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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목사의 교수칼럼 - 우리가 붙잡을 것 –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어린 시절 학교 운동회에 달리기 시합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별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해서 특별한 좋은 추억은 없지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장면이 생각난다. 저학년 어린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선생님이 신호를 보내면 결승선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한다. 부모님들은 옆에서 열심히 소리치고 응원을 한다. 그런데 이따끔 어떤 아이는 결승선 목표를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하게 엄마가 있는 곳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아무리 앞을 향해 달리라고 손짓하며 소리쳐도 아이는 엄마에게 열심히 달려간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군중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달리기는 잘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데 잘못 달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열심도 있고 능력도 뛰어난데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달려야 할 방향이 무엇일까? 빌립보서 3장 7절~14절에 나온 사도바울의 권고 속에는 ‘영적 지도력의 비밀’이 들어있다.첫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다. 3장 8절을 보면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지 말고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레오날드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렸다. 역사상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런데 다빈치가 처음 그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께서 만찬 중 사용한 주전자를 은주전자로 아름답게 그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고서는 다 “와 주전자, 참 멋있다. 나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주전자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빈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아, 내가 그림을 잘못 그렸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신데 엉뚱하게 사람들이 주전자에 관심을 다 빼앗기니 이는 실패작이다”하고 하고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한다. 개인적 신앙생활에서 또 영적 지도자로서 자주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삶에서 관심을 받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삶의 관심이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엉뚱하게 주전자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거나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중에 엉뚱하게 주님이 받아야 할 관심을 다 빼앗아버리는 은 주전자가 있는지 살피자. 만일 있다면 다빈치처럼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한다. 달려가야 할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삶의 중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여기에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말이 때로는 편협한 축소주의적인 (Reductionism) 신앙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만을 말하면서 다른 부분들을 외면하는 신앙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란 그런 편협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의 편중이나 편협을 경계해야 한다. 진정으로 신앙의 중심이 잡혀있는 사람은 유연성이 있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풍성하게 살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다. 우리 삶의 중심이 분명히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 삶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거나,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포괄적인 모든 부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나간다는 것이다. 즉, 중심이 분명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둘째 우리가 달려야 하는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그다음 나는 놈 위에 붙어다니는 놈이 있다”고 했다. 맞다. 신앙생활은 뛰는 것도 나는 것도 아니라 붙어다니는 것이다. “예수님께 붇잡힌바 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은혜를 붙잡는 삶’이라고 생각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는 것이다. 개인 신앙 여정에서 또 영적 지도력에서 처음에 은혜로 시작했다가 나의 의나 노력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에서 시작은 하지만 종국에는 지혜와 노력과 의로 채우려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은혜를 붙잡지 못하고 나의 의와 노력을 의지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나의 의와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는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조급함과 정죄함에서 잘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조급해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타인의 부족함에 대해 정죄하고 분노한다. 우리는 죄인이고 구원받는 것은 100% 은혜로 인한 것이다. 나의 의가 1%도 가미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 삶 가운데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영화스러운 존재로 설 수 있는 것도 100%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서도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지도력도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작은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그리스도의 은혜’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고 삶을 향하여 아름다운 계획과 그림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친히 이루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오늘 본문 말씀을 전한 사도바울도 아마 자기의 의와 자기의 계획과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일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 것 같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두셨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가시 때문에 그는 큰 비밀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어깨에 힘을 빼라고 하신 것. 그 가시 때문에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배웠다. 가시 때문에 힘을 빼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로 아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지도력의 핵심이었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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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셉 목사의 카톡큐티 -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 크리스천헤럴드2022.05.24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분깃(상속될 유산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그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였고 걷잡을 수 없는 방탕으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까지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에게 궁핍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궁핍은 그에게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였고 아버지의 집이 참 풍족하며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고 탄식합니다.(17절)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즉 방탕의 결과로 ‘궁핍’이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떠나 비참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궁핍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 그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겸손히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참된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변화와 함께 하나님께로 적극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아버지는 둘째가 떠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네 입구를 바라보면서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굶주려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형색을 한 그를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삐뚤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게 되는데 그 입맞춤은 아버지의 기쁨을 말해주며 또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그리고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큰 영광을 주는 것으로 아들로서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입니다.