞에 있는 할아버지께서 은행원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이 지체된다. 할아버지는 친구를 대하듯 은행원에게 말을 건네며 안부를 묻고, 떠날 때도 잘 지내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뒤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을 끄는 할아버지를 보며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시 인사를 나누는 것도 못 기다리며 조급해 하는 나도 문제가 아닌지 싶었다.가만히 보면 어르신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은퇴로 인한 삶의 변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간에 쫓겨 살았던 이전의 분주한 삶을 마감하고 이제 천천히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가정을 돌보고, 책임을 다하고, 미래를 위해 젊음을 희생하며 살았던 시절이 지나고 드디어 얻은 여유와 자유이다. 바빠서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이제는 자세히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천천히 운전을 하며 바람을 느끼고, 눈 안에 더 많은 풍경을 담고 싶을 것 같다.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지난 날의 행동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해온 사람들, 급해서 인사를 건너뛴 사람들, 빠르게 추월하고 지나쳐 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지금 사과할 수는 없지만, 더이상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고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고 싶을 것 같다. 그러나 아직 한창 일터에 있는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애쓰고 수고해야, 나도 여유로운 은퇴를 꿈꿀 수 있다. 지금은 나와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나의 꿈도 쫓아야 하니 그럴 여유가 없다. 불필요한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낭비이고, 갈 길이 먼데 느리게 가는 것은 사치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급히 움직이고, 서둘러 다음 일을 보러 간다.그런데 생각해 보니 대부분 부질없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바쁘다고 인사를 생략하고, 조금 더 빨리 가기 위해 추월해서 모은 시간이 얼마되지 않고, 그렇게 해서 딱히 얻은 것도 없다. 대신 잃은 것들은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인사할 기회를 잃었고, 따뜻한 말한마디 건넬 수 있는 순간을 놓쳤다. 안부를 묻고 축복해줄 기회를 잃었다. 이 모든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한 소중한 것들이다.또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을 것이고, 양보하지 않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갈 길이 급하다 보니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돌아보면 미안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후회되는 일들이 많다. 기회가 있었을 때 조금 더 잘했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렇다면 먼 훗날 찾아올 여유를 기다리기 보다 지금이라도 그동안 무심했던 사람들을 달리 대해야 한다. 외면하고 지나친 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이제라도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축복을 해야 한다.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하려고 하면 이미 소중한 기회들을 놓친 후가 될지도 모른다. 또 내 삶에 그런 여유가 찾아올지 않올지 알 수도 없다.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 모른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바쁘다는 핑계로 큐티를 건너뛰고, 시간이 아깝다고 기도를 줄이고, 다른 일로 분주한 동안 성경책에 먼지가 쌓여간다. 나의 삶에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신경쓰지 않는 관계가 되어버릴 수 있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빠른 부흥을 위해 모든 힘과 자원을 성장에 쏟아붓는 동안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는지 모른다. 서두른 덕에 단시간내에 급성장을 이루었지만 성도들은 피폐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가 본질을 놓쳤다고 실망하고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침체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니 급히 가는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더 늦기 전에 내 삶에 허락된 모든 만남과 관계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오늘도 바빠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이웃을 돌아볼 여유는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5)조영석 목사찬양사역자
    Read More
  • 48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 3 : 거부 회피형 불안정 애착 크리스천헤럴드2022.08.09
     세상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느낌,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 부모에게 나는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일관되게 받게 된다부모는 그냥 아기를 낳아주고 음식과 의복 등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신체적, 물리적 필요뿐 아니라 정서적 필요를 충분하게 채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의 생후 3년 동안 부모가 무슨 이유에서든 아기의 정서적 필요를 충분하게 채워주지 못한 경우, 아기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거부 회피형 불안정 애착을 형성하기 쉽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겠느냐마는, 임신 중이나 출산 후에 엄마나 아빠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거나, 부부 갈등이 심하거나, 경제적 압박에 시달린다거나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인해 아기의 정서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애착을 형성하는 3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부모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에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비록 말도 못하고 사리 분별이 잘 안되는 어린 아기이지만, 생후 3년 동안 아기는 부모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된다. 아기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느낌, 그리고 이 세상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느낌,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 부모에게 나는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일관되게 받게 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불안정 애착 유형이 거부 회피형이다. 