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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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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2 김광근 - 깨어진 자아 위에 흐르는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시몬 베드로가 이르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 요한복음 13장 36절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살아있는 자아를 보셨고,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결단과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믿지만, 철저히 자아가 깨어지지 않고는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결국 베드로는 처참하게 무너졌고, 새벽 닭이 울 때 그의 자아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주님이 이 수치스러운 과정을 허락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버려야만 비로소 주님의 은혜를 붙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깨어진 자아의 틈 사이로 더 깊은 은혜의 물줄기를 부어주십니다.은혜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연약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롭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는 과정을 통과할 때 우리는 진짜 은혜를 맛보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내 의지보다 "주님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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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7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전쟁 중에 올려 드리는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1 오늘도 새날을 선물로 받아 기대와 희망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며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말씀을 하셔서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말씀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심을 사라를 통해 확인되는 순간 100프로 신뢰하며 감사를 토해 냅니다.3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다가 벼랑 끝에 가서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한시도 나를 멀리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 감사가 터지게 됩니다.4 세계가 전쟁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계시록과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따라서 나라를 위한 기도제목도 다소 변경되어 갈 때마다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기도의 내용을 구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대부분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불편하고 괴로울 때도 있어 망설여집니다. 불편하면서도 강하게 밀려오는 메시지에 결국 굴복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하게 하실 때면 감사는 두배로 커집니다.6 신앙은 도박의 성격이 있다고 합니다. 미래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그 길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한 발자국을 뗄 때의 불안감. 이것으로 시작된 순종의 길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전에 없던 감사와 감격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감사를 드립니다.7 아브라함의 생애를 볼 때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할까 한 번도 믿어 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 그 하나님이 떠나라고 한다고 어떻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8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제1계명으로 강조하십니다.아브라함을 우상의 세계에서 꺼내어 참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친히 보여 주셨으니 내게 숨어 있는 우상들을 모두 꺼내어 때려 부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9 예언서를 공부할 때마다 재림 찬양을 부르면서도 수시로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가까이 원합니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과 함께 신앙의 정조에 대한 말씀이 기억나 감사를 드립니다.10 "세상 풍조는 나날이 바뀌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 는 찬송을 부르며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날마다 변해오는 세상의 풍습에 젖지 않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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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주성철 컬럼 - 인생의 새벽을 깨워라 크리스천헤럴드2026.02.20
    지난해 말 아내와 함께 덴버를 다녀왔습니다. 먼저 섬기던 교회에 저의 후임으로 온 목사가 은퇴를 한다고 해서 우리 내외를 초청했습니다. 년말도 되고 해서 우리는 자동차로 라스베가스의 처형 댁에서 하룻밤 쉬고 덴버로 갔습니다. 오랫만에 편도1,100여 마일 되는 거리를 운전하여 갔습니다. 오랫만에 보고싶은 사람들도 보고, 예전에 덴버지역에서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1997년에 덴버에 갔을 때, 덴버지역에 세대 교체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령에 목사님들이 모두 은퇴하고 젊은 사역자들로 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덴버를 다녀오면서 나름대로 2026년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2026년에 해야 할 일들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목표를 세우고 심지어 표어까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깨우는 일에 부족한 종을 사용하시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새벽을 깨워라”인데, 영어로도 걸맞는 표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Awakening the Dawn of Your Life”란 말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이 문구를 생각하면서 나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먼저 제 자신의 인생에서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는 것과, 사역으로 주위에 안일한 생각과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잠자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하여 그들을 깨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가운데 마치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 