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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우 칼럼 - 메가와 초격차보다 더 중요한 것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대한민국은 지금 '메가'와 '초격차'를 말한다. 초대형 투자, 초거대 기업,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모두가 더 크게,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외친다. 침체된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국민의 기대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진실을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성공은 규모가 아니라 방향에서 결정된다. 속도가 빠를수록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지난 5월, 카톨릭 교황 레오 14세는 인공지능 시대를 위한 첫 회칙 '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발표했다. 그는 "인류는 새로운 바벨탑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도시를 세울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 "인공지능은 소수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의 발전보다 인간의 가치가 먼저라는 선언이었다.이 메시지는 오늘 대한민국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메가'는 거대한 규모를 뜻한다. '초격차'는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 경쟁력이다. 모두 필요한 가치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성장의 착시에 빠질 수 있다. 숫자는 커질 수 있지만 행복은 작아질 수도 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공동체는 무너질 수도 있다.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남긴 아쉬움도 같은 교훈을 준다. 뛰어난 선수는 있었지만 이를 살리는 전략은 부족했고, 기대는 높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꿈은 필요하지만 꿈만으로 승리할 수는 없다. 철저한 준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결과가 따라온다.결국 다시 리더십이다. 진정한 리더는 속도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바로 세우는 사람이다. 윤리의 기준을 세우고, 성장의 열매를 함께 나누며, 강한 기업일수록 더 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이끄는 사람이다. 대기업은 세계를 향해 뛰되 중소기업과 지역경제를 함께 살려야 한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성장이다.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1933~ )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발전은 국민소득의 증가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1943~ )는 "성장의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두 경제학자는 한목소리로 경제의 크기보다 사람의 삶을 먼저 보라고 말한다.대한민국의 성장 역사도 이를 증명한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는 '수출 100억 달러'라는 꿈을 향해 함께 땀 흘렸다. 교육에 투자했고, 기술을 익혔으며, 기업가들은 세계시장에 도전했다. 정주영의 도전정신, 이병철의 인재 철학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소중한 자산이다.그러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겼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으며, 변화의 방향을 놓치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는 사실이다.오늘 세계가 K-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도 화려한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약자를 품고, 함께 울고 웃는 한국인의 정서가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화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의 품격에서 나온다.대한민국은 이제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메가 프로젝트도 필요하고 초격차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세워야 할 것은 윤리이며, 신뢰이며, 공동체의 가치다.더 겸손해야 한다. 더 성실해야 한다. 더 검소해야 한다. 더 많이 섬겨야 한다. 그리고 더 하나 되어야 한다.기술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품격만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초격차는 반도체가 아니라 사람이며, 규모가 아니라 품격이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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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 당신의 정신 건강, 안녕하십니까?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심각한 정신 질환 문제현대 사회에서 정신질환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중요한 건강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우울증, 불안장애, 조현병, 알코올 사용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사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24년에 조사한 우리나라의 정신질환 실태를 보면 10명 중에 3명 꼴(27.8%)로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년 유병률은 8.5%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치료를 받지 않거나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에도 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학업, 취업,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 등 여러 사회적 요인이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우울감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청소년과 청년층의 정신건강 문제도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도한 경쟁, 스마트폰과 SNS 사용 증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어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우리와 같이 사회적 고립이 심한 이른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약점으로 여기거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 쉽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와 불안이 지속되고 우울감이 심해질 수 있다. 개신교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비신자들보다는 댜소 적지만 개신교 신자들도 2명 가운데 한명 꼴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도 외로움 문제는 심각한 수준인 것이다. 또한 우울증은 종교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정신질환이다. 따라서 정신 질환 문제에 대해 바로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개신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최근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실시한 “개신교인의 우울 경험과 인식 조사” 결과를 통해 개신교인의 정신 질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조사에서는 개신교인(교회출석자)들 중에 3명 중 1명인 33%가 최근 1년 사이 2주 이상 연속적으로 우울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우울 증상이 시작된 계기는, ‘경제적 문제’(46%)를 가장 높게 꼽았으며, 이어 신체적‧환경적 취약성에 따른 ‘건강 문제’(36%), ‘가족 문제’(32%), ‘취업/직장/학업 스트레스’(31%)가 뒤를 이었다.이러한 내용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우울증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상당수의 기독교인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가족 갈등, 직장과 학업의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신앙적 돌봄과 함께 정신건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전문 상담과 의료적 치료를 연계하는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자들이 우울증을 숨기거나 신앙 부족으로만 여기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우울증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우울증 관련 오해’ 항목을 제시하였는데, 기독교인의 29%는 ‘우울증은 본인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매우 영적인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데도 28%가 동의했다. 