거부 회피형 유형의 아이는 인간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성인으로 자란다. 친구가 있거나 없거나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해도 별 감동이 없고, 심지어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피곤하다 생각되어 가능하면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 소수의 사람과만 교제하고 혼자 남겨져도 외로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유롭고 편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대화를 즐기지도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거부 회피형 유형의 사람이 연애나 결혼하면 처음에만 조금 반응하다가 곧 연인, 부부 관계에서도 철수한다. 즉, 데이트를 귀찮아하고 돈을 쓰는 데 인색하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집에서 말 한마디 안 하고 주로 TV 나 핸드폰만 보거나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편 애인이나 배우자는 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대화를 할 수가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거부 회피형에 대해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사람이 실제로 인간관계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친밀한 인간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약점까지 다 보여주고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상대방이 자신을 거부하고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에 쉽게 인간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만 3세까지의 아기 적 시절에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상처받고 버림받을 바에야 차라리 관계를 만들지 말자는 나름의 인생 철학을 만든 것이다. 거부 회피형은 자기 긍정, 타인 부정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자기 긍정이란, 자신에 대해 좋은 이미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타인 부정이란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신실함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거부 회피형의 사람은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고, 동시에 다른 사람은 믿을만 하지 않으니 친밀한 관계는 아예 만들지 않는게 좋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은 부부관계 뿐 아니라 다양한 가까운 관계에서 친밀감을 주고 받지 못해서 메마른 관계를 유지하고, 결과적으로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본인도 힘들어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부 회피형의 사람은 자기 긍정에 타인 긍정까지 더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즉, (비록 나의 부모는 그렇지 않았지만) “내 앞의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버리지 않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이고, 약간 불편감을 느낄 정도로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자신의 마음을 더 열어 보려는 노력을 한다면 타인 긍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 애착 유형은 만 3세까지 부모의 양육 방식에 의해 만들어지고 굳어지는 것이므로 본인이 뭔가를 잘못했다기 보다는 부모의 일방적인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부모 탓을 하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상태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안정형 애착 유형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면 애착 유형도 서서히 변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내 삶의 주인이 부모가 아닌 자신이 되어 보자!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
    Read More
  • 47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크리스천과 노동 (2)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4번째 주제 ‘크리스천과 노동’ 두 번째다. (편집자 주)목사가 돈을 너무 잘 헤아리면 은혜가 안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목사라고 말한다. 서툴러야 신령한 목사로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목사도 돈을 좀 알아야 한다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살라는 것주님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열려있지 않다. 일하고 싶지만 할수 없는 인생의 밤이 곧 찾아온다.복음주의자들이 기피하는 것이 무엇인가? 돈이다. 속으로 좋아하면서 겉으로 기피한다.목사가 돈을 너무 잘 헤아리면 은혜가 안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목사라고 말한다. 서툴러야 신령한 목사로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목사도 돈을 좀 알아야 한다. 재정을 좀 알아야 교회가 빚더미에 오르지 않고 파산당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에서 파산당한 교회가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수정교회이다. 한인 교회들도 많은 교회들이 부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저는 재정을 잘모른다. 그러나 빚지는 것은 무서워한다. 제가 이 교회 부임했을 때는 페어팩스에 있는 유대인 회당 건물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었다. 약 6개월 후에 교회건축이 시작되었다. 제가 캐나다에서 14년 좀 모자리게 섬겼는데 교회가 3만불 정도를 전별금으로 주어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객원교수로 섬기던 녹스 신학교와 토론토한인장로교회 장학금으로 바치고 저희 나성영락교회에 건축금으로 만불을 바쳤다. 그당시 3만불장도는 지금 3만불보가 큰 돈이 었다. 예를 들어 제가 부임할 때 교회가 3만 몇 천불을 사례및 주택비로 주었다. 그리고 부임한지 1년 반에 교회 건물을 완공하고 입당하였다. 담임목사로 위임받을 때는 350여만 불 의 빚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다 갚고 그동안 바랑카땅, 병공장, 은혜관, 중국사람이 하는 장동차 수리하는 건물과 땅 스타코에 속한 작은 땅을 모두 사들이고 제2교육관을 짓고 기도원을 구입하였다. 그리고도 수백만불 남기고 은퇴했다. 성경에보면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했다. 아주중요한 말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대조해서 언급한 말은 돈밖에 없다. 그만큼 돈의 위력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과 영성 생활을 위해 물질관이 바로 정립 되어야 한다. 