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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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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인생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눌려 있다. 해야 할 일보다 마음의 짐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경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상처, 이미 끝난 관계, 내려오지 않는 자존심, 더 가지려는 욕심, 잃어버릴까 두려운 미래, 내 뜻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 손에 꼭 쥐고 있을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삶은 점점 지쳐 간다.신앙은 더 많이 붙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이 맡기는 믿음이다. 세상은 붙잡아야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맡길 때 비로소 참된 평안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붙드는 손을 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고향과 익숙한 삶을 내려놓았다. 더 나아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까지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줌의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뿐이었다. 그것은 오늘을 버티게 할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녀는 그것마저 내려놓았다.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는 떡을 먼저 엘리야에게 드렸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됐다.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으로 내려놓는 자의 빈손을 은혜로 채우신다.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익숙했던 배와 그물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의 포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와 생계, 익숙함과 안전함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그 순간 평범한 어부는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됐으며,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 바울 역시 내려놓음의 사람이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가문, 최고의 학문, 종교적 열심, 사회적 명예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하나님은 바울을 복음의 가장 위대한 통로로 사용하셨다.왜 우리는 내려놓지 못할까. 대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내려놓으면 잃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존심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셋째는 욕심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은 역설이다. 붙잡으면 오히려 무거워지고, 맡기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 자기 방식, 자기 뜻, 자기 기준을 절대화하는 삶을 멈추는 것이다. 신앙은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추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 길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의 가장 깊은 자리다. 자기 뜻을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시작된다.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욕심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 더 소유하고 싶은 욕심, 더 성공하고 싶은 욕심은 결국 우리 영혼을 무겁게 만든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이 죽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심이 죽을 때 비로소 믿음이 살아난다.마지막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인생의 주인 자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삶의 결정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일 때는 모든 것이 짐이 된다. 미래도, 관계도, 사역도, 가정도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주권을 맡기는 순간 마음은 달라진다. 두려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고, 무거움 대신 자유가 시작된다.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 전에 내려놓음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고, 마침내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고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됐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내려놓음 위에서 시작됐다. 오늘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붙잡고, 걱정을 붙잡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자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붙잡으면 짐이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기적이 된다. 붙드는 손을 펴는 순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 내려놓을 때 은혜가 시작되고, 내려놓을 때 능력이 나타나고, 내려놓을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손을 편다. 자존심과 욕심·상처·두려움을 내려놓고, 인생의 주인 자리까지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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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4 김광근 - 아침에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시편 5편 3절하루는 무엇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 로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정보와 격정 속으로 들어가지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이 고백은 단순한 경건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표현이며 아침에 하나님을 찾는다는것은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남는 시간에 찾는 분이 아니라,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분입니다. 또한 다윗은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막연한 독백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의 행위입니다. 이확신이 없으면 기도는 쉽게 형식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들으신다는 믿음은 우리의 기도를 지속하게 만듭니다.그리고 그는 "바라리이다"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기도가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과 일하심을 기대하며 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결국 핵심은 시선입니다. 문제를 먼저 보면 두려움이 커지고, 자신을 보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은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아침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방향입니다. 오늘도 이 고백으로 하루를 열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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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변함없은 은혜를 기대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첫 시간에 변함없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입니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사가 나옵니다.3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늘도 가까운 식구들을 서로 사랑하는 일을 우선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4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털어놓는 기막힌 사모님의 사연을 듣는 중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시니 더 간절히 중보기도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5 부활 후에 주고 가신 선물들을 매 순간 성경 속에서 찾아내다 보니 한없이 나옵니다.