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아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을 신게 합니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환락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물질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며 사는 삶을 주님께서는 ‘죽었다’고 정의하십니다. 사람들은 성공, 행복, 사랑을 성취하게 될 때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 둘째 아들이 나가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 삶은 죽은 삶이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이야기의 핵심은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 즉 구원의 마음 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물질을 잃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이지만 오직 자신에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한 없는 사랑을 가지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버지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여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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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희민목사 지상설교 - 부활의 승리 (1)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들이라면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자신의 설교에 담기기 마련이다.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부활절기를 지나는 한인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부활의 승리’라는 제목의 설교 중 첫 번째다. (편집자 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 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진수이다. 그중에도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요 극치다.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서양격언에 ‘마지막 웃는 자가 참으로 웃는자’라는 말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끝장나고 패배한 듯 보였다. 그래서 심지어 제자들도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져 옛날 일터로 돌아갔다. 로마 군병들과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부활의 아침과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선이 악을, 진리가 비진리를, 사랑이 미움을, 생명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가장 큰 소망과 힘과 용기를 주었다. 부활절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누릴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부활의 신앙과 정신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기독교의 생명력은 빈 무덤에 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 나셨다(He is not here. He is risen)”라는 메시지에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고난, 시험, 두려움, 문제, 질병, 죽음 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군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다.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부활주일 아침에 어린이들에게 부활주일에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무엇이냐? 물었더나 한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놀라움(Surprise)이라고 엉뚱한 답을 했다. 그렇지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가장 Surprise(놀라운) 사건이다. 영국의 젊은 저널리스트 프랭크린 모리슨은 무신론자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책들과 역사자료를 수집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오히려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됐다. 예수의 구주 되심과 부활을 변호하는 책을 쓰게 됐다 그 책이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다. 그가 감동받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으며 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다는 사실이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목베임을 당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칼로 순교를 했으며, 누가는 그리스에서 교수형을 당했으며, 마가는 애굽 알렉산드리아에서 말에 끌려 다니다가 순교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예수의 동생 유다는 화살에 맞아 순교했다, 세상에 거짓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명 속에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사도행장 16장에 보면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1차 선교여행 때 갔던 소아시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성령이 그 길을 가로막아 하는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다가 밤에 한 마케도니아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 복음을 전하게 시작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이 장면을 해석하면서 이때 바울을 태운 배에는 새로운 유럽을 싣고 갔다고 설명했다. 사실 복음이 들어감으로 그 후 야만적인 해적들이 변하여 지난 2천 년 간 문명국가로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게 됐다.이런 맥락에서 1620년 11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새로운 미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 땅 제물포에 손을 잡고 동시에 발을 디뎠던 것은 바로 새로운 한국을 싣고 온 사건이었다. 이처럼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되어 왔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얼마나 큰 축복을 그 땅으로 이끌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맣은 현대인들은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덤에 앞에서 슬피 울며 살아간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슬피 울었을까?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을 목격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부활이 더 믿어 지지가 않았다. 마리아는 사건의 일부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다. 그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인간 대부분의 슬픔과 눈물, 좌절과 절망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네 믿음의 눈을 떠서 그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바라보라는 음성이 담겨있는 것이다.어거스틴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일화가있다. 어느날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길을 잃고 많이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늦어 강연장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못하게 되어 자존심도 상하고 많이 침울해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거스틴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는 그룹에서 자객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어거스틴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내 계획, 내 뜻대로 안 되었다고 안타까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그것이 내가 오히려 사는 길이였고 은혜의 길이였고 축복받는 길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발을 구르며 초조했던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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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요한목사 컬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수전절은 유대인들이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더럽혀졌던 성전을 되찾아서 다시 하나님께 바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모세 율법을 통해 정해진 절기는 아니었지만, 마카비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지켜지는 명절입니다. 