요한 웨슬레도 ‘너희 돈주머니가 회개까지 천국에 들어 갈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물질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마찬가지로 우리의 일과 노동, 직업과 사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한다.여러분! ‘경영이 없는 경건’과 ‘경건이 없는 경영’ 이 둘중에 어느 것이 더 문제가 되고 해가 되며 악이 된다고 생각하는가?좀어려운 말인가? 좀 골치가 아픈 질문이지요? 둘다 꼭같이 해로운것이다. 신앙과 선교를 앞세워도 사업을 잘 못하면 하나님의영광을 가리운다. 또한 사업과 돈을 잘벌어도 남을 착취하고 속여 벌면 잘못된 것이다. 비성경적인 것이다.사업을 잘하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섬기고 더 성실히 순종 하는 삶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소명이다.잘못된 직업관과 노동관1) 동서양의 이원론 탓도 있다. 교회에서 하는 것은 다 거룩한 것이고, 세상에서 하는 것은 다 천박하고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인가? 맞는 말 같은데 틀린 말이다. 목사직도 호구지책을 위해 한다면 가장 천한 직이 된다. 그러나 길거리를 청소하는 일도 하나님의 동산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면 가장 거룩한 성직이 되는 것이다.2) 동양의 무속신앙도 한 몫을 했다. 동양의 무속신앙은 신을 LOCALLIZE한다. 예를 들면 산엣가면 산신령이 있고, 바다에 가면 물귀신이 있고, 통시에 가면 통시 귀신이 있다. 그러나 그 장소만 떠나면 그 신이 나를 해치지 못한다. 그곳에서만 그 신이 지배하므로 잘 신을 달래면 된다. 거기만 떠나면 그 신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런 무속신앙의 영향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있어서 예배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한다. 거기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섬기면 되고, 밖에 나가서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신자와 꼭같이 행동하게 된다.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불꽃같은 눈으로 항상 우리를 꾀둘어 보시는 하나님이시다.목회가 소명인 것처럼 샌드위치 직업도 소명이다. 목회자는 교회(목회)로 부름 받았고. 직업인은 직장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골3: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들은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교회를 건축하는 곳을 어떤사람이 지나가다가 보고A라는 일꾼에게 왜 당신은 여기서 일하고 있소? 물었더니 죽지못해 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자기 일이든지 교회일이든지 죽지못해 일하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B라는 일꾼에게 같은 질문을 던젔더니 그는 돈을 벌기위해 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러분! 일하는 목적이 단순히 돈 벌기위함이라면 그도 행복한 사람은 못된다. 그리고 C라는 일꾼에게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기쁨과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명감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소명감으로 하느냐? 소명감 없이 하느냐가 우리의 하는 일을 하늘과 땅의 차이로 만들어 놓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서 하는 일은 가룩한 일이고 세상에서 하는 일은 세속적인 일로 생각한다. 이것은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틀린 말이다. 교회서 하는 일도 자기 영광과 자기 유익을 위해 한다면 가장 천하고 세속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성경적인 올바른 직업관1) 직업은 돈을 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섬김을 위한 것이다. 창1:28절에 보면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것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다스리고 관하였는가? 그러지 못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연과 생태계를 학대하고 착취했다. 그래서 지구의 온난화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으며 세계가 이상기후로 곤욕을 치루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잘관리하고 다스리라는 문화문령을 우리는 성실히 이행하고 순종하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복을 받는 길이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수지 맞을려고 그렇게 명령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복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2) 직업은 이웃사랑의 길이다 그것으로 생업 이상으로 봉사와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다. 봉급을 받고 이윤을 남기는 것은 더 오래 섬기고 전문인으로 잘 섬기기 위해서다. 많이 남기는 것은 더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이다(연구비). 우리가 학교와 회사에서 교수나 사원으로 일할 때 총장과 사장과 계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계약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학생은 성실히 공부하고 교육받는 것이 가장 우선권이다. 남는 시간에 전도하는 것은 귀한 것이지만 공부 안 하고 전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다. 3) 자원봉사는 거룩하고 돈받는 것은 거룩하지 아니하다는 생각도 잘못이다. 자원봉사는 한계가 있다. 돈 받고 해야 책임있게 일하고 잘 섬기게 된다. 유급봉사는 가) 섬김의 질을 높여준다(The quality of service). 문화가 발달한 나라나 사회일수록 섬김의 질이 높다. 서비스 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알아보려면 그 사회의 서비스 정신을 보면알수 있는 것이다.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고 중국의 문이 열렸을 때 처음 여행 갔을 때 비행기나 호텔에 들어가보면 서비스가 전혀 없었다.나) 섬김의 지속성을 보장해 준다. 좋은 서비스가 지속되려면 그러한 섬김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댓가가 뒤받침 되어야 한다. 어떤 일이 자기에게 졸은 직업이냐? 그 일을 할 때 우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좋은 일이다. 그런 일을 통해 자기도 만족하고 성장하며, 결국 사회에 기여하게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된다.다) 섬기는 자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물론 우리 일이 돈 버는 것 이상으로 자기만족과 보람을 가져오며, 자기 성장을 줄 뿐 아니라, 사회에 유익이 되고 기여하게 될 때 하나님께도 영광되는 것이다.끝으로 소경의 눈을 떠서 밝은 세상을 바라보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서인가? 주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새로운 안목과 통찰력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창의적으로 바라보며 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노벨상 하나도 겨우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거의 200개나 받았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창의적인 교육과 삶의 훈련을 받으며 살기 때문이다.  