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놓게 하시더니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들이 날개를 펴고 날듯이 창공을 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6 사모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속에 감춰진 가능성과 은사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경청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7 오랜동안 사역해 오다 보니 순수성을 잃어가고 나의 경험과 터득된 지식들이 앞장서서 사랑에 수많은 잡티들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십자가 앞에 나아가 처음 사랑의 순수성을 다시 찾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8 우리는 사랑한다 해도 조건을 붙일 때가 많습니다. 옳고 그름이 앞서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하는 사랑이므로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이 사랑이 닿는 곳이라면 생명이 살아나게 되어 있으니 이 사랑을 다시 하기로 재 다짐하며 감사합니다.9 이번 달 실천 사항은 1) 다시 복음으로, 2) 다시 처음 사랑으로, 3) 다시 내 자리로 입니다 "다시"라는 희망언어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다시”가 없었다면? 내 생애 속에서도 “다시”가 없다면? 십자가에서 “다시”부활이 없다면? 을 묵상할 때마다 새로운 비전이 밀려와 “다시”감사를 드립니다.10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체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 탄력성을 주셔서 사모들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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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척하는 인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Netflix에서 흥행했던 요리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 시즌2 가 성황리에 끝났다. 결승에서 우승한 최강록 셰프는 마지막 대회의 과제인, ‘나를 위한 요리’ 를 만드는 경합에서 그가 선택한 요리에 대한 이유와 고백이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했다. 대회 내내 자신의 무기처럼 사용한 조림기술. 모두가 또 한 번 이 비장의 기술로 최고의 조림요리를 만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다른 요리를 선택했다. 이유는 뜻밖에도 자신이 조림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잘 하는 척을 할 뿐이라고 했다. 본인을 위해 하는 요리는 진심이어야 하는데, 스스로에게 잘하는 척하는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척하면서 살 때가 많은데, 이 순간만은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인정한다 해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요리를 마치 가장 잘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잘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자. 이 순간만큼은 척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뜻이었다. 이 말은 들은 많은 경연대회 참가자들이 공감했다. 심사위원인 미쉴렝 쓰리스타 안성재 셰프도 최강록 셰프의 말에 공감하며 자신도 잘하는 척을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 척하면서 산다. 그래야 주위에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잘하는 사람으로 소개해야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우리의 이력서를 보아도 그렇고,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바쁜 사람인 것처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래서 척하며 산다는 말이 공감이 간다. 우리모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의미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보여주며 살기 어렵다. 부족한 내 모습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안 된다. 심지어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허물을 보이기 싫어한다. 그래서 잘난 척, 아는 척, 괜찮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산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척하며 산다. 그렇게 우리모두 자신을 포장하며 산다. 어쩌면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척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그것을 다 공개하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서로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안에서도 우리의 허물을 다 공개하면서 살기 어렵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있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고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척할 필요가 없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만은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그 어떤 포장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유일하게 척할 필요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분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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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에드워즈 연구,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놓쳤는가?>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 1758)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를 충분히 연구해 왔는가, 아니면 어떤 중요한 측면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가?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꾸준히 축적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분명한 특징이 드러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밝혀 왔지만, 동시에 중요한 부분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 연구는 이미 방대한 규모에 이르렀다. 노스이스턴대학교의 M. X. 레서(M. X. Lesser)가 정리한 문헌 목록에 따르면, 1729 년부터 2005 년까지 3,000 편이 넘는 연구가 출판되었다. 특히 20 세기 후반 이후 연구는 더욱 활발해지며, 에드워즈는 신학을 넘어 철학, 문학, 윤리학, 미국 지성사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특정 시대의 종교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신앙, 세계를 이해하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연구 동향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ProQuest 데이터에 따르면, 2000 년부터 2020 년까지 에드워즈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은 총 2,551 편에 이르며, 그중 57.5%인 1,467 편이 최근 10 년(2011–2020)에 집중되어 발표되었다. 이는 에드워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의 확장 속에서도 분명한 한계가 드러난다. 같은 기간 선교학 분야에서 발표된 에드워즈 관련 논문은 단 37 편, 전체의 약 1.45%에 불과하다. 최근 10 년간 발표된 논문 역시 28 편에 그쳐, 그의 사상이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것에 비해 선교학적 반영은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방대한 연구의 축적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에드워즈는 특정 신학 전통에만 속한 인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온 보편적 사상가라는 점이다. 하버드의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그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에드워즈를 미국 지성사의 핵심 인물로 재조명하였다. 