마카비서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수전절을 8일 동안 초막절과 같이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하면서 많은 제물을 드리고, 악기를 동원하여 특히 시편 113-118의 할렐루야 시편으로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화환과 종려나무 가지를 앞세워 행진을 벌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예수께서 수전절에 성전 솔로몬 행각에 계셨습니다. 그당시 유대 사회는 마카비 가문이 예루살렘을 정복자의 손에서 되찾은 것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언제 오셔서 로마제국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냐? 하는 것이 이들의 화두였고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유대사회에 기대를 불러 일어키고 있는 예수께서 성전에 오신 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와 거칠게 질문공세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분명히 밝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바로 이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미 하신 그의 말씀들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충분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충분히 표적도 보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이었습니다.그리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러 그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들은  그의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 듣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서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가 되십니다. 그러자 분노한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 선지자로 생각하여 “거짓 선지자를 돌로 치라”는 성경 말씀(신 13:5)에 의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러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완강한 불신앙을 지적하시면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행하신 선한 일들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팍하여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선한 일들이 진리에 근거한 여부는 알아 보지 않고 먼저 정죄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과 편견과 시기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계속 증거를 요구하다 결국 죄인으로 낙인찍어 십자가형으로 내 몰았던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이 원하던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성한 부국을 이루고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선망하고 굴복하는 것이 메시야 왕국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군중들 앞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을 대항하여 씨울 것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척결하고자 하신 것은 위선 되고 형식화된 유대인들의 종교였고 탐욕스런 지도자들이었고 부패한 개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영원한 구원을 주실 것이기에 믿고 따릅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 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부활하셔서 참된 그리스도가 되심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수전절을 명절을 맞이한 유대인들은 무너진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승리를 쟁취한 선조들의 충성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우리의 삶을 충성된 증인으로 드릴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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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교수 컬럼 "하나님에게 없는 것 한 가지"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나를 부르셔서 이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걸까?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아무런 능력 없는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분의 일을 이루신다. 특히 상담의 장면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로 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사는 상담보다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일주일 동안 내담자를 생각하고, 내담자를 위해 중보기도를 쉬지 않는다. 내담자의 상황과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상담 시간에 내담자를 만나면 하나님께서는 상담사에게 할 말을 입에 넣어 주시기도 하고 상담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놀라운 것은, 상담사의 말 몇 마디에 내담자가 크게 감동하거나 무언가를 깨닫기도 한다. 또 일주일 사이에 내담자의 마음이 놀랍게도 평안해지고 고통이 경감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담자에게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감이 새롭게 차오르고,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해 볼 수 있는 용기도 생긴다. 심지어 내담자 주변의 상황과 주변 사람들까지 극적으로 변화되어 상담 시간에 할렐루야를 외치게 되는 경우도 많다.이런 일을 겪고 나면 상담사는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나를 부르셔서 이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걸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인 상담 실습생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생기는 것을 본다. 그럴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에게 없는 것 한 가지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있는데, 딱 한 가지 하나님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게 있다. 그것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그건 바로 몸이다. 이 천 년 전 잠시 하나님도 우리처럼 몸을 가지셨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생애 이후 주님은 이제 더이상은 몸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으신다.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도 주님은 많은 일을 이루신다. 하지만 몸을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아파하는 그분의 자녀들 옆에 다가가서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실 수 없다. 연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친절한 눈빛으로 자녀들을 바라보실 수 없다. 힘들어하는 자녀들의 손을 잡고 힘있게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실 수 없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그들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 주실 수가 없다. 물론 하나님은 다 하실 것이다. 문제는 우둔한 자녀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그러기에 주님은 몸을 가진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사는 주님의 몸이 된다. 그래서 주님이 마음 아파하는 그 사람 옆에 함께 시간을 보내줄 수 있고, 주님의 사랑을 말해 줄 수 있다.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고 그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시선을 전해줄 수 있다. 그에게 필요한 말을 그의 귀에 들릴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치유와 회복의 능력은 주님에게 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실 수 있게 우리가 가진 것을 드리면 된다. 주님의 사랑 전달자가 되어 주면 된다. 그러면 모든 변화는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자의 역할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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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목사 컬럼 “소통은 중심 잡기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교회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은 울고 있는 형제자매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빈 무덤 신학’을 확립해야 한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빈 무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각오하고 결단해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말 연초에 새로운 소망을 품는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면 국민들이 살기 좋은 더 좋은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소망을 풀어줄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를 하고 그 결과 정권이 바뀌기도 한다. 