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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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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생명을 잇는 길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한국은 이미 인구 감소의 길로 들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총인구는 2025년 약 5,167만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향후 10년에는 약 5,071만 명, 20년 뒤에는 약 4,797만 명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이는 출산율 저하와 급격한 고령화에 기인한 구조적 변화이다. 실제로 최근 청년층의 종교 소속 역시 급감하고 있다. 예컨대, 20대와 30대에서 기독교인 비율은 각각 9 %, 11 % 수준으로 전체 국민 대비 현저히 낮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단지 숫자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대 단절’이라는 교회 내부의 미래 위기를 뜻한다.그렇다면 교회는 이 현실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많은 교회가 여전히 ‘전도’와 ‘선교’라는 미션에 집중해 왔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해외 선교지를 확장하며 영혼 구원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출산·육아·가정이라는 ‘생명의 연속성’과 ‘세대 계승’이라는 과제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교회가 영적 생명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물리적·사회적 생명 곧 ‘아이 낳고 기르는 문화’에는 충분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더욱이 교회 내부에는 젊은 세대가 떠나는 현실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청년대학부 인원은 2014년 약 16만 2734명에서 2022년 11만 4222명으로 8년 새 약 30 %가 감소했다. 그 이유로는 단지 사회적 피로감이나 경제적 부담만이 아니라, 교회 문화에 대한 젊은 층의 실망감이 상당하다.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 ‘비민주적 의사소통 구조’, ‘끼리끼리 문화’ 등이 이탈 요인으로 나타났다. 또한 젊은이들은 교회가 시대 변화와 삶의 고민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교회가 여전히 과거 권위주의적 리더십 구조에 머물러 있고, 물질적 부와 번영신학에 치우친 모습이 보일 때 신뢰는 흔들린다.이처럼 인구 절벽이라는 외부 현실과 청년 이탈이라는 내부 위기가 교회 앞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먼저, 교회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구 감소는 단지 통계적 수치가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는 문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다. 교회가 이 변화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영적 생명과 더불어 생물학적·사회적 생명을 함께 품는 사역이 교회에게 요구된다.다음으로 대응 전략이다. 교회는 세대 간 통합과 소통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청년부·주일학교가 단순히 세대별 모임에 머무르지 않고,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연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또한, 출산·육아 지원 네트워크, 가정 돌봄 사역, 청년 멘토링 프로그램 등 구체적인 생명 문화 사역을 교회 지형 안에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리더십 구조의 개혁도 중요하다. 재정 투명성 확보, 권위주의 청산, 교회 내 민주적 소통 체계 마련은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마지막으로 구체적 움직임이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손잡아야 한다. ‘가족 돌봄 공동체’, ‘지역 아동청소년 센터’, ‘세대 간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교회가 단지 예배당 안의 조직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생명 터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청년 세대를 단순히 보호해야 할 존재로 보지 말고 ‘교회의 현재’이자 ‘미래 동력’으로 신뢰하고 책임을 나눠야 한다. 청년이 주도하고 책임지는 사역 모델은 교회의 오래된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이제 질문을 던져본다. “교회는 지금 ‘인구 절벽’이라는 사회적 지형 변화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분주한 기관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생명공동체로서 새로운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할까?” 우리는 후자가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다. 교회가 스스로를 ‘생명의 공동체’로 재정립할 때, 잃어가는 시대 속에서 잃지 않을 한길이 보인다.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교회가 자신 안에 머물던 구조를 넘어, 세상 속으로 내려가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공동체로 거듭날 때, 청년들은 다시 돌아오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다시 예배당에 스며들 수 있다. 생명은 숫자가 아니라 흐름이다. 교회가 그 흐름을 품을 수 있다면, 인구 절벽이라는 어둡고 높은 파도 속에서도 한줄기 빛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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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재 건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오래된 보일러에서 샌 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보일러 주위는 물론, 화장실과 복도 바닥까지 물이 스며들어 곳곳이 썩고 망가졌다. 보험회사에서 나와 점검 후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보수 공사를 위해 벽안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다 부수고 뜯어냈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누수가 진행되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벽안속에는 나무와 석고판이 썩고 곰팡이가 쓸고 있었다. 물은 아래로 흘러 바닥까지 훼손시켰다. 문제의 원인은 누수이지만 보일러에서 물이 새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화근이었다. 하필이면 시야가 가린 보일러 뒤쪽에서 물이 새어 오랫동안 벽속까지 서서히 스며들어 피해가 컸다. 누수현상을 초기에 알았다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피해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곰팡이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벽 전체로 퍼진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소를 키우게 된다. 곰팡이는 담배보다 더 해로워 장시간 동안 노출되어 있으면 건강에 치명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리모델링중 곰팡이가 발견되면 의무적으로 알리고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 알고도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만큼 건강에 해롭다. 또 집 자체에도 치명적이다. 