복음주의 전통 안에서도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파이퍼(John Piper) 등을 통해 그의 신학은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공백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선교학적 관점이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에드워즈 연구는 주로 신학, 철학, 부흥 운동, 설교학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의 선교사적 정체성과 사역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많은 연구가 그의 사상을 깊이 탐구했지만, 그의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선교적 실천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드워즈는 단순한 신학자나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7 년을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서 인디언 공동체와 함께하며 선교사로 살았다. 그는 그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복음을 삶으로 증언했다. 그의 신학은 강단 위에서만 선포된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살아낸 신앙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에드워즈를 설교자나 사상가로만 이해할 때, 그의 신학은 추상적인 체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로서의 삶을 함께 볼 때, 그의 신학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된 살아 있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드워즈 연구는 새로운 방향을 요구받는다. 이 흐름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낯선 문화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미 많은 신학적 지식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삶과 선교적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에드워즈 연구의 흐름은 분명 많은 것을 비추어 왔다. 그의 신학과 사상, 영성과 부흥에 대한 깊은 통찰은 오늘의 교회에도 귀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풍성한 연구 속에서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 놓쳐진 영역은 바로 선교적 시선이다. 에드워즈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복음을 들고 낯선 공동체 한가운데로 들어갔던 선교사였다. 그의 신학은 책 속에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을 넘어, 선교적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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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여주봉 칼럼 -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선교적 교회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은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의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모든 영역, 인간 사회와 역사의 모든 영역, 더 나아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1장 15~23에서 바울이 선포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이 구속은 우주적이다.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교도 이 구속의 폭만큼 넓어야 하며,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이 필요하다.이 거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바로 교회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창조세계를 구속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일을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로 이어졌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속을 나타내 보이시고 전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이뤄가시는 역사의 동역자다.그렇다면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doing)은 교회의 삶(being)에서 나온다.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데서 나온다. 마이클 고힌 박사가 말하듯이, "'선교적'이란 교회의 구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가 문화적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서술하는 것이다"('열방에 빛을', 42-43쪽).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을 성경은 '산 위의 도시'로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안 공동체다. 정의와 공의, 사랑과 긍휼, 화해와 평화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부터 의도하신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고,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모습이다.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모습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사회에 참여해도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의 실재를 보지 못한다.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이 교회의 삶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한낱 이론에 그치고 만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완다는 기독교 인구가 넘쳐났지만 그 믿음이 요청하는 정체성과 사명이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반면에, 초대교회는 작고 연약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주변 세계에 강력한 증거가 됐다. 그들의 삶이 곧 복음이었고, 그들의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듯이 초대교회는 가르침과 교제와 떡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며(행 2:42),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았고(행 2:44~45),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으며(행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7).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가 됐을 때, 그 존재 자체가 복음의 선포가 되었고,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증거가 된 것이다. 결국 교회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선교적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을 어떤 원리로 이뤄가는가?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태초부터 열방에 복이 되기 위해 복을 받은 존재였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임재를 매개하는 공동체다. 레위기 19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택은 윤리적 삶으로 나타나고, 그 윤리적 삶이 곧 선교적 증거가 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라고 하신 명령 뒤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규범들 즉 이웃 사랑, 약자 보호, 공정한 재판, 정직한 상거래 등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명기 4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5~6).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그 지혜와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 위의 도시'로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다.신약으로 넘어오면, 교회는 이 구약 백성의 정체성과 역할을 이어받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결정적 사건 이후에 새로운 특징을 갖게 된다.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선교적 백성이다. 