자녀를 낳으면 자녀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품기도 하고 새로운 직장과 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결혼을 하여 새 가정을 꾸렸을 때에도 소망을 품는다.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제목을 작성하고 교회에 제출하여 목사님이 기도해주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이 세상 사람들이 품는 소망과 무엇이 다를까. 더 채움 받고 더 쌓아 두고 더 풍요롭기를 원하는 소망을 기도하는 것 아닌가. 교회도 이런 소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좋은 건물이 있고 많은 교인들이 있고 훌륭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도무지 그 갈증이 없어지지 않는 광야를 가는 사람들처럼 계속 더 원하고 원한다.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그 증거가 바로 빈 무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은 빈 무덤이다. 빈 무덤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얻게 되는 결과이다. 죽음 없이 빈 무덤이 있을 수 없다.바울은 그 빈 무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고백하고 선포하였다.(로마서 1장 16절) 역설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조차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였다.  빈 무덤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빈 무덤을 믿고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자랑을 할 수 있었다. 빈 무덤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이 어느 민족 어느 인종이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을 알려면 더 많이 가진 것 더 많이 쌓아 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에서 시작해야 한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닌 더 비워져야 한다. 더 채움 받으려 할 때 유혹이 있다. 그 유혹이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다.코로나가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좋은 영상과 음향 기기를 준비하고 더 나은 시설을 위하여 교회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어려운 교회들과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인도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이면 교회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 보다 더 크게 채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설교 강단에서 항상 선포되는 설교 주요 주제가 아닌가. 교회는 적어도 선포된 설교만큼 살아야 한다.교회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은 울고 있는 형제자매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빈 무덤 신학’을 확립해야 한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빈 무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각오하고 결단해야 한다. 부활의 절기를 보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적용해야 한다.그래서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주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면 주님이 역사하신다. 교회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주님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눈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 살펴야 한다. kim0409@gmail.com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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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희민 목사 지상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2)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제목의 설교 두 번째다. (편집자 주) 눈먼 사람을 데리고 왔다사람들이 눈 멀어 보면 그 불편하고 비참 함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길을 가다 잠시 눈을 감고 백 미터만 걸어보자.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 인가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눈먼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 앞에 나오고 그를 만나면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된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잠재력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잃어버린 삶의 이상과 비전을 되찾았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삶을 살며 방황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참된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죄된 생활을 청산하고 인류역사에 빛나는 훌륭한 영적 리더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감동을 주고 변화시키는 영향을 미쳤다.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이 우리 삶도 만져주셔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만져주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은 한 번에 완전히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왜 두 번이나 안수를 했을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보면 이곳에서만 두 번 안수를 해 주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단번에 주님을 밝히 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이웃과 세상을 밝히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양육 받고 훈련을 받으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3: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오직 앞에 있는 표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했다.“다시안수 했을 때, 그가 주목하여 보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했다.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더욱 깊이지고 깊은 진리의 말씀과 은혜 안에 잠기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믈을 던져라고 하셨다. 그가 순종했을 때 그믈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떠서 진리의 세계를,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인생과 사물의 외모만 보지 아니하고 그 중심과 핵심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남으로 믿음의 눈이 뜨여질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된다. 피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의 외모나 소유나 지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과 그의 잠재력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 속에 있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없는 생명을 바라보게 된다.신령한 눈이 뜨이고 밝아질 때 자기 경험을 중요시 하거나 자기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며 아름답게 보인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새 눈이 뜨여졌다.사물과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안이 뜨여져야 한다. 영안이 띄여지게 될 때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역사관이 달라진다. 삶의 이상과 비전이 달라진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을 보면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했다.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동과 삶이 달라지게 된다. 새로운 자아상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오늘 분문 뒤에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자 베드로가 그리하시지 말라고 애원하자,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거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은 떴지만 영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냐? 사람들의 눈을 말씀으로 뜨게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히려 눈을 멀게 하는 일을 할 때도 많다.H.G.웰스(H.G.Wells)라는 작가가 쓴 ‘The Country of the Blind(시각장애인들의 나라)’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높은 곳을 팀과 함께 탐험하다가 혼자서 절벽으로 떨어진다. 다행히 눈 쌓인 절벽이라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아래 마을은 전설의 마을이었는데 앞을 못보는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었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I can see.”라고 말한다. 이곳 주민들은 “see?” 