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고난의 시간을 해석하는 법>
크리스천헤럴드2026.08.23
이민자의 삶에는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열심히 준비한 비자가 거절되고, 믿었던 직장을 잃고, 낯선 땅에서 건강이 무너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함께 신앙의 길을 걷던 배우자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애써 키운 자녀가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삶이 우리의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신앙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리고 이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민자들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역시 자신의 삶에서 이 질문과 끊임없이 마주했다. 그는 하나님의섭리를 책상 위에서만 논한 신학자가 아니라, 반복되는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것을 붙들고살아낸 사람이었다. 20 여 년을 섬긴 노샘프턴 교회에서 해임되어 스톡브리지라는 변방의선교지로 떠나야 했고, 사랑하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죽음을 자신의 집에서 지켜보아야했다. 이후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했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천연두 예방접종의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삶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에드워즈는 그 모든 굴곡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섭리를 끝까지 붙들었다.에드워즈의 섭리 신학(Theology of Providence)의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사건을, 크고 작은 것 하나도 예외 없이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향해 이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에게 섭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 친히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적극적인 통치였다. 고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의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깊이 작동하는 때였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삶을 함께 살펴보면, 고난을 바라보는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고난은 믿음을 연단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순수하게 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참된 신앙은 평안할 때의 감정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가 지속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고난은 우리가 붙들고 있던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목회지에서의 해임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품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에드워즈에게 고난은 단순히 견뎌야 할 불행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끄시는 섭리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해임된 사건은 그의 섭리 이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1750 년, 20 년 넘게 섬긴 교회에서 해임된 에드워즈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실패한 목회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 아픈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톡브리지라는 변방으로 옮겨간 뒤, 선교사로 사역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학을 더욱 깊이 다듬어 갔다. 바로 그 시기에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 『원죄론』(Original Sin),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등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이 집필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목회 인생의 가장 큰 좌절처럼 보였던 시간이 그의 신학적 사유가 가장 깊어지는 시간이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을 관통하는 섭리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눈에는 실패와 끝처럼 보이는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예상하지 못한 자리로 이끄시며, 그곳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열어 가신다. 그러므로 고난은 언제나 그 순간의 모습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닫힌 문이 내일 어떤 길을 여는지, 지금의 상실이 훗날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샘프턴의 해임이 스톡브리지라는 새로운 사명의 자리로 이어졌듯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고난의 자리도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시작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섭리 신학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바라보는 데에도 깊은 통찰을 준다. 이민의 삶에는 적지 않은 고난이 따른다.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낯섦, 고국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로는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외로움까지, 이민자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섭리 이해는 우리의 삶을 단순한 우연의 연속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지금 당장은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으로 현재의 자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가”라는 이민자의 질문은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자리에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라는 신앙의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의 고난은 선교적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성경에서도 낯선 땅으로 흩어지거나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는 장면을 반복해서 발견한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이방 땅의 노예가 되었지만, 훗날 그 고난의 자리가 가족과 민족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다. 다니엘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을 증언했고, 에스더 역시 타국의 왕궁에서 자신의 민족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했다. 그들에게 낯선 땅은 단순히 견뎌야 할 유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명의 자리가 되었다. 고난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난조차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드워즈의 섭리 신학은 먼저 상황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환경은 변하고 삶의 계획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주권은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고난 앞에서 단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만 묻기보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모든 고난의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며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 바로 그것이 고난을 통과하는 신앙의 중요한 자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혼자 지켜 내기 어렵다. 에드워즈 역시 고난의 시간을 홀로 지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아내 사라와 가족이 있었고, 스톡브리지에서는 새로운 공동체와 함께 삶과 사역을 이어 갔다. 바로 여기에 오늘 디아스포라 교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교회는 고난의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는 곳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함께 견디며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려 주는 공동체여야 한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짐을 지고, 상처 입은 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곁을 지켜 주는 공동체, 그것이 낯선 땅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선교적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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