집을 지탱하는 기둥이 썩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물이 스며든 흔적이 발견되면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어디든 침범된 부위는 모두 다 뜯는다. 기둥과 철골 등 기본 뼈대만 남겨놓고 모두 뜯어낸다. 수리 후 원상 복구하는 비용과 보수공사로 인한 불편 등, 손해가 막대하지만 예외는 없다. 작은 곰팡이라도 그대로 두면 주위로 퍼져 전이되기 때문에 뿌리째 뽑아야 한다. 결국 대대적인 리모델링은 불가피하다.우리 몸도 다르지 않다. 곰팡이와 유사한 암이 몸 안에 발견되면 수술은 불가피하다. 몸을 열어 암이 발견된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암이 커지고 온 몸으로 전이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죄도 곰팡이와 같다. 밖으로 드러난 죄는 스스로도 감지할 수 있으니 조심할 수 있지만 내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는 자신도 모를 수 있어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영혼을 병들게 한다.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심도 있게 다루실 때가 바로 이때다. 평소엔 죄를 지어도 쉽게 용서해 주시고, 간과하시는 것 같지만 그 죄가 깊어져서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지경이 되면 그때는 대대적으로 우리 죄를 다루신다. 그 문제가 근간에 이르면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어서 전인격적인 공사를 강행하신다.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를 들어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날카롭게 허물을 하나씩 베어 내신다. 죄를 다루시는 과정이 매우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시련을 지나기도 한다. 소망이 끊기고 재기하지 못할 것 같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다. 우리를 벌하시는 과정이 아니다. 병든 우리의 내면을 해부하는 과정이다. 죄의 근간을 뽑아서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막으시는 것이다. 썩은 살을 도려내고 새 살이 돋게 하는 치료의 과정과 같다. 죽어가는 영혼을 회복시키고 다시 재건하시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다. 또한 재건의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뜯어낸 벽안을 들여다보듯이 우리 속안을 보게 되어 죄가 어떻게 침투했는지 원인을 알게 하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지, 내면은 어떻게 설계가 되어 있는지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좀 더 알게 된다. 아픈 만큼 성숙해져서 이전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보수공사를 마칠 때까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한다.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씻을 수도 없고, 건조를 위해 밤새 돌아가는 선풍기 소음으로 잠을 설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면 낡고 썩은 곳을 뜯어낸 자리가 재건되어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를 병들게 한 곰팡이가 제거되었다는 확신으로 마음의 평안도 되찾게 된다. 다시 건강한 삶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축복의 재건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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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동식 칼럼 - 교회가 지역에 있는 이유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교회는 구원받은 이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을 성도라 부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로 부름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교회세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준 지상명령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는 일입니다. 또한 승천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땅긑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했습니다.제자들이 명령을 받고 순종한 일이 바로 교회 세움입니다. 흩어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세운 첫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서쪽으로는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도마·다대오·바돌로매 등을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가는 지역마다 사명에 충실하게 교회를 세웠습니다. 동쪽으로 간 사도들 역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301년에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국교가 됐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박해 가운데 쫓겨났지만, 복음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라는 거짓 교회의 박해와 방해가 지속됐지만, 한번도 로마 교회 교인이 아니었던 사도교회 성도들의 열심으로 종교개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참 교회로 회복을 가져왔습니다.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첫 한글 성경을 가져다 준 로스는 스콜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입니다. 존 로스는 위클리프의 신앙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 중심의 신앙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그 열매가 바로 존 로스의 누가복음입니다. 이 성경의 서문에 위클리프 성경이 영국에서 했던 일을 이 성경이 조선에서 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기준으로 신앙생활에 임했던 윌라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윌라드는 이미 8-12세기에 자체 성경을 가졌던 알비지역의 발도파였습니다. 이 발도파는 불가리아 보고밀파의 함께 참 교회를 세웠습니다. 보고밀파는 아르메니아의 바울파 성도들이 강제 이주를 통하여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 유구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오늘 우리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선교단체가 아닙니다. 파라처치(para church)는 지역교회(local church)를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역과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지역 목사와 함께 지역에 존재하면 성례와 권징을 시행합니다.  한때 발도파는 고난과 박해를 받을 때 생존을 위해 순회 설교자를 세웠습니다. 설교자들이 대부분 순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를 형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으로 교회가 안정되자 지역교회와 목사를 세웠습니다.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교회는 지역에 존재합니다. 지역에 존재하는 것은 지역을 복음화시키고 건강한 지역으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지역에 교회가 있는 것이 기쁜 일이 돼야 합니다. 