    Read More
  • 46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하나님의 회복과 사명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혼자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비오기를 기도하자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큰 비가 쏟아졌습니다.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 이루었지만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단호한 경고를 받은 그는 도피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인 브엘세바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햇볕을 막아 줄수 있는 한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육체적, 영적으로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엘리야는 자신이 사명의 여정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완전히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죽음에 직면한 상황을 이겨내도록 구운 떡과 물과 휴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루만져 주셨서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더해 주게 됩니다. 이에 힘을 얻은 엘리야는 사십주 사십야를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나아 간 것을 알수 있습니다.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는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간 여정이 바로 40일 입니다. 하나님의 산의 도착한 엘리야는 그 곳 굴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두 번째 다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어셨습니다.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게 성찰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첫번째와 같은 대답을 하게 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14) 엘리야는 ‘오직 자신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항변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당시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칠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앞에 엘리야를 세우고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밀한 음성’ 가운데 그를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세미한 소리는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인 말씀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셔서 관점을 바꾸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할 세 명의 새로운 지도자들, 즉 하사엘(아람 왕)과 예후와 엘리사를 세우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그 사명을 향하여 나아갈 때 지금 그에게 닥친 육체적, 영적으로 탈진한 상황을 극복할수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해결책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감기처럼 영적 인 침체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든 일들이 잘 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이 되며 혼자라는 고독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은밀한 중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사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Read More
  • 45
    [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사역의 변화 속도를 존중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우리가 속해 있는 사역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할 때에 조급해지기 쉽다. 그래서 사역을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돕기보다는 변화를 빨리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조급함으로는 외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내면으로부터 시작된 온전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가 힘들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위해서는 속해 있는 사역의 변화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서 추진한 변화는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NBA 팀 중에서 시카코 불스는 마이클 조단이 있던 명문팀이었다. 마이클 조단과 더불어서 스카티 피펜이라는 선수가 이 팀을 3연패를 두 번이나 이끌었다. 그런데 그 두 번의 3연패 사이에 마이클 조단이 농구에 흥미를 잃고 2년 동안 팀을 떠났다. 그동안 스카티 피펜이 팀의 리더가 되어서 팀을 이끌었다. 당시 시카고 불스의 감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 중에 하나인 필 잭슨 감독이었다. 그는 마음을 명상으로 잘 다스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감독으로 알려져있다. 불스는 그의 지도하에 그 2년 동안도 불스는 강력한 팀 중에 하나였고 플레이 오프에 나갔다. 그런데 1994년 동부 컨퍼런스 결정전 게임에서 102 동점 상황 2초를 남겨두고 감독이 작전타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작전 타임에서 감독은 마지막 슈팅을 일반적으로 팀의 리더격인 선수가 하는 것이지만 피펜에게 다른 선수에게 패스할 것을 지시하였다. 피펜은 이에 불복하고 벤치에서 나가지 안아서 결국은 다른 선수를 대신 내보내고 기적적으로 게임을 이길 수 있었다. 경기가 끝이 난 뒤에 자신을 믿지 못한 감독에 대한 불만으로 피펜은 경기장을 먼저 떠나버렸다. 경기를 중계하던 중계진이 잭슨 감독에게 질문을 하였다. “피펜이 화가 난 것 같은데 감독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질문은 감독이 팀의 대표선수격인 피펜에게 사과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감독으로서 해야하는 작전을 했다고 말하고 그의 감정을 무시하고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정말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면 선수에게 성처 주게 되고 선수의 자존심을 세워주면 감독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하여 필 잭슨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것은 팀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는 지도자이지만 팀의 갈등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다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팀에게 문제 해결을 맡기고 자신은 거리를 유지하였다.  이 예화는 “적응적 리더십”의 작가 로날드 하이페츠와 말티 린스키의 글에 나오는 예화다. 그들은 적응적 리더십에서 변화하는 현장 속에서 지도자가 건강한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현장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장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지도자는 조직 속에서 이렇게 관찰과 변화를 추구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건강히 하기위하여 지도자 자신에 대하여서도 이런 관찰과 변화를 위한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한다고 하였다. 