기독교인 10명 중 3명은 우울증이라는 질환을 개인의 나약함과 영성 부족으로 치부하는 오해가 상당한 셈이다. 또한 ‘정신질환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은 대개 운에 달려있다’며 전문적 치료가 아닌 운에 기대는 비율도 19%였다. 특히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 항목 모두에서 전체 평균을 웃도는 동의율을 보여서, 스스로를 ‘신앙이 없고 유약한 존재’로 자책하는 등 부정적 자기인식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결과는 우울증 자체의 증상인 자기 비난과 낮은 자존감이 종교 신념과 결합될 경우 더욱 심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또한 기독교인(교회출석자)의 43%는 ‘목회자가 우울증에 걸리면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인식에 동의해, 우울증 같은 목회자의 정신질환이 목회자들에게 도덕적/신앙적 부담감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전체 기독교인의 29%는 ‘우울증 성도에 대한 교회 내 부정적·차별적 시선이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의 경우 이 비율을 37%로 더 높게 체감하고 있어, 실제 정서적 아픔을 겪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음이 확인됐다.이 결과는 교회가 사랑과 돌봄을 강조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편견과 낙인이 일부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실제로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해받기보다 소외되거나 판단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우울증을 악화시키거나 상담과 치료를 받는 데 장애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우울증을 신앙 부족이나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 치료와 돌봄이 필요한 정신건강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편견 없이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전문적인 상담과 의료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안전하고 지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정신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이 조사에서는, 우울할 때 정서적 지지를 받는 대상으로는 우울 증상 여부와 관계없이 ‘가족’이 가장 높았다. 다만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의 우울 증상이 없는 집단과 비교해 ‘가족’을 꼽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친구’나 ‘교회 성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이 눈에 띄었다. 특히 소그룹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35%) ‘참여하지 않는 그룹’(15%) 대비 우울 경험 시 ‘교회 성도’를 의지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 점이 특징적이다.그리고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우울 증상이 지속되었을 때 34%는 목회자나 주위 성도 등 교회의 도움을 기대한 경험이 있었다고 응답했다. 특히,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는 그룹(27%)보다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경우(64%)에 교회에 도움을 기대한 경험이 훨씬 높았다. 평소 소그룹을 통해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한 성도일수록, 위기 상황에서 교회를 기꺼이 의지할 만한 안전한 울타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것은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가족만으로는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자신의 어려움을 가족보다 가까운 신앙 공동체나 친구에게 더 편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소그룹 활동을 통해 형성된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실제적인 정서적 지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울 증상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우울감이 지속될 때 정기적으로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교회에 도움을 기대하는 비율이 두 배 이상 높았다. 이는 평소 소그룹에서 신뢰와 친밀감을 쌓은 사람일수록 위기 상황에서도 교회를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공동체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결국, 교회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공간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될 때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소그룹은 우울감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고 정서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코로나 사태 당시에 소그룹 참여자들이 코로나 블루의 경험이 낮은 데서도 확인된 바 있다. 따라서 교회가 소그룹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구성원들이 편견 없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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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부흥에서 선교로 대각성 운동이 제시하는 디아스포라 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미주 한인 교회에서 ‘부흥’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무게를 가진다. 뜨거운 찬양, 눈물의 기도,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집회, 이런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은 진실하고 귀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부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부흥이 교회 안의 뜨거움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에드워즈가 말한 참된 부흥과 거리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주도한 18 세기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나 종교적 열기가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부흥을 ‘하나님의 영광이 확장되는 운동’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확장은 반드시 교회 밖, 세계를 향한 선교적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부흥과 선교는 그에게 동전의 양면이었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참된 증거를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그의 저작 『성령의 역사를 분별함』(The DisA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그는 감정의 강렬함이나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죄를 거슬러 싸우는가, 성경을 사랑하는가, 건전한 교리를 따르는가,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자라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마지막 기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선교적 행동과 직결된다. 참된 부흥은 안으로 불타오르는 동시에 밖을 향해 흘러야 한다.  실제로 대각성 운동은 선교적 열매를 맺었다. 부흥의 불길이 뉴잉글랜드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간 후, 교회는 안으로 뜨거워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인디언 부족을 향해 나아갔고, 에드워즈 자신이 스톡브리지 선교지로 떠났다. 부흥은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에너지가 되었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부흥의 방향성이다. 안으로 모이는 원심력이 아니라, 밖을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이었다.  에드워즈는 또한 부흥을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으로 보았다. 