지역민들에게 교회가 있어서 좋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역에 오랜 시간을 버티어낸 교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러한 반열에 들어서도록 힘써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전해준 성경중심의 신앙 솔라 스크립트라(오직 성경)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면 내 생각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터가 무너집니다. 터가 무너진 교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터가 튼튼한 교회는 지역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지상교회는 모두 우주적 보편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들이 건강하게 자랄수 있도록 기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보존되는 일입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은 중요합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교회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회의 사명입니다. 공교회를 위해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성경과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기본적 세 가지가 잘 준비되면 지역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역을 섬기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역 교회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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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6 김광근 - 하나님이 아끼시는자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시편 127장 1-2절우리는 왜 열심히, 부지런히 달리는데도 평안은 더디 올까요?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세우지 .. 지키지 아니하시면.. 헛되도다"라고 단호히 밝힙니다. 혹, 우리의 문제는 '수고의 부족'이 아니라, '주권의 전도'에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 없이 세운 집은 시간의 균열을 피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지킨 성은 두려움이 스며들며 하나님 없이 새벽을 여는 근면은 끝내 "수고의 떡"만 먹는 삶이 됩니다.이 헛됨의 고리를 끊는 해답은 먼저의 전환'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일보다 먼저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 "주께서 아끼시는 자"란 바로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며, 집과 성의 주권을 주께 돌려드리는 자입니다.신앙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구하는 자를 하나님이 아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집의 머릿돌이 되시고 중심에 서실 때, 우리의 수고는 헛됨에서 해방되고 우리의 파수는 불안에서 자유하게 됩니다이제 우리의 하루 질서를 새롭게 합시다.오늘 해야 할 일 위에 "주여, 세우소서"를 기록하며 계획을 봉헌하고 결정의 문턱마다 "주여, 지키소서"를 속삭이십시오. 그리고 밤이 되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말씀을 암송하며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잠은 내가 아니라 주가 지키신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먼저 하나님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택할때, 우리의 수고는 의미가 되고 잠은 선물이 되는 복된 하루를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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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감사의 계절, 11월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1 오늘도 새날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특별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같이 내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첫 시간을 열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2 아브라함을 대책 없이 부르신 것 같지만 그에게 명령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할 때 이유도 묻지 않고 순종한 아브라함을 마침내 거부가 되게 하시고 믿음의 조상까지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나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주시기를 약속하셨으니 함께 이 복을 동료 사모님들에게도 전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3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그릇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 기간 동안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마다 답답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그릇을 준비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찬송과 감사를 드립니다.4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어떤 경우에도 겸손할 수 있는 복입니다. 내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다면 비워질 때까지 기다리시는 이유도 복을 누릴 수 있는 겸손을 만드시는 시간이기에 기다림은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님을 후에 비로소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5 다윗에게도 오랜 기간 동안 예상치 못한 사울로부터 쫓기는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만이 이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에 오늘의 고통은 결국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성취되는 시간이기에 이때 나오는 감사는 뜨거운 눈물이 범벅되어 나오는 감사입니다6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에 들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마시기에 쓴 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기호와 상관없이 달게 받고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이기에 이런 자가 되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를 원하며 인정을 받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중심의 사람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보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충분하게 생각하고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니 이런 성숙한 신앙을 간절히 바라면서 감사를 드립니다.8 전 세계 경제가 위기에 있는 현실을 볼 때마다 내일의 염려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과 상관없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는 부모 없는 고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책임져 주실 것을 믿을 때만이 그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잊지 