즉 조직 속에서이지만 자신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그리고 변화를 위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과 조직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두고 조직이 스스로 변화를 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조직이 스스로 변화해 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필요할 때에 개입하는 것이 적응적 변화의 핵심이다. 아마 사람들은 모두 어떤 조직인가에 속해 있을 것이고 그 조직에서 변화가 필요한 점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조직의 변화가 쉽지 않다. 그래서 좌절하고 그 조직을 떠나던지 아니면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나서다가 상처입고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조직은 가정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자일 수도 있고 중간 지도자일수도 있고 추종자 중에 한 명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그 조직에 변화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추진하고 싶은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그 조직의 일원으로 남아있고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직과 떨어져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개인이 해야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있지만 한 개인이 조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조직이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변화를 해 나아갈 때 조직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조직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고 조직이 변화를 해 나아갈 때에 비로소 그 속에서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상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무척이나 힘들고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 조직 속에 있지만 그 조직이 스스로 변화를 해 나갈 수 있는 의도와 역량을 갖추기까지 기다리고 자신을 건강하게 지키면서 또 필요할 때에 조직의 변화를 위하여 일정 부분 공헌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한 점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다리고 인내하기보다는 조급함으로 행동하고 좌절하기가 쉽다.조직의 변화를 위해서는 지도자나 한 사람의 조급함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조직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는 한계점에 도달해야 하고, 조직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고 변화해 가야 한다. 이때 변화의 대리인이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조직 속에서 갈등 속에서도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조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개인의 건강함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조직 속에서 개인이 건강함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롭게 건강한 세포가 되어야 한다.그런데 이런 인내심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할 때나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존중이다. 우리가 억지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관점에서 그의 속도로 변화를 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리고 돕고 인내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Read More
  • 4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 칼럼 - "소통은 재도약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7.26
     지금 한국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일반 공중 방송이 아니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방송국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감동을 하고 있고 뉴스나 소셜미디어에서 대단한 인기라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다. 특히 주인공 역할의 배우를 감독은 1년 이상을 기다렸다는 것과 주인공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도 특이한 내용 중 하나이다.그런데 어떻게 이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인기일까?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 드라마는 ‘착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가 잔인하고 인간들의 어두운 면을 많이 다루었다. 그래서 가족간의 암투, 신분 상승, 출생의 비밀 등의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보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내용에 싫증이 난 것이다. 너무나 뻔한 구성과 스토리, 늘 그 얼굴의 연기자에 사람들은 너무나 착한 드라마에 열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듣는 방송국 채널을 찾아서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있다.채널만 돌리면 무료로 볼 수 있는 기존 TV 방송의 너무나 구태의연한 내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돈을 내고서라도 원하는 방송을 보려고 넷플릭스 등의 방송을 찾더니 이제는 내용이 좋으면 잘 모르는 비록 OTT방식(over-the-top media service 인터넷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 중심의 써비스)방송국도 찾아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밥그릇만 지키려는 기존 방송국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여전한 방식과 내용 그리고 구성으로 만들어진 그러나 식상한 드라마를 만들어 놓고 떠나간 시청자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이제는 이런 시대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는 더더욱 이런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이번 코로나로 인한 코비드를 거치면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교회가 예전처럼 큰 건물 지어놓고 좋은 프로그램과 시설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가 아닌 것을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무한 경쟁과 암투가 있는 세상에서 너무나 지친 몸과 마음을 교회에 와서 회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흩어지고 어수선한 인생의 길을 바로 찾으려는 마음으로 교회에 온다.그러므로 강요하듯 주장하는 내용의 설교와 일사불란한 찬양으로 채워진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만나고 새로워지는 예배가 되어서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은혜로 채워지는 영적인 체험이 있는 예배가 되도록 설교하고 찬양해야 한다.또한 바른 해석을 하는 성경 공부와 기독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지금이 바로 이 일에 집중할 때이다. 코비드 기간 동안 온라인으로 겨우 유지해 왔던 활동들과 소그룹 중심으로 움직였던 모임들을 이제는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서 교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새롭게 리더십을 세우고 기존 방식이 아닌 새 시대에 맞는 교육과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교회는 강요와 강제가 아닌 성도들이 찾아서 올 수 있는 내용과 구성을 갖추는 기간이어야 한다. 절대 원하지 않지만 또 다른 형태의 코비드가 온다면 이제는 무방비 상태로 당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바로 그 때이다. kim0409@gmail.com)