그의 저작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Aon)에서 그는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선교의 이야기로 해석했다. 부흥은 그 큰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역사의 물결이다. 따라서 부흥을 경험한 교회는 반드시 그 물결을 타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부흥의 감격이 교회 안에서만 소비될 때, 그것은 에드워즈의 신학으로 보면 반쪽짜리 부흥에 불과하다.  에드워즈는 특별히 『기도합주회』(원제: An Humble A*empt, 1747)에서 전 세계 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어느 한 교회의 부흥이 전 세계 선교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작은 기도 모임이 세계 선교 운동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이 확신은, 훗날 윌리엄 캐리의 현대 선교 운동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한 지역의 부흥이 전 세계적 선교로 연결되는 이 흐름을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했다.  이 관점에서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바라보면 흥미로운 통찰이 열린다. 디아스포라 교회는 구조적으로 이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우리는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 이민자 세대와 현지 세대, 동양적 영성과 서구적 신학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경계선은 약점처럼 보이지만,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으로 보면 오히려 강력한 선교적 자원이다. 경계선 위에 선 자만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 교회가 추구해야 할 부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에드워즈의 대답은 명확하다.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갈망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 갈망이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삶의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부흥의 씨앗이 심겨진다. 그리고 그 씨앗은 반드시 교회 밖을 향해 자라야 한다. 이웃을 향한 섬김, 지역 사회와의 연대, 그리고 세계 선교를 향한 구체적인 헌신으로 이어질 때 부흥은 비로소 완성된다.  미주 한인 교회는 이 점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우리 교회는 한인 공동체를 섬기는 동시에, 미국 사회 안의 다양한 문화권과 접촉하고 있다. 스페인어권 이민자들, 아시아계 다른 민족들, 미국 주류 사회의 이웃들이 모든 접촉면이 잠재적 선교 현장이다. 에드워즈가 말한 부흥의 선교적 방향성을 붙든다면, 디아스포라 교회는 단지 한인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열방을 섬기는 선교적 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 자신도 노샘프턴 교회에서 수년간의 신실한 목회 끝에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부흥은 인간이 기획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그러나 그 은혜는 준비된 공동체 위에 임한다. 말씀과 기도로 깊어진 교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공동체, 세상을 향한 마음이 열린 신자들, 이것이 부흥을 준비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18 세기 뉴잉글랜드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붙든 질문은 동일하다. “이 부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 그리고 부흥의 방향을 교회 안에서 세계를 향해 돌려놓는 것, 그것이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하는 전략이다.  디아스포라 교회의 부흥 전략은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대형 집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소수의 기도에서, 말씀 앞에서 무릎 꿇는 공동체에서, 그리고 이웃을 향해 문을 여는 작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에드워즈의 대각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한 시대의 선교 역사를 바꾸었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부흥을 꿈꾼다면, 그 꿈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부흥은 교회의 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부흥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보내기 위한 것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에 부흥이 선교를 낳았듯, 오늘 우리의 부흥도 반드시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  참된 부흥은 교회를 흔들고, 그 흔들림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대각성 운동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오늘 디아스포라 교회 안에서도 그 증명은 계속될 수 있다. 부흥에서 선교로, 이것이 에드워즈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교회 전략이다. 부흥은 교회 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된 부흥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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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상처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당신들은 나클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윤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창세기 50장 20절인생의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느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먼저 고개 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마침내 보복으로 돌아올까 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 앞에서 심판자의 자리에 않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한마디는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용서는 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내 존으로 끝까지 같아 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공의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의 악한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더 깊고 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용서는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과 그 자녀를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간곡히 위로했습니다이은혜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통해 우리를 살리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은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보본이지 않아도 통치하시고. 늦어 보여도 선으로 빛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분노를 십자가 않에 내려놓읍시다 주님은 상처를 별로, 눈물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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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1 오늘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입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나 전쟁의 위협 속에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29)입니다. 이런 아들의 불평을 달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3 큰 아들은 아버지집에서 살았지만 자녀로 살지 않고 종으로 살았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 보상을 바라며 동생을 정죄하고 비판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설득하시고 타일러 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4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감동을 받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죄를 지적당하면 시험에 들기까지 합니다. 