교회는 입술의 선포뿐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드러낸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시작된 새 창조에 동참하는 새로운 인류로서, 옛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현한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정체성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며, 이 예배가 선교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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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3 김광근 - 주님의 발치에 부어드리는 향기로운 희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장 6절전 재산과 다름없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찌하여 허비하느냐"며 분노했지만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상 눈에는 무의미한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받으신 것입니다.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때때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 헛된 수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의 것을 드리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소중한 향유가 주님께 부어질 수 있도록 스스로 옥합을 깬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인 것입니다.성전을 밝히는 등잔의 기름이 늘 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열정도 멈추지 않고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의 발치에 쏟아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질 때 그 집에 향기가 가득했듯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을 깨뜨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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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곁에 머무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요즘 한국에서 뿐 아니라 미주 지역에서도 영화〈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을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가 건드린 지점은 화려한 권력 서사나 복수의 쾌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빼앗긴 어린 왕과, 그를 곁에서 맞이한 한 사람이 서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있다. 왕은 권좌에서 쭟겨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처음에는 계산과 현실 감각으로 움직이던 인물 또한, 점차 왕을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의 울림은 바로 여기에 있다.관객은 강한 왕보다 상실한 왕에게 더 깊이 마음을 내어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보다, 그 자리를 잃고 외로움과 상실감 속에 놓인 존재에게 자신을 겹쳐 본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이들의 내면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 가정에서 말할 자리를 잃은 사람, 공동체 안에서 역할은 남았지만 존재는 잊힌 사람들. 겉으로는 제 자리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유배를 경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곳에서조차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매일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다.그래서 이 영화 속 일상의 장면들이 특별한 힘을 가진다. 밥을 함께 먹는 장면, 사소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 서로의 표정을 읽어 가는 장면이 거대한 사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은 거창한 구호로 회복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고,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 주고, 내 존재가 부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다시 살아난다. 존엄은 높은 지위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곁을 내어줄 때, 사람은 다시 사람답게 선다.이 지점에서 교회를 돌아보게 된다. 교회는 과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할과 기능으로만 이해하고 있는가. 직분은 있지만 대화는 없고, 모임은 많지만 마음을 들을 시간은 없고, 함께 예배하지만 서로의 외로움은 지나쳐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소통하는 교회는 말이 많은 교회가 아니다. 사람을 기능보다 존재로 먼저 보는 교회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를 살피는 교회다.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서 명령만 내리는 왕이 아니었다. 사람들 가운데로 오셨고, 함께 먹고 마셨고, 우는 자들 곁에 머무셨다. 하늘의 영광을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통 역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전달 체계여서는 안 된다. 곁으로 내려오는 동행이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설득의 기술보다 함께 있음의 태도일 것이다.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인정받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책임은 무겁고 마음은 고단하지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자리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쉽게 침묵하고, 더 깊이 홀로 버틴다. 교회는 이런 침묵을 신앙의 미숙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무표정 속에 지친 마음이 있고, 누군가의 과묵함 속에 오래된 상실이 있다. 소통은 말을 잘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상대의 침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영화 〈왕과 사는 남자〉 신드롬은 결국 우리 시대의 결핍을 비춘다. 사람들은 권력을 갈망해서 이 영화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관계를 갈망했기 때문에 반응했다. 군림하는 존재보다 함께 살아 주는 존재를 더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마음을 열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존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진실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이 영화의 바닥에 흐르고 있다.교회가 바로 그 갈망 앞에 서야 한다.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대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잘 말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 주는 사람이 귀한 곳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실패와 침묵 곁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소통하는 교회는 거창한 전략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한 사람의 곁을 지켜 주는 일에서 시작된다.영화 속에서 왕은 권좌를 잃은 뒤 사람을 만난다. 어쩌면 교회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사람을 볼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비로소 소통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소통 속에서 공동체는 다시 살아난다. 진짜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사람답게 세워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왕과 사는 남자〉가 던진 울림은 바로 그 단순하고도 깊은 진실을 다시 붙들게 만든다.이것이 부활절을 앞둔 교회가 회복해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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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동식 칼럼 - AI 시대의 신앙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우리 시대는 제4의 물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농업을 지나 산업을 거쳐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했다가 이제 AI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섭게 세상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AI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와 로봇의 시대는 이전의 물결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검색창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찾았던 시절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ChatGPT, 제미나이 등으로 명시되는 대화형 AI를 통해 지식을 알아갑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료를 순식간에 앉아서 보게됩니다. 