않고 현실 속에서 믿음을 살아낼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9 선생님의 죽음으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라고 말씀하신 이후부터는 제자들이 담대해진 것처럼 오늘날 불안증과 공포에 시달려 벌벌 떨고 있는 자들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주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을 간곡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채 찍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와 자녀들을 위해 주님이 주시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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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아주 보통의 하루"를 위하여 크리스천헤럴드2025.11.17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이 말이 주는 느낌이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아보하’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인 말로, 특별한 사건이나 성취 없이도 평범하고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려한 일상을 연출하거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그저 무탈하게 보낸 하루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행복을 쫓아 달려가는 것조차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아보하’는 새로운 위안이 되고 있다.돌이켜보면 이러한 ‘아보하’의 정신은 성경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라고 말씀하셨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신 것이다.시편 기자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며, 들의 짐승과 공중의 새까지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상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를 깨달았다.예레미야애가에는 이런 고백이 담겨 있다. “야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아침 새롭게 주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따뜻한 밥 한 끼, 가족과의 소소한 대화, 편안한 잠자리까지 이 모든 평범한 순간들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그런데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행복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SNS에는 화려한 일상과 특별한 경험들이 넘쳐나고, 더 큰 성공과 더 많은 성취를 추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이 그런 것들을 얻어도 마음은 더 공허하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다시 더 큰 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아보하’는 이런 행복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특별한 성취나 화려한 경험이 없어도 괜찮다고, 오늘 하루 큰 탈 없이 지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과 닮아있다.그렇다면 신앙인이 ‘아보하’를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모든 순간에 감사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는 말씀처럼, 평범한 일상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다.둘째,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이 오늘 맡겨주신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매일의 기도, 말씀 읽기, 이웃을 향한 작은 배려 등 평범해 보이는 신앙의 실천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가 된다.셋째, 비교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화려해 보이는 삶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지으셨고, 각자에게 맞는 길을 예비하셨다. 남의 길이 아니라 내 길을 걸을 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이 세 가지를 실천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시간이 된다. 거창한 활동이나 큰 헌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하나님은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매일 경험하는 바로 오늘, 이 평범한 하루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특별할 일이 없어 보이는 일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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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3 -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11 - 윌리엄 스크랜튼 크리스천헤럴드2025.10.22
    조선 초기 선교사들의 스트레스와 탈진은 동료 간의 갈등이 한몫을 차지한다. 선교사들 간의 서로 의로운 경쟁과 충돌 및 복음을 향한 열정이 빚어낸 과정 중의 문제이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매년 20명 중의 1명이 선교 사역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 중에 직무 역할과 관계 갈등은 사유 중 하나이다. 특히 의사직은 정서적 탈진 비율이 높다. 의사 윌리엄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은 1885년 5월 제물포를 거쳐 정동에 도착했다. 알렌 선교사를 돕다가 그해 9월에 자신의 집에서 정동병원을 개원했다. 그는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을 위해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서대문, 남대문, 동대문 지역에 시약소를 설립하고, 남대문 주변에 병원과 병원 내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민중과 함께 복음을 전하여 민족운동가 전덕기를 양성했다. 전덕기는 스크랜톤의 인덕에 반해 그의 집에서 일하며, 세례를 받았고, 독립협회와 을사늑약 무효 상소운동과 전도활동을 펼쳤다. 상동교회는 민족독립운동을 준비시키고, 33인 민족대표 여러 명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크랜튼은 감리교 선교사업을 총괄하고, 시병원, 상동과 애오개의 진료소, 정동의 보구녀관을 돌보았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교육을 감독했다. 그는 광산소속 의사, 금광 부속병원 사역 등 조선에서 31년간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어머니 메어리 스크랜튼은 조선의 여성 교육의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1886년 5월 31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들만의 주일학교 조직, 여선교부 주관의 동대문선교사업, 공옥여학교 설립,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발전 등 여성들의 불평등과 억압에서 해방하며, 여성교육과 복음전도의 소명을 다했다.필자는 스크랜튼의 탈진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의사로서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연인원 12,209명, 1901년까지 5만명에 이르는 환자를 치료했고, 교육, 출판, 행정, 토착 전도와 양성, 신학 교육 등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므로 탈진했다. 