치리와 징계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녀의 특권을 실제로 얼마나 누리며 사는지 돌아볼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알아가기를 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약속하신 것을 매우 소중히 여겨 태어나서도 장자의 명분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 한 야곱의 생애를 묵상하며 나에게도 약속한 말씀 붙잡고 나 아갈 것을 다짐 하며 감사드립니다.7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목적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 된 것처럼 우리 인간도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죽으신 은혜를 생각할수록 감히 하나님과 하나 됨의 축복을 어찌 다 실감할 수 있으리오? 기쁨이 넘칠 수 있게 하심이 감사합니다.8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간판아래 나의 욕망을 채우기 쉽습니다. 나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요, 우리는 구원 얻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9 어떤 사역 중에도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우선순위로 하고 복음 전파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사역에 임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해외 여러 나라로 부름 받아 복음 위해 나아간 사모님들을 섬길 때마다 각 나라 언어로 문회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는 노고를 주님이 아시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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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사 의식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5월 18일,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텀블러 판촉 행사에 ‘탱크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홍보 문구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함께 쓰였다. 문제는 그날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에서는 5·18 영령과 오월 단체, 광주 시민, 박종철 열사 유가족에게 사죄했고, 임직원 역사 교육과 내부 검수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상품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것 아니냐고. 텀블러의 모양이나 행사 콘셉트 때문에 ‘탱크’라는 말을 쓴 것뿐 아니냐고.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그저 가벼운 광고 문구 아니었겠느냐고. 물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롱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논란은 단순한 홍보 실수로만 넘기기 어렵다. 날짜와 단어와 역사적 기억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왜냐하면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무 날짜가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앞에 섰고, 탱크와 장갑차는 그 비극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날 ‘탱크데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게 그것은 이벤트 이름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군홧발 소리로, 어떤 이에게는 금남로의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로 들렸을 것이다.‘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권력은 한 청년의 죽음을 숨기려 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국가폭력의 거짓말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 그래서 ‘탁’이라는 한 글자는 어떤 이에게 경쾌한 의성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지우려 했던 말, 죽음을 가볍게 덮으려 했던 말,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말로 기억될 수 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의도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 의식은 단순히 연도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1980년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 1987년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역사 의식은 그 사건들이 오늘의 언어와 상징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감각이다. 이 날짜에는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 표현은 누구의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지, 이 상징은 어떤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다.기업 마케팅은 늘 빠르다. 더 짧아야 하고, 더 눈에 띄어야 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을 멈추게 해야 하고, 클릭하게 해야 하고, 구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속도 속에서 자주 사라지는 것이 있다. 맥락이다. “이 말이 팔릴까”는 묻지만, “이 말이 누구를 아프게 할까”는 묻지 않는다. “재미있나”는 보지만, “역사 앞에서 괜찮은가”는 묻지 못한다.이번 사건은 바로 그 빈틈에서 일어났다. 한 기업의 홍보 문구가 한 도시의 슬픔을 건드렸고, 짧은 이벤트 이름이 민주화의 상처를 다시 불러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기억을 얼마나 쉽게 소비하고, 언어를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통은 말을 빠르게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닿을 사람의 기억을 생각하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한 기업의 실수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기억을 얼마나 쉽게 지나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교회는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기억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쉽게 “이제는 잊자”, “그만 넘어가자”, “너무 예민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기독교 신앙은 본래 기억의 신앙이다. 성찬은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출애굽의 신앙도 기억 위에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쉽게 강자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팠던 시간을 잊은 사람은 남의 아픔에도 둔감해진다.그래서 교회가 역사적 상처 앞에서 가져야 할 첫 태도는 해석이 아니라 경청이다. 역사의 아픔 앞에서 교회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자리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다. 어떤 상처 앞에서는 정답보다 애도가 먼저다. 신발을 벗고 서야 하는 거룩한 땅처럼,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 앞에서는 우리의 언어도 낮아져야 한다.소통하는 교회는 세상보다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더 깊이 듣는 교회다. 왜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왜 단어 하나가 마음을 무너뜨렸는지, 왜 “실수였다”는 해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들음이 없으면 교회의 말은 복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또 하나의 판단처럼 들릴 수 있다.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이것은 단순히 따뜻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약한 것을 더 약하게 만들지 않는 말, 상처 난 곳을 다시 찌르지 않는 태도, 기억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그것이 복음의 언어다.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려면 말을 다시 배워야 한다. 더 멋진 말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운 말. 더 강한 말이 아니라 더 낮은 말. 더 빠른 말이 아니라 더 오래 듣고 난 뒤에 나오는 말. 그리고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회는 세상의 상처를 비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상처 곁에 조용히 머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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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가슴으로 들어야 할 말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였다. 