    Read More
  • 43
    [오피니언] 지상설교 - 박희민 목사편 - 크리스천과 노동 (1)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희민 목사의 지상설교 4번째 주제 ‘크리스천과 노동’ 첫 번째다. (편집자 주)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사표를 내고 나갔다. 그런데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인생과 일은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데칼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철학의 명제를 남겼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은 명제가 “나는 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일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일처럼 삶에서 매일 중요한 요소가 없으며, 존재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일본사람이 쓴 단편소설 중에 ‘36호실’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큰 회사에서 고용인들에게 많은 퇴직금을 주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36호실 발령이었다. 그곳으로 발령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너무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 너무 무료하고 답답해서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가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한 사람은 너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고 만다. 이 단편소설이 주는 교훈은 크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가를 말해준다.무슨 일을 어떤 자세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형성하고 결정해 주는 중요한 것이 된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안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인 것이다. 일평생 열심히 노동한 사람에게 은퇴의 삶은 더욱 빛나며,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값진 삶이 되는 것이다. 크고 위대한 일만이 귀한 것은 아니다.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고 가사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값지고 똑같이 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일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지 모른다. 강석규란 분이있다. 이분은 논산 근처에서 출생해서 성장했다. 너무 가난해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러나 검정고시를 쳐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나중에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까지 됐다. 그리고 졸업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명지대학 교수로 일하고 65세에 은퇴했다. 은퇴 후 건강하니까 다시 대학을 세워 1대 2대 3대 총장으로 20년간 섬기다가 4대 총장으로 정근모 장로께 맡기고 이사장이 됐다. 그 대학이 호서대학이다. 그리고 90세가 넘어서 다시 사이버 정보 통신대학교를 세워 총장으로 98세까지 일했다. 전국 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도 지내고 기독교수선교협의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교회에서는 원로 장로다. 일본의 히노하라 박사도 101세다. 동경 세인트누가병원과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병원 명예회장과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방지일 목사도 100세가 넘었음에도 설교하고 집회를 인도하신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시켰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현대의학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현대의학은 사람이 건강을 잘 돌보면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나면서 시각장애자가 된 사람을 놓고 주신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고난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이 인간의 죗값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 된 사람에 대해 질문하기를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면서 소경 된 것이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해 주셨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함으로 더 많은 고통을 가하였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치유보다는 더 가혹한 고통과 상처를 주므로 그것을 보고 즐기려고 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시고 대답해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C.S. 루이스도 고난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 주시는 확성기라고 하였다. 보통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데 고통당할 때는 더 잘 들리고 분명히 들린다. 그래서 그는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고통이라는 채널을 통해 가장 생생하게 들린다. 고정욱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어 비관하고 자살하고 싶었다. 옆집 할머니도 자기를 향해 아무 쓸모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어섰고 마침내 공부해서 박사도 되고 글을 쓰기 시작하여 자기와 같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원망에서 해방되어 왜 나를 이렇게 고난 당하게 하셨는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고난은 그로하여금 정금같은 인격과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고난의 용강로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하나님 뜻 알 때, 복된 삶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 신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인가? 나를 보내신 이의 섭리와 뜻을 이해하고 그가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일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이 복된 삶이다. 학벌, 지위, 많은 돈 등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런 것들은 결국 다 버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 안에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사는 삶인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떤 일인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고 하면 힘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고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 즉 노동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죄의 대가로 남자들은 땀을 흘리며 일하며 살게 되었고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노동을 죄의 대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불교나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노동은 쌍놈들이나 하고 양반은 먹고 편히 놀고 쉬는 것이 상팔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니까 양반들이 아니 종들에게 시키지 왜 저렇게 자기들이 고생하며 뛰냐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스포츠를 모르는 무식에서 나오는 말이다.