속에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즐기는 기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위 환경을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과 삶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방문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 또는 영적인일 보다는 친교가 강조되고, 모이면 먹고 마시는 일에만 치중하다보니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도 모르는체 그저 한주 한주 지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후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으며, 정부는 정부대로 현재 노인들에게 좋은 혜택을 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후세대가 그 모든 빚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은 알지 못한채  정부에서 주는 돈을 받고 마냥 즐거워만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같은 상황입니다. 노인들 가운데 정부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자산을 자녀들의 명의로 옮기고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랜지 카운티 어느 한 노인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주차장에 주차해 있는 자동차들이 거의 모두가 고급 승용차였습니다.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는 노인들이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을까! 물론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정부에서 웰페어를 받고 계신분들이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큰 괴로움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살면서 크리스찬들이 성소수자나 진보주의과 인본주의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마음이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주는 권리를 찾지못하고 그 권리를 잃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엄연히 미국 헌법으로 우리의 권리를 세울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타협하고, 정치 기후로 타협하고, 재정적으로 타협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진리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무디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깨워야 하겠다는 마음이 새해를 맞으면서 마음에 큰 도전으로 왔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라 하시는 충동이 일고 있습니다. 죄악이 범람한 이 세대 속에서 말씀 그대로 이 세상을 본 받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타협하며, 적절한 이유를 대며 믿음을 타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한 말씀이 마치 나의 뒤통수를 방망이로 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새벽을 깨운다”라고 했을 때 영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영적인 것은 물론이고, 우리 커뮤니티 속에서, 가정속에서, 학교나 직장에서 인생에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영혼들을 깨워야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바른 말 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역류해 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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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2.19
    한국에서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이 뜨겁다. 두쫀쿠 한 입이 혈당을 확 끌어올릴 만큼 달고 진한데도 사람들은 그 자극을 위로처럼 찾아다닌다. 한 입 베어 물면 쫀득하고 바삭한 식감이 동시에 터지고, 사진과 영상으로 옮기기 좋은 비주얼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운맛 열풍이 있었다. 혀가 얼얼해질수록 “오늘도 버텼다”는 기분을 나누는 문화가 생겼고, 누군가는 그 매운맛을 스트레스의 배출구로 삼았다. 맛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흐름은 같은 곳을 향한다. 자극은 언제나 마음의 빈자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꽤 허기지다.요즘의 음식 트렌드는 단순히 “뭐가 맛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먹는 행위가 감정을 번역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불안하다, 답답하다, 미래가 막막하다는 말을 길게 풀어내기엔 우리는 너무 지치고, 사회는 여전히 감정을 설명하는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감정은 맛으로 우회한다. 매운맛은 말로 못 내뱉는 분노와 압박을 대신 내뱉게 하고, 달콤하고 과장된 식감은 지친 마음을 잠깐이라도 달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자극적인 음식은 감정의 스위치를 잠시 바꿔주는 손쉬운 장치가 된다.또 하나의 배경은 관계의 변화이다. 1인 가구가 늘고 혼밥이 일상이 되면서, 식탁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예전에는 밥상머리가 하루의 온도를 나누는 자리였다. 국을 떠주고, 얼굴을 보고, 말이 막히면 침묵도 함께 견디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의 식탁이 비면 화면이 그 자리를 채운다. 먹방과 소셜미디어 속 트렌드 음식은 심리적 허기를 잠깐 달래준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느낌을 흉내 내고, 유행에 참여했다는 소속감을 준다. 그러나 화면 속 공동체는 따뜻해 보여도 나를 알아주지는 못한다.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내 눈빛을 읽지 못하고, “괜찮냐”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아 주지 못한다.그래서 매운맛 열풍에서 나타난 ‘고통의 연대’가 이해된다. 취업난과 경쟁,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청년들은 매운 음식을 통해 현실 감정을 공유하고 해소한다. “나도 힘들다”를 직접 말하기 어려우니 “나 이 정도 매운 것도 먹는다”로 돌려 말한다. 함께 맵부심을 나누며 서로를 확인한다. 연대이긴 하다. 하지만 슬픈 연대이기도 하다. 고통을 나누는 연대는 있는데, 삶을 함께 건너는 연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극을 함께 소비하는 것으로는 내일을 살려낼 손이 되기 어렵다.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교회는 다시 식탁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말씀과 기도만이 아니라 함께 떡을 떼며 삶을 나눴다. 식탁은 친교 프로그램이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를 몸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오늘의 교회는 자리는 많지만 식탁이 적다. 자리는 앉는 곳이고 식탁은 마음을 내려놓는 곳이다. 행사로 모으는 것보다 작은 밥상을 반복해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예배 후 인사로 끝내기보다 “요즘 잠은 자냐”는 질문이 필요하다. 정답을 건네기 전에 사연을 끝까지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교회는 트렌드를 비웃지 말아야 한다. 