마음이 힘드니 신앙적으로도 약해졌다. 기도가 잘 되지 않았고 말씀을 읽어도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다시 읽는다고 해서 특별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은 점점 메말라 갔다. 그래도 붙을 것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힘들게 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했지만 평안을 얻지 못했다. 나를 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은 냉랭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타주에서 목회하는 선배가 잠시 우리집에 방문했다. 며칠을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내가 작정 새벽기도를 할 때라서 선배에게 같이 새벽기도를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이런 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새벽에 같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왠지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시차도 있고 멀리서 와서 고단해 다음날 새벽기도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부탁하니 그러기로 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서는데 선배가 “와...”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선배가 나를 위해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눈물이 나며 마치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준비하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가슴을 뜨겁게 하시며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깜짝 놀랬다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콧등이 찡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선배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데? 정말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어?” 믿기 어려운 듯 되물었다. 그제서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신하며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 평안을 얻고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혼자인 것처럼 외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성경을 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씀이고, 성경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진심이다. 설교를 통해, 큐 티를 통해 날마다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언제부터 인가 사랑하는 말을 머리로만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거리가 생기자 마음이 약해지고 신앙을 행위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다. 행위가 마음을 대신하면서 사랑한다는 그 말을 가슴으로 듣지 않고 머리로만 듣게 된 것이다.나와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고,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도 있음에도 가슴이 식어버린 이유는 이 사실을 몰라서도, 충분히 듣지 못해서도 아니라 지식으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얼만큼 들었냐가 아니라 어디로 들었냐가 관건이다. 듣고 또 들어도 가슴에 울림 없이 머릿속 지식으로만 쌓여 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관계속에서도 경험한다. 어떤 일로 인해 사이가 서원해지만 심정에 변화가 생겨 멀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마음을 잘 몰라주게 된다. 서로를 대한 마음은 변한 것이 없고,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느끼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다. 가슴으로 들어야 할 말을 머리로만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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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다음 세대를 세우는 선교신학 에드워즈의 교육관과 디아스포…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요즘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코리아 1 위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무너진 교육 현장과 교권 붕괴라는 묵직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며 한국은 물론 해외 한인 사회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통쾌하다는 반응과 씁쓸하다는 반응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드라마가 건드린 질문이 현실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과연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가.” 이 질문은 미주 한인 부모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장소가 달라졌을 뿐, 자녀 교육을 둘러싼 고민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성공적인 삶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부모라면 곧 또 다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 아이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많은 디아스포라 가정이 갈등한다. 미국 사회의 기준과 신앙 공동체의 기대, 부모의 소망과 자녀의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쪽을 붙잡아야 할지 흔들린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18 세기 사람이지만, 그의 교육관은 바로 이 갈등 앞에 서 있는 오늘의 디아스포라 부모들에게 놀랍도록 선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에드워즈는 교육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준비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교육이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육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종교적 정서(Religious AffecFons)’와 깊이 연결된다. 그는 참된 신앙이 머리의 동의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성경 지식을 외우게 하고 교회 출석을 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녀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지도록,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 교육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에드워즈의 가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다. 그는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훈련을 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가졌으며, 자녀 한 명 한 명의 영적 상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아내 사라(Sarah Edwards) 역시 이 교육의 동반자였다. 가정은 교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신앙이 살아 숨 쉬는 첫 번째 선교지였다. 스톡브리지 인디언 사역에서도 에드워즈의 교육 철학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인디언 아이들에게 단순히 영어와 읽기를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이해와 대화를 통해 복음을 내면화하도록 돕는 교육을 실천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겨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 미주 한인 2 세 교육에도 직접적인 통찰을 준다. 우리 자녀들은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 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은 문화와 언어를 초월한다. 