스크랜튼 대부인도 많은 사역으로 고된 사역과 1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도보로 순회전도 하며, 만성 설사와 여러 차례의 중병과 뇌졸중을 치뤄 탈진을 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스크랜튼은 세 번의 큰 갈등을 경험했다. 고집 센 맥길은 조선 감리교선교 관리자인 스크랜튼에게 순응적이지 않아 갈등을 빚었다. 조선선교 회계를 맡은 아펜젤러는 먼저 예베당을 지으려 하고, 스크랜튼은 빈민선교를 우선시하여 병원을 세우려 함으로써 갈등을 빚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 조선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아펜젤러를 지지했다. 배재학당의 정체성 문제도 스크랜튼의 견해가 무산되었고, 올링거와 긴장이 있었으며, 친일 인사 해리스와도 정면 충돌했다. 그는 조선 감리교선교 관리자 및 후일의 총리사와 감리사로서 실패했고, 자신의 권위에 소상을 입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스크랜튼은 늘 완벽하고 원칙주의자로서 제안을 했지만, 매번 지지를 얻지 못했고, 선교 인력을 보충해달라는 요구 조차도 외면당했다. 선교본부와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므로 심신이 탈진했다.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중립과 타협이 없는 꼿꼿한 그에게 갈등과 충돌은 심신의 탈진이었다. 결국 선교사를 사임했다.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조선당시 하층민 여성은 매매의 대상이었고, 남자 선생이 남녀내외법 가운데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시키는 것은 항의 적이었으며, 기독교금지법이 존재하는 사실을 알고도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크랜튼의 탈진회복 방법을 모색한다. 첫째, 희생과 헌신이다. 스크랜튼은 장티푸스 병에 걸렸을 때 회복하게 된다면, 조선으로 가겠다고 서원한 것을 지켰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 헌신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했다. 둘째, 소명의식이다. 그는 엘리트 집안의 상위 1프로에 해당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해 소명을 감당했다. 자신의 집을 개조해 정동병원을 세웠고, 소외된 백성이 거주하는 변두리에 병원과 교회를 설립했다. 셋째, 겸허한 자세이다. 선교부와 동료 간의 갈등과 충돌로 인해 조선에서 22년간의 감리교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했지만, 성공회로 이적하여 평신도 의사로서 10년간이나 더 개인사역을 했다. 자신의 위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소신껏 의사로서 사명을 다했다. 넷째, 휴식이다. 그는 평범한 일반 사람의 집에서 민박을 하며, 안식했다. 스크랜튼 대부인도 중병으로 인해 휴가를 떠났지만, 회복 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사역에 진력했다. 휴식은 영혼육의 안식이 된다.서로 간의 갈등이 있을 때 갈등 전환의 변화를 인식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본다면, 자신이 나아갈 방향과 더 성숙한 기회를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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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불 신 크리스천헤럴드2025.10.22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딸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취업 기회는 사기였다. 자격조건도 까다롭지 않고 알바하기 좋은 일이어서 잘됐다 싶어 지원하고 알아보니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속기전에 깨닫고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하니 바로 연락이 끊겼다. 문제는 이 취업의 기회가 다녔던 학교 이메일을 통해서 왔다는 것이다. 일자리를 찾는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이메일 계좌를 만들어서 보낸 것이다. 겪고나서 알아보니 이런 사기가 많아서 학교에서도 졸업생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믿고 보았던 학교 이메일도 이제는 진짜인지 확인해야 한다. 얼마전 미국 플로리다에서 한 목사의 사기가 들통나서 대대적 체포가 이루어졌다. 체포를 당할 때 촬영되었던 그의 집은 어마어마한 맨션이었다. 수많은 고가의 스포츠카들도 카메라에 잡혔다. 이 목사는 복음을 빌미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헌금을 강요해서 받은 돈으로 부와 사치를 누리고 살았다. 예수님을 팔아 번돈으로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데 썼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헌금한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분노하고 상처받았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딸에게 접근한 사기꾼이나 이 목사나 무엇이 다를까 싶다. 순수한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나쁜 사람들이다. 믿는 마음을 의심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하는 악한 행위이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둘 중 누가 더 나쁘냐 고 묻는다면 나는 이 목사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믿어야 하는 직분을 불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치면 마음을 닫게 되고 몸이 다치면 몸을 사리게 된다. 외적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면역력의 도움으로 스스로 회복이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지 않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닫힌 마음의 문은 좀처럼 다시 열기 힘들다. 그 상처의 골이 깊어지면 완전히 마음을 닫을 수도 있다. 다친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사역으로 방문한 교회 마당에서 우연히 발견한 처음보는 나무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나무 아래부터 손이 닿을 높이까지 가시가 가득하다. 더 특이한 점은 그 이상의 높이부터는 가시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이 많은 부위에 가시가 생긴 것 같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자연 생태계를 보면 이런 현상이 낯설지 않다. 외적인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생명체의 본능이다.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나오지 않아야 할 이유도 나오는데 바로 신뢰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에 실망할 수 있고, 교역자들이 기대에 못 미 칠수 있지만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복음의 기쁜 소식과 위로를 전하는 자들이다. 그런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한다면 복음의 사역을 역행하는 것과 같다.  그 어느때 보다 우리의 일상이 각종 통로를 통해 노출되는 시대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복음을 살아내려는 진정성이 중요하다. 나로 인해 불신이 쌓여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잠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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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다가감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0.22