두쫀쿠나 매운맛을 “요즘 애들 유난”으로 치부하는 순간, 교회는 시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친다. 트렌드는 욕망의 포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핍의 언어이기도 하다. “자극이 없으면 못 버틴다”는 말은 삶의 통증이 크다는 뜻이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관계가 피곤할 만큼 상처가 많다는 뜻이다.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다. 교회는 이 신호를 복음의 언어로 번역해 줘야 한다. 판단이 아니라 해석으로, 훈계가 아니라 동행으로 응답해야 한다.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연대를 소망의 연대로 바꾸는 일이다. 매운맛이 잠깐의 엔도르핀을 줄 수는 있다. 달콤한 디저트가 한숨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잠깐의 자극이 아니라 지속되는 관계이다. “누구나 다 힘들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은 내가 네 편이 되어주겠다”로 이어지는 연대가 필요하다. 그 연대는 대형 프로그램이 아니라 습관에서 시작된다. 한 주에 한 번 함께 밥을 먹는 습관,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습관, 결석을 영적 나태로 단정하지 않고 삶의 파손으로 읽는 습관이 필요하다.소통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교회가 다시 식탁을 회복할 때, 화면이 대신하던 위로를 사람의 얼굴이 건네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소통하는 교회’는 유행을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라, 시대의 외로움에 대답하는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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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왜 이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즈인가?> 크리스천헤럴드2026.02.19
    우리는 여전히 부흥을 사모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많은 교회가 부흥을 기도하고,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안팎에서는 분명한 위기의 신호들이 감지된다.이는 부흥을 부정하기 위한 진단이 아니라, 부흥을 더 진지하게 붙들기 위한 질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부흥을 말하면서도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미국 사회의 종교 지형 변화는 이미 공신력 있는 연구들을 통해 분명히 관찰되고 있다.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23–2024 년에 실시한 종교 지형 조사(Religious Landscape Study)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62%가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무종교인의 비율도 약 30%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0 년대 초반과 비교할 때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지표이다.특히 15 세에서 29 세 사이의 젊은 세대에서 종교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며, 종교적 가정에서 성장했음에도 성인이 되면서 무종교인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퓨리서치는 이러한 흐름을 분석하며, 향후 종교적 부흥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뒷받침할 통계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한다.이러한 위기는 미국 교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회 역시 유사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주요 교단 통계와 교계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 10 여 년간 한국 교회의 교인 수는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를 보여 왔다. 예컨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경우, 2012 년 약281 만 명이던 교인 수가 2023 년에는 약 230 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집계 방식과 기준 연도에 따라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교세가 장기적인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 자체는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교세 감소와 더불어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역시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2023 년 실시한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1%에 불과한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약 74%에 달했다. 교인 수 감소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구조적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현실이다.불투명한 재정 운영, 교회 지도자들의 삶에 대한 문제 제기, 그리고 성장 제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깊은 내적 과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이러한 시대적 현실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인물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18 세기 미국의 신학자이자 목회자, 그리고 선교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 역시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신앙은 형식화되었고,교회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에드워즈는 깊은 경건과 치열한 신학적 성찰, 그리고 실제적인 목회와 선교의 헌신을 통해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중심 인물로 쓰임 받았다.에드워즈는 강단에서 부흥을 외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스톡브리지(Stockbridge) 인디언 공동체 한가운데서 복음을 삶으로 살아낸 선교사였다. 그는 교회의 회복을 외형적 성장이나 제도 개혁에서 찾지 않았다. 문제의 뿌리를 하나님 중심성을 상실한 신앙, 다시 말해 정체성의 붕괴에서 찾았다. 에드워즈에게 신앙이란 종교 활동이나 개인적 체험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 방식 그 자체였다.오늘 우리가 에드워즈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부흥의 상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교회의 위기를 사회 구조나 도덕적 타락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할 때, 교회는 필연적으로 힘을 잃는다고 보았다.이러한 점에서 그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과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은 물론, 그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신앙인의 삶의 자리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설교자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과 더 깊이 관련된 인물은 없으며, 이 시대에 이만큼 필요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늘 교회의 상황을 고려할 때 결코 과장이 아니다.