고전 자료는 물론이고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록된 문서까지 보게됩니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더구나 검색 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각종 자료와 함께 나의 고민을 풀어줍니다. 그러니 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냐는 소리가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AI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AI의 답변은 접근 가능한 자료의 범위와 학습된 정보의 한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AI는 때때로 그럴듯한 문장으로 답을 구성하지만, 그 내용이 늘 검증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AI를 무서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신해서도 안 됩니다.현재 쓰고 책을 위해 심도있는 질문과 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긴 시간을 씨름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전제가 다르니 접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반복해서 자기주장만 했습니다. 결국 결론에 가서 자료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이만하고 좀더 공부해서 다시 나누자고 했습니다. AI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학습을 하겠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자료 업데이트를 통해서 더욱 강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자료의 싸움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소유한 자료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꼈습니다. AI 시대의 강자는 AI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자기 자료와 분별의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료 없이 AI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사실과 해석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 앞 뒤 구분도 못하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실체가 AI를 통하여 성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AI시대의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신앙이 단지 성경지식을 아는 것이라면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이 단지 나눔이라면 역시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는 것은 주님께서 두 세삼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기뻐하고 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곳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무너진 사람의 심령을 세워지고, 하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은 지성,정서,의지와 창조성과 양심과 도덕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AI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이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줄 수 있습니다.  AI는 똑똑합니다. 탁월합니다. 수많은 정보를 잘 정리하는 능력을 사람이 따라가기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존재하는 자료를 자기 학습해 지식을 넓혀갑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자료에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것에서 답을 줍니다. 여기에 우리가 더욱 깊이 의존해야 할 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만남이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편히 쉬 수 있는 곳은 주님의 품입니다. 여기 저기 답이 있다고 말하는 시대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답이고, 유일한 위로임을 인식하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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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십자가의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기는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예기치 못한 인생의 시련이 찾아온다.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관계의 문제,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등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고난의 시간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 중에 ‘킨츠기’라는 것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 파편을 이어 붙인 뒤 갈라진 틈을 금이나 은으로 메워 복원하는 기술이다. 깨진 자국을 비슷한 색으로 덧칠해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눈에 띄는 금으로 그 틈을 굵게 채워 넣는다. 이렇게 복원된 도자기는 깨지기 전보다 강도가 높아질 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세상의 험한 풍파에 쉽게 금이 가고 부서진다. 세상은 깨어진 것을 실패라 부르며 쓸모없게 여기지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고난의 틈새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가장 값진 금을 채워 넣으시고, 우리를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빚어주신다. 이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신앙의 교훈이 있다.첫째, 우리의 깨어진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고난 받지 않은 척, 실패하지 않은 척 포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자신의 깨어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라고 말씀한다. 삶의 무게로 무너진 마음,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 해결하지 못한 삶의 문제들을 십자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쏟아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친히 품어주신다.둘째, 내 삶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통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고난은 더 이상 흉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를 증명하는 거룩한 흔적이 된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라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응답하셨다. 킨츠기 도자기의 굵은 금빛 선처럼 내가 가장 약해져서 무너졌던 바로 그 자리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은혜의 자리가 됨을 믿어야 한다.셋째, 회복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위로자가 돼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로 나의 깨어진 틈이 메워졌다면, 이제는 주변의 고난 받는 이웃들을 돌아봐야 한다. 예수님이 친히 찔림과 상함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고치셨듯, 내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통로가 된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 경제적 위기로 낙심한 자들에게 다가가 십자가의 사랑을 전할 때, 모든 교회가 상처 입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진정한 치유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고난은 결코 우리 삶의 끝이 아니다. 이번 고난주간이 은혜로운 회복의 시작이 되어서, 우리를 얽매는 모든 절망과 고난이 십자가의 은혜로 온전히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고난이 찬송으로, 깨어짐이 거룩한 걸작품으로 변화되는 부활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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