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속죄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마저도 신성한 것으로 회복시켜주셨다. 할렐루야!이 점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매일 삶의 터전에서 일하고 노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느냐, 못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노동관과 직업관이 바로 정립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을 직장과 사업장에서 보낸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이 어디에서 헝성되는가? 일터와 사업장에서 형성된다. 삶의 중심지와 제자훈련학교가 어디냐? 일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장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할 때 신앙인으로 바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 교인들은 일터에서 무엇인가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다.박희민 목사새생명선교회 회장 
    Read More
  • 42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하나님의 놀라운 일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군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최소한의 인격적 품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기본인 옷을 입고 지낼 수 없었으며 집에 거하지도 못하고 무덤 사이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을 가학적으로 자해하면서 살고 있었고 쇠사슬과 고랑에 매여 있었지만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습니다.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는 여단급 규모의 로마 군대를 일컫는 ‘레기온’의 번역입니다. 그곳에 로마 군대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렸을 때 로마 군대가 저지른 악행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이라는 뜻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잊히지 않고 그 사람의 무의식에 남아서 생각과 행동을 파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제압당한 더러운 귀신은 그곳에 있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귀신은 부정한 가축인 돼지와 함께 몰사했습니다. 귀신이 나간 후 그 사람은 완전한 정상인이 되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온전한 사람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인간의 논리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 사역을 펼치실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라사의 지역 주민들은 예수께서 그 지역을 떠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큰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역사를 체험했으므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여러번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일을 전파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일을 일일이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제압하신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자기의 일을 동일시 하는 놀라운 계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제자들의 물었던 예수가 누구신가?(눅18:25) 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에서 온전히 회복된 자로 변화된 그는 너무 기뻐서 온 성내를 다니며 자기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전파하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각각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온갖 종류의 귀신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세상 가운데 역사하여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악령으로부터 건져내어 사람을 온전하게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멘김요셉 복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Read More
  • 41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애착2 ; 안정 애착 형성을 위한 팁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할 수만 있는 대로 자주, 많이, 그리고 오래 아기를 안아주고 만져주어야 한다. 늘 안아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잘 때도 안고 자고… 이것은 안정적 애착 형성에 필수 요소다생후 만 3세까지 아기가 경험하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애착의 유형을 형성해서 그 아기의 평생동안 지속되는 인간관계 유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아기의 3세까지의 양육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아기가 어릴 때는 기억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린 아기를 키우는 부모 자신도 어리고 여러 문제들로 가정이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서 이 중요한 시기에 우왕좌왕하면서 지나버리곤 한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 좋은 것을 사주고 고액 과외를 시키면서 부모로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잘 공급해 주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아기의 첫 3년이다. 놓치지 말고 이 시기에 아기에게 올인해서 충분히 따뜻한 양육을 해줘야 한다. 그럼 생후 첫 3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의 안정적 애착 형성을 위해 도움이 되는지 몇 가지의 팁을 나누어 본다. 먼저, 이 시기 부모의 일 순위는 아기여야 한다. 아기보다 우선되는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부부 중 한 명은 아기가 태어나면 3년 동안은 일이나 공부를 쉬라고 충고하곤 한다. 이 시기 아기들에게는 함께 하는 시간의 질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양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즉, 하루 종일 엄마 혹은 아빠랑 붙어 있어야 한다. 물론 아기 키우는 주부들은 이게 웬 감옥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길어야 3년이다. 이 아이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어 주는 시기이므로 적어도 이 3년은 그 정도의 정성과 헌신이 꼭 필요하다. 나는 아기를 낳고 나서 아기에게만 집중하기 위해 2~3년 동안 휴직이나 휴학을 하는 엄마(혹은 아빠)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두 번째로, 이 시기 아기들은 말로 소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으로 소통을 해 줘야 한다. 몸을 통해 사랑, 안전, 평화, 존중 등을 아기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 접촉이다. 쉽게 말하면, 할 수만 있는 대로 자주, 많이, 그리고 오래 아기를 안아주고 만져주어야 한다. 