    한국의 애니메이션 ‘케데헌’(K-Pop Demon Hunters)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악령을 퇴치하는 K팝 여성 아이돌이라는 콘셉트, 한복과 퇴마, 저승사자와 같은 한국적 요소가 팝 문화와 절묘하게 융합되며 세계적인 문화적 파장을 일으켰다. 해외 팬들은 “전통과 현대가 환상적으로 섞였다”고 말하고, 글로벌 플랫폼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동양적 스토리텔링”이라며 극찬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 컨텐츠를 보며 한국 교회는 어떤 질문을 받고 있는가.이런 질문을 해보자. “왜 이런 스토리는 교회에서 나오지 못하는가?”교회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유한 세계관이 있다. 창조와 타락, 구속과 회복의 서사.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역사,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드라마.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깊고, 감동적이며, 궁극적인 진리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교회 내에서만 머물러 있고, 세상 속으로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케데헌’은 그 스토리의 본질이 강해서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공감받았다. 노래와 춤, 색채와 상징, 스토리와 감정이 하나로 엮이며,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었다. 무속적 상징이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 문화 안의 정체성과 언어로 해석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 반면, 교회는 여전히 자신들만의 언어 안에 갇혀 있다.“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이 옳지만, 세상은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말은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늘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지만, 정작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공감 없이 권면하고, 설명 없이 진리를 주장하며, 고통의 언어에 응답하지 않은 채 영적 전쟁만을 외쳤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문화에 무분별하게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화와의 단절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자주 ‘세속화’를 경계하며, 복음의 ‘소통화’를 놓쳐버렸다. 교회는 문화적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세상과 연결되는 정서적 통로를 닫아버렸다.이제 교회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복음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품은 이야기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낼 수는 없는가? 한국 교회는 독특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찬양, 통성 기도, 공동체 중심의 신앙, 한(恨)의 정서를 품은 회개의 기도.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의 감동’으로만 소비해 왔다. 세상을 향해 번역하려 하지 않았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려 하지 않았다.이제는 우리가 가진 이 문화적 유산을 ‘신앙의 예술’로 확장해야 한다. 신학적으로 검증된 컨텐츠를 바탕으로, 드라마, 음악, 영상,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단순히 젊은 감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깊이를 품은 ‘우리만의 언어’를 찾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경건과 진리, 동시에 상처받은 시대의 감정을 품어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말만 많은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고, 감정이 머물 수 있는 예술적 공동체로 회복되어야 한다. ‘케데헌’은 우리에게 말한다.“이야기의 본질만큼이나, 전달 방식도 중요하다”고. 교회는 여전히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지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세상 속의 ‘은혜’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진리의 부족이 아니라, 소통의 부재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진리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되, 그것을 사랑과 공감의 언어로 옮겨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고립된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복음은 늘 시대의 언어를 입고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갔다. 오늘날 교회가 이 흐름에 눈을 뜬다면, 복음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릴 것이다. 회개와 믿음, 순종과 헌신이 다시 시대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교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는 말씀이 감정이 되고, 이야기로 되고, 이미지가 되어 세상과 마주쳐야 한다. ‘케데헌’은 결코 복음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그 컨텐츠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을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복음을 더 넓게 전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시대의 언어로 진리를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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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5 김광근 - 우리의 약함을 인정할 때 주시는 능력과 힘 크리스천헤럴드2025.10.22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이사야 40:28-29우리는 때로는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지쳤다'는 말이 자주 입 밖에 나올때가 있습니다. 이런 무기력은 단순한 휴식으로는 회복되지 않는 깊은 차원의 고갈입니다이사야 선지자는 그런 지점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킵니다.그분은 지치지 않으시고, 피곤함이 없으신 분시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지친 자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진짜 신앙은 시작됩니다.그렇다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있습니다.'앙망한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넘어, 전심으로 신뢰하며 그분의 때와 방식에 자신을 맡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급히 달려가다가 숨이 찰 때, 멈춰서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처럼, 앙망은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의 호흡으로 다시 채우는 시간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맞는 정확한 방식으로 은혜를 공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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