처음 듣는 말이다. 결국 이 사람은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 된다. 그리고 바위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덜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말도 더듬는다고 생각하면서 한마디로 개발이 덜 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란다. 그래서 손을 꼭 붙잡고 안내를 한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를 하고 있다. 길을 가면서 주인공은 말한다. “I can see it(나는 볼 수 있다).” 이에 답변한다. “There is no such word as see(볼 수 있다는 말은 없어).이렇게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그곳의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다. 청원했는데 부모는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 보낸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러면 이 어리석은 자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는데 그곳 의사가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낸다. 주인공의 두뇌가 병이 들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데, 두뇌가 이처럼 개발이 안 된 이유를 찾았다고 한다. 두뇌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눈이 문제라고 말한다.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두뇌에 손상이 왔다는 것이다. 이 눈을 빼어내면 두뇌도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딸을 시집보내도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한다. 주인공은 수술하는 날 아침 자신의 눈이 없어지는 날 아침 탈출한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소설이다. 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있다. 눈을 빼야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나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을 보면서 살아간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자라는 편견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이솝우화에도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한 눈 가진 원숭이가 사는 마을에 가서 완전히 바보 취급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디. 영안이 먼 사람들은 오히려 영안이 뜨인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을 할 때가 있다. 오늘날 교회도 눈먼 사람들이 판치니까 눈뜬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취급 받을 때 많다.그럼 왜 눈이 멀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주님처럼 영안을 떠서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우리의 죄와 욕심, 이기심과 정욕 때문이다. 이 설교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영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며, 이웃과 세상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의 장애인은 눈을 떠서 무엇을 보기를 원했을까?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실존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하셨으며 세상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 삶의 뚜렷한 소명과 사명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 우리가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가까운 집으로 가서 우리 가정 안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이다. 우리 가정과 친척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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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강제 정책, 낙태, 성교육, 실종되어 가는 ‘자유’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이런 식으로 정부가 강요한다고 하면 백신 접종 이외에 다른 이슈도 연방정부가 개인 사생활을 물론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삶까지 간섭하게 된다는 결론이다백신과 관련한 논쟁은 끝이 나지 않았을 때다. 백신에 대한 찬반이 팽팽하게 맞설 때, 인디애나 주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태평양법률협회는 인디애나주에 있는 여러명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강제로 백신접종을 반대하는 일을 도왔다. 이들은 종교적 차원에서 반대하고 있었다. 협회는 이들을 도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인디애나주에서 일반인도 아니고 의료인들이 접종을 거부하고 나선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백신에 대한 부작용 때문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백신접종을 거부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의료인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나선다는 것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봐야한다. 협회에서 주장하는 것은 병원 자체가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강제 접종을 요구한다는 것이 미국 헌법을 위배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강제접종 정책은 위헌이라는 말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정부가 강요한다고 하면 백신 접종 이외에 다른 이슈도 연방정부가 개인 사생활을 물론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삶까지 간섭하게 된다는 결론이다. 또 하나의 이슈는 낙태와 관련된 소식이다. 연방 대법원에서는 낙태와 관련해서 돕스(Dobbs) 대 잭슨 여성 건강 단체(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의 법원 소송을 검토중이다. 미국 미시시피주의 낙태 법안과 관련해서 낙태를 15주 안에만 허용하는 것인데, 미시시피주는 임신 15주 이후에는 낙태를 할 수 없는 법안을 대법원에서 심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통과된다면 지난 수 십 년 동안, 적어도 거의 반세기 전에 합법화된 로대 웨이드(Roe v. Wade)에 치명적인 도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보주의에서는 내일 당장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산모가 원하면 얼마든지 낙태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 법이 통과되면 진보적인 낙태정책에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힐 것아다. 미국 남부 지역의 주들 가운데는 ‘심장 박동 법안’ 즉 여성이 6주만 되면 임신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서 ‘심장 박동 법안’을 통과시킨 일이 있다. 물론 이것은 연방정부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심장 박동 법안’을 지지하는 주에서는 임신 6주 이후에는 낙태를 할 수 없어 인근 다른 주에 가서 낙태수술을 하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임기구나 피임하는 것 자체도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윤리 문제에 찬반이 심했다, 그것보다도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태아의 심장이 뛰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를 생각하고 시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떠나서 사회적 윤리에도 큰 문제가 된다. 때문에 낙태 시술에 대한 기본적 교육을 우리 자녀들에게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립학교에서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의 허락을 받고 낙태를 해야 하는데 공립학교에서는 가족계획연맹 즉 Planned Parenthood와 같은 단체와 협약해서 부모의 허락없이 소녀들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또 공립학교에서는 Planned Parenthood와 협약해서 ‘성 교육’을 실시하는데, 이것은 윤리적 성교육에 중심을 둔 것인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고, 또한 의사나 간호사가 성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인용품상 주인들이 나서서 성교육을 실시하는 아주 치명적인 일들이 공립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한 마디 조언한다면 ‘공립학교 성교육 클래스에서 자녀들을 빼내자’는 것이다. 자녀들을 클래스에서 빼내려면 협회에서 준비한 Option Out Form을 작성해 학교에 제출하면 된다. 이렇게 해야 GPA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잘못된 성교육에서 보호할 수 있다.주성철 목사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담당   <!--[if !supportEmptyParas]-->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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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예수의 이름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초등학교 때 교통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교통이라는 글귀의 완장을 차고 거리에 나아가서 교통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학교 앞뿐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까지 가서 교통정리를 하고 오기도 했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멀리까지 교통정리를 하고 오는데 끝이 나면 차를 얻어타고서 학교로 와야 했다. 