늘 안아주고 업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잘 때도 안고 자고… 이것은 안정적 애착 형성에 필수 요소이다. 종종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손탄다”거나, 엄마가 힘들다거나, 심지어는 버릇 나빠진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면서 아기를 안아주는 데 인색한 부모를 만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친다. 그리고 그 아기의 불행이 안쓰러워 마음이 먹먹해진다. 물론 아기를 자주 안아주면 아기는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더 안아달라고 보챈다. 소위 “손 타게” 된다. 엄마는 자주 안아줄 수밖에 없으므로 허리도 아프고 팔이나 손목도 아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래 봐야 3년이다. 충분히 안아서 키운 아이는 3년이 되면 더이상 안아주려 해도 안기지 않고 세상 다양한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뛰쳐 나간다. 이것이 안정 애착이다. 반대로 안아주기에 인색한 부모에게 자란 아이는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게서 떨어지길 힘들어하고 늘 애정표현에 목말라 하고 세상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한다. 어차피 부모가 되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연속이다. 그걸 각오하고 부모가 되어야 한다. 낳아 놓기만 하면 아이들이 알아서 크는 게 아니다. 부모의 헌신과 희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 바로 만 3년까지 아기를 안아주느라 몸 여기저기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아이가 인간관계가 편안하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란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아기를 “손타게” 키우는 부모가 아기에게 안정적인 애착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세 번째로, 만 3년 동안은 아기에게 늘 주의하면서 아기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채워줘야 한다. 아기가 울 때 그냥 울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왜 우는지 확인하고 배고프면 우유를 주고 기저귀가 젖었으면 갈아주고 졸리면 재우고 추우면 따뜻하게 해 줘야 한다. 부모가 다른 것에 골몰하느라 아기가 울어도 바로바로 반응해 주지 않으면 애착 형성에 문제가 된다. 그리고 아이에게 반응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따뜻함과 친절함이다. 아기는 자기를 바라보고 대하는 부모에게서 따뜻함과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접촉은 부드럽게, 표정은 미소로, 그리고 사랑 가득한 태도를 유지해야지, 짜증내고 우울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아기에게 반응하면 아기의 애착 형성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리하면, 아이에게 안정적인 애착 유형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엄마(나 아빠)는 아기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늘 안아주고,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아기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줘야 한다.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십년, 이십 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길어 봐야 3년이다. 이 3년의 헌신과 희생은 아이의 삶을 180도 다르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아이가 평생동안 행복하길 원하면 많은 돈보다 안정적 애착을 선물로 주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선택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Read More
  • 40
    [오피니언] 주성철 목사의 기독교와 법 - 학생들의 종교자유와 정부 크리스천헤럴드2022.07.12
     학생들이 지닌 종교자유의 권리와 정부의 압력과 관련해서 3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매사추세츠의 한 교육국에서 교회와 관련된 사립학교 개원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발견하고 태평양법률협회의 도움을 청해 온 일이다. 교회와 관련된 사립학교에서는 성경적 가치관을 존중하고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과목을 포함시켰다. 이것을 트집 잡아 교육국이 사립학교 개원을 거부한 것이다.학교의 설립목적은 기독교 가치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과목 중에 성경과 관련된 과목들과 기독교 윤리와 도덕에 대한 포함시켰다. 학교는 비다리얼교회(Vida Real Church)라는 교회의 후원을 받고 세워진 사립학교다. 교회가 자녀들의 교육에 앞장 설 것을 우선으로 설립한 것이었다. 세상 교육, 즉 공립학교 교육이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너무 사악하기에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 교육에 부모가 앞장서겠다는 의도였다. 좋은 소식은 이런 극 진보주의적 사상에 맞서 싸운 학부모들이 법원에서 승리했다.두 번째는 서부 아이다호 대학에서 세 명의 기독교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불법으로 처벌한 일이다. 학생들이 주장한 것은 전통적 결혼관과 성적인 윤리와 도덕이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 대학측은 기독교 학생들을 처벌했다. 불법이다. 세 학생들은 학교에서 있는 LGBT 행사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나누고자 했다. 이것도 역시 자신들이 원한 것이 아니고 LGBT준비위원회에서 이들을 초청해서 전통 결혼관에 대한 견해를 듣자고 제의한 것에 응한 것뿐이었다. 학교측은 어이없게 전통 결혼관이나 크리스천의 윤리와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것과 논의하는 것, 하물며 그에 대해 문의하는 것도 막아 버렸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집회를 방해한 것도 아닌데, 학생들을 처벌해 내려 캠퍼스에서 정당한 신앙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협회는 학생들의 권리, 즉 언론의 자유, 언론 표현의 자유, 종교자유에 대한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학교측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에서 보장한 당연한 권리를 찾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세 번째는 매사추세츠의 한 시 정부가 프로라이프 응급실을 폐쇄한 이야기다. 매사추세츠 섬머빌 시의회는 프로라이프 응급실에서 낙태수술과 피임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급실을 닫게 했다. 이것을 말도 안 되는 일이다.임신모들은 자신들의 건강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프로라이프 응급실을 찾는다. 그런데 낙태수술 정보와 피임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료소를 폐쇄한다?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프로라이프 응급실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료 진료소다. 그런 의미에서 따져보면 이곳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도 깨어 일어날 때가 됐다. 공립학교 교육을 위시해서, 시정부, 주정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들이 만드는 법안들이 과연 삶에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심각하게 봐야 한다. 우리가 지켜온 가치의 상식에 어긋나고 자녀들의 올바른 교육에 해가 되는 것이 보인다면 이제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주성철 목사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디렉터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