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공감적 경청의 실행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뉴스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공감적 경청의 실행

작성일 : 2023-12-29

페이지 정보

본문

잘 듣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

오래 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 학생분 중에서 연세가 좀 많으신 여자분이 있으셨는데 가끔 나의 사무실에 오셔서 대화를 나누고 가셨다. 한번은 오셔서 삶 가운데 힘든 것들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아들과 딸이 있는데 딸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잘 하는데 너무 힘들게 사니까 그것을 보는 것이 힘들고 또 아들은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것이 또 답답하여 힘들어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들어 드리려고 노력하였는데 계속 그 속에서 빠져나오시지 못하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등등 조언을 조금해 드렸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교수님도 이제 아이들 커보세요”라고 하면서 일어서시는 것이었다. 그때 “아차, 이 분이 그저 문제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인데 내가 분석하고 가르치려고 하였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내 말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들이었지만 그 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대화였다.

우리가 공감적 경청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실행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 같다. 우리가 상대방의 정서 상태를 듣어주고 공감해주기보다는 분석하고 가르치고 수정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혹을 떨치고 공감해주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제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몇가지 실제적인 방안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있다.  

첫째, 아주 간단한 공감적 경청의 방식으로는 “구나”의 법칙을 사용할 수 있다. 상대방이 자기의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그랬었구나”라는 간단한 말을 통하여 그분들의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공감적 경청을 하기위해서는 우리가 윤리적인 논리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당신이 무조건 옳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윤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그 느낌 자체가 옳다는 것이다. 모든 감정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있고 그 감정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우리가 반영적 경청 듣기를 실행할 수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상대방의 느낌과 반응을 내가 정리해서 반응해 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느낌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느낌의 원인까지도 이해해 주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이가 힘들어했다. 자기는 수학을 잘 못해서 큰일이라고 하면서 3학년에 올라가면 공부가 힘들텐데 하면서 짜증을 내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너는 충분히 똑똑하고 잘할거야, 걱정하지마, 그러면 지금 예습을 좀 해볼까” 등등 온갖 격려와 조언과 문제해결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짜증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학교에서 선생님은 그러지 않던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떻게 하던데?”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이 “네가 3학년 올라가서 공부가 힘들까봐 걱정이 되는 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순간 “아차”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얼른 “아, 선생님 말씀이 맞네. 네가 3학년 올라하고 공부할 것이 걱정되는구나”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자기의 어려움을 아빠가 비로서 이해해주니까 곧 얼굴이 밝아지고 조금 있다가는 오빠가 쓰던 3학년 책을 가져다가 공부한다고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감의 힘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관계와 지도력의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데이빗 옥스버그 (David Oxberg)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Being listened to is so close to being loved that most people cannot tell the difference.)”  다시말하면 사랑이라는 말과 경청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라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또 공동체 속에서 정말로 듣는 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사실 기독인으로써 좋은 관계와 공동체를 찾지만 찾지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싶어하지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말하려고 하지 들으려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섬김을 말하지만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들이 대화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기에 관계와 공동체를 통하여 도리어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한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경청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여도 경청하지 않고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 잘하는 훈련보다는 경청하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