에드워즈는 또한 교육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녀가 의사가 되든, 교사가 되든, 사업가가 되든 그 직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명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종교개혁의 소명론(召命論, VocaFon)을 에드워즈가 교육 현장에서 구체화한 것이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좋은 직장’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을 붙들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 2 세의 이중 정체성은 약점이 아니라 소명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언어와 정서, 미국의 사고방식과 글로벌 감각을 동시에 품은 2 세는 어느 한 문화에만 속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을 위해 준비된 존재일 수 있다. 에드워즈가 경계선의 사람 브레이너드를 통해 인디언 선교의 문을 열었듯, 하나님은 경계선 위에 선 2 세들을 통해 이 시대의 선교를 열어 가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녀에게 부담을 지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에드워즈의 교육관에서 핵심은 강요가 아니라 환경이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낼 때, 자녀는 그 삶을 보고 자란다. 설교보다 삶이 먼저였다. 논리보다 경험이 먼저였다. 에드워즈 자신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매료된 사람이었고, 그 매력이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첫 번째 교과서였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부모들에게 이 메시지는 깊은 위로이자 도전이다. 우리는 자녀에게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 마음은 귀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묻는다. 우리가 자녀에게 주고자 하는 가장 귀한 유산은 무엇인가. 학벌인가, 재산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확신인가.  에드워즈의 11 명의 자녀들 중 많은 이들이 신학자, 목회자, 사회 지도자로 자랐다. 이것은 유전이나 환경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가정의 분위기, 지성과 신앙을 함께 추구하는 삶의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헌신이 만들어 낸 열매였다. 한 가정의 신앙적 깊이는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의 역사를 형성한다. 결국 다음 세대를 세우는 것은 프로그램이나 커리큘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부모의 삶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가장 강력한 선교신학이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자신의 가정과 스톡브리지 교육 현장에서 몸소 증명했다. 선교는 먼 곳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 가정 안에서, 자녀와의 저녁 식탁에서, 잠들기 전 나누는 기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것 자체가 선교이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에드워즈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강력한 선교의 방식일 수 있다. 우리는 자녀에게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을 세상에 보낸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세우는 첫 번째 자리는 교회도 학교도 아닌, 바로 우리의 가정이다. 에드워즈의 교육관은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 작고 일상적인 헌신 안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담겨 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도는 세대를 건너 열매를 맺는다. 가정은 디아스포라 선교의 첫 번째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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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6 김광근 -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 크리스천헤럴드2026.07.02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리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민수기 14장 9절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은혜의 백성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매일 아침의 만나로 살아왔지만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들려온 정탐꾼들의 보고 앞에서 마음이 얼어붙었습니다 "성읍은 견고하고 백성은 장대하더라" 정확한 분석이었으나, 그 분석은 결국 밤새도록 통곡과 원망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절망으로 이어졌습니다.하지만, 같은 광경을 보고도 다른 고백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도 아낙 자손의 거대함을 똑같이 보았지만.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선포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개역한글) 자신을 메뚜기로 여겼던 백성과는 정반대의 고백이었습니다 문제가 커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해서 두려운 것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오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짓누르는 현실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기도의 무릎을 끓을 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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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가정의 달, 5월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1 오늘은 가정의 달 절반이 지나가는 날입니다. 매일같이 가정을 점검하다 보니 갈수록 깊은 상처들이 보여서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보며 감사를 드립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을 수 있도록 은혜주심에 감사합니다.3 영적 고수들은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줄 압니다. 세상은 의외로 이런 분들을 존경하며 머리를 숙이게 되는데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기에 감사합니다.4 나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영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영적 고수들은 악의 세력 앞에서도 넉넉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랑의 화살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5 가정이란 용서를 연습하는 실습장이요 연합을 연습하고 감사도 연습하는 장소입니다. 아직 미완성의 인격체들의 모임이기에 실수가 용납되고 또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장소이기에 가정을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6 인간관계에는 가르쳐 주어도 모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워지는 관계가 있으니 이런 관계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관계의 축복임을 재확인하고 이런 분들이 나의 멘토가 되어주심 감사합니다.7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시 37:8에 말씀하시는 이유는 불평은 악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모든 불평을 몰아내고 그 빈자리에 감사와 희망을 심기로 결단하며 감사를 드립니다.8 내게 사랑을 요구하는 자들이 날로 갈수록 많아집니다. 때로는 밑천이 동이 나서 더 이상 나누어 줄 사랑이 없을 때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그때 평소에 저축해 놓은 영적 저금통장을 털어 그것으로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이니 날마다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금하여 두기로 작정하고 감사를 드립니다.9 사람의 욕망에는 인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결핍되면 불안과 초조 및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를 변화시키신 주님의 음성이 사모님들의 귀에도 들려지기를 바라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사람들의 자극으로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말씀을 무기로 삼고 사단의 방해를 보기 좋게 무찌를 수 있는 담력과 말씀의 칼을 잘 사용할 수 있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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