어렸지만 교통이라고 쓰인 완장을 들고 흔들면 큰 트럭이 와서 서고 태워주어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차를 타는 것이 귀한 시절이고 아주 기분 좋은 일인데 그 교통이라는 완장을 흔들어 큰 차를 세울 때면 아주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았다. 비록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학교와 경찰서에서 발급해 준 교통이라는 완장 때문에 트럭이 서서 태워준 것이다. 그 완장은 경찰서와 학교의 권위를 담고 있는 작은 표시였다.우리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손에 아주 귀한 완장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라는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예수라는 이름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소중한 것이다. 그까짓 교통 완장 하나 가지고도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하나님의 권세를 담고 있는 예수 이름은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 이름인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에 따라서 우리를 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존재이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귀한 신분을 회복해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선물을 주셨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하나님 나라와 권위를 누릴 수 있도록 그 귀한 이름 ‘예수’를 값없이 주셨다. 마치 시골의 꼬마 어린이가 교통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찰서와 학교의 권세를 누리듯 예수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요한복음 16:23-24절은 이 점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귀한 이름 예수를 주신 것은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이름 예수를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삶은 충만한 삶이다. 생명과 사랑, 기쁨과 즐거움, 열매와 성취, 깊이와 의미,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충만한 삶을 우리에게 의도하셨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혹시 결핍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가? 삶의 문제로, 인생의 고난으로 지쳐있고 마음이 상해 있지는 않은가? 여기 우리 손에 귀한 이름이 주어져 있다. 두려움과 걱정이 지배하는 삶이 아닌 갈등과 소외에 눌려 사는 삶이 아닌 풍성한 삶, 기쁨의 삶, 생명의 삶이 예수 이름 안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좌절을 모두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우리의 꿈과 소망 그리고 우리의 바람을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그 이름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늘 나라의 권위를 담은 이름이다. 그 이름은 영원하신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많은 경우에 걱정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간다. 삶이 이런 것들로 찌들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삶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간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것을 미리 걱정한다.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들을 걱정한다. 걱정 때문에 걱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우리는 걱정이 아니라 평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인간은 죄악으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죄에 이끌려 다니고 살아가고, 죄의 마땅한 값을 받고 살아간. 그래서 정죄와 죽음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이렇게 살아 마땅하다는 정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께 우리의 죄악을 고하여 드리고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이고 화해이다. 예수의 이름 안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다. 삶의 환경들로 인하여 마음의 소망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는 안된다. 손에 쥐어진 예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꿈과 소망을 이루어주신다. 미리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선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이름을 통하여 충만하고 새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야한다. 그 이름을 누리고 전해야 한다.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한다. 그 이름이 어떤 종교지도자의 이름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 이름이 어떤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 때문인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이름은 참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권세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야 한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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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부활하신 예수님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신앙의 공동체로 출발 할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뿐만 우리의 몸의 부활도 믿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은 다른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이 묻힌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 때문에 시신이 대충 수습이 되었기에 제대로 마무리 하기 위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앞을 막아 두었던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의 시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훔쳐 갔을지 모른다고 근심하였습니다. 그 순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두 천사가 여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지금 다시 살아있는 자라는 말인데 그는 누구라는 말인가? 또 이는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면 왜 예수께서 죽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는 자는 초자연적 하늘의 생명으로 ‘살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 다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1:4)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막10:45) 그는 단순히 섬기는 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셔야 하는 필연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들 “그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자 새로운 부활 생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 그 부활의 생명의 실제를 경험하였습니다.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빈 무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천사를 통해 두 귀로 들었며 예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후 확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그래서 큰 기쁨으로 달려가 제자들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증인들의 말을 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또는 ‘의식이 희미해진 환자의 헛소리’처럼 여겼습니다. 맞는 반응입니다. 몸이 다시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다닌다는 이야기를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일어난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요일 1:1) 그리고 그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무덤에서 돌을 굴려냅니다. 지금 어떤 무덤이 우리를 가두고 있습니까?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어떤 죄나, 아니면 떨쳐낼 수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미래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우리를 가두어서 삶이 어둡고 쓸쓸합니까? 아니면 죽음이 두렵습니까?예수님은 부활 생명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억매이고 있는 모든 인생의 짐들을 굴려 버려 주셔서 삶을 자유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믿습니까? 그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믿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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