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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2-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10 - 샬럿 딕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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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의 위기 때 마다 강한 여성으로서 신념과 선교의 열정을 재발견함으로 극복해

중년 여성 선교사를 대상으로 탈진의 원인을 살펴보니 타문화 부적응, 의사소통 부재, 긴장과 갈등, 소외감, 여성 폄하의 시선, 정체성 상실, 과도한 사역 및 불안정한 경제력 등으로 나타났다. 신체적 이상과 심리적 위축과 고립, 하나님과 소원함은 탈진을 넘어 선교사의 중도 탈락을 가져오거나 죽음의 공포와 자살 충동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성국 박사는 중년 여성의 탈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소명을 재확인하는 회복탄력성을 발견했다. 탈진은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대처방식에 따라 성숙의 기회와 믿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재발견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샬럿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은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여성 선교사로 꼽힌다. 그녀는 해외선교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로티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7형제 중 넷째로서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미망인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았다. 1873년 여동생을 뒤따라 중국 선교로 갔지만, 여동생 에드모니아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4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로티는 39년 동안 중국 사역을 이었다. 1885년부터 중국 촌락을 순회하며 전도했고, 1887년 중국인 남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문의 정책에 따라 외국 선교사의 개입이 없이 20년 동안 중국인 목사 리서우딩 집례로 1000여명에게 세례를 시행했다. 이 외에도 덩저우에서 신입 선교사 훈련 및 중국 여성 상담, 그리고 저술활동을 했다.
필자는 로티 문의 탈진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20세기 초는 중국에 전염병과 천연두가 휩쓸고, 1911년 반란이 일어나 대규모 기아 상태를 초래했다. 그녀는 1912년 기아대책을 위해 금식하며, 재원을 마련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영양실조와 아사 직전에 놓였다. 결국, 본국의 결정으로 귀국하던 중 일본 고베의 선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로티 문은 여동생이 선교생활의 중압감, 발작 증세, 그리고 몸이 아파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외로움과 깊은 우울증에 죽을 것 같았다. 그 후, 일본 선교를 함께 하자고 구혼을 한 남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다윈 진화론 입장을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혼자 남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중국의 기근으로 미국에 재원 요청을 했지만, 선교위원회는 이를 거절했다. 통장을 탈탈 털었지만, 너무나 미미하여 깊은 우울에 빠졌고, 더군다나 여동생이 스스로 머리에 총을 겨누어 자살했다는 소식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여자 선교사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선교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하는 것은 금지였고, 마을에서는 여자 도깨비라고 불려져 중국인과 동화되는 것은 힘들었다. 고작 여학생 몇 명만 가르치는 일은 로티에게 지독한 권태와 혐오와 실패한 인생처럼 자각됐다. 현지 이사 T. P. 크로퍼드의 강압적 권위도 사임의 위기를 만들었다.
로티 문의 탈진회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헌신하는 마음이다. 그녀가 17세 때 강한 회의론자를 넘어서서 1858년 전도집회에서 전도자의 부르심을 입은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중국 사역에 헌신했다.
둘째, 강한 여성으로서 꿈의 실현이다. 원대한 사역을 꿈꾸는 여성 선교사로서 신념과 정체성을 자리매김하고, 남자 선교사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깼다. 남녀 선교사가 평등한 권리를 갖도록 저술하고, 강연으로써 남침례교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백만여 명에 이르는 남부 침례교도들이 중국 전체에 남자 선교사가 겨우 새 사람 파송 할 능력밖에 안된다는 게 이상하다.” 남자 선교사들이 오지 않는다면, 여성 선교사들을 파송 해달라고 주장했다. 로티는 30개 이상의 교회를 설립했고, 핑투는 남침례교 최대의 선교 중심지가 되도록 공헌했다. 그녀에 의한 ‘로티 문 성탄절 헌금’은 전설적인 물결을 만들었다. 1888년 첫 번째 성탄절 헌금은 원래 목표액 보다 초과되어 세 명의 신입 여성 선교사들에게 봉급을 줄 수 있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액수는 계속 증가했다.
셋째, 재능의 발휘이다. 로티는 위기 때마다 글을 써서 호소력을 전파하여 중국선교에 설득력을 얻었다. 다재다능한 글솜씨는 교파 출판물과 외국 미션 저널에 편지하여 선교의 필요를 간청했고, 여성선교연합의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티의 마지막은 건강이 악화되어 생명을 뺏겼지만, 탈진의 위기 때 마다 강한 여성으로서 신념과 선교의 열정을 재발견함으로 극복하였다. “내가 천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들을 중국의 여인들을 위해서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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