부흥을 사모하는 우리는 왜 교회가 힘을 잃었는가를 묻게 된다. 왜 신앙은 삶의 중심에서 밀려났는가? ”왜 부흥을 말하지만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가?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은 이 질문들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전략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 하나님 중심의 삶, 그리고 세상 속으로 보내심 받은 존재라는 선교적 정체성의 회복에서 시작된다.부흥을 사모하는 시대이기에 우리는 더욱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으며, 동시에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오늘의 교회와 미국 한인 디아스포라 신앙인에게 여전히 가장 신뢰할 만한 사유의 기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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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1 김광근 - 도둑맞은 밤을 지나, 은혜의 아침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6.02.19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가져야 해, 남들보다 앞서야 해"라고 속삭이며 우리의 평안과 감사를 야금야금 훔쳐 갑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하려는 '도둑'의 교묘한 전략이라고 말씀합니다. 겉보기엔 바쁘게 살아가지만, 세상의 헛된 것을 쥐려 애쓸수록 속사람은 점점 공허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도둑에게 마음을 빼앗긴 훈적입니다.그러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지나면.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의 문을 열고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더 풍성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풍성함은 단순한 물질적 부요함이 아닙니다.비록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작아 보여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는 내면의 넉넉함이며, 풍랑 위에서도 깊이 잠드셨던 주님의 그 압도적인 평안이 내 심령에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오늘 하루 결핍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넉넉한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세상의 비교를 단호히 거절하고 오직 선한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빼앗겼던 평안을 되찾고, 주님이 주시는 차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넉넉히 이기는 복된 하루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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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나오미를 기쁨의 대명사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6.02.19
    1 오늘도 귀한 주일 허락하셔서 함께 예배하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 4:7)입니다. 어떤 조건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기쁨을 두고 가신 주님으로 기뻐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3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고 권면하셨습니다. 바울이 어떤 비결을 알려 준 것이 아니라 주안에 있기만 하면 기뻐할 수 있음을 강조하셨으니 감사합니다.4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았지만 오히려 쓴 물 인생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오미의 이름을 회복시켜서 기쁨의 대명사로 만드신 하나님의 결론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새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5 룻은 이방여인으로서 믿음의 어머니를 따라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온 여인입니다. 보잘것없는 여인을 통해 역사는 바뀌었으니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매우 역설적이기에 절망주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어 감사를 드립니다.6 지금은 가장 열악한 조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재료 삼아 가장 멋진 스토리를 써내려 가십니다. 성경에 소개된 인물들의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하나님은 역경을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십니다. 요셉의 감옥을 통해 그의 인격과 통찰력을 훈련시키셨고 모세의 광야를 통해 리더십훈련을 시키는 사명자로 만드신 분이 나를 강한 훈련장으로 밀어 넣으사 사역자로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8 해마다 일 년에 가장 큰 행사로 사모데이를 치를 때마다 모든 에너지가 쏟아집니다.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기에 곳곳에서 함께 하시는 분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고 주님의 지도하시는 손길 따라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9 난관 앞에서는 엎드리게 하시고 난관을 넘어서는 앞으로 전진하게 하시니 그럴 때마다 주님이 가까이 노사 내 손 잡아 주시니 힘겨워할수록 더 강한 힘을 위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손길을 보내 주시어 감사합니다.10 주님이 이미 내 안에 기쁨을 넣어 주셨으니 이 기쁨은 세상 포도주와 곡식보다 더 낫다고 하시는 말씀 기억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오직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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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0 김광근 - 기도가 막힌 자리에서 시작되는 노래 크리스천헤럴드2026.01.26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간절한 신음조차 내밸기 힘든 침묵의 시간.. 우리는 '나의 신앙이 부족한 건 아닐까' 자책하며 고개를 멸구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자리가 바로 성령님이 가장 뜨겁게 일하시는 현장이라고 말씀합니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틀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절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합을 멀리서 지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우리가 "주님." 하고 이름만 부른 채 눈물 흘릴 때성령님은그 눈물 속에 담긴 말 못 할 아픔을'하늘의 언어'로 통역하여 보좌 앞으로 가져가십니다.우리의 기도가 멈춘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우리 안의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우리를 붙드시고 끝내 살려내십니다사랑하는 여러분,혹시 지금 기도의 문이 닫힌 것 같아 답답해하고 계십니까?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주님의 품에 조용히 기대어 보십시오세련된 문장도, 긴 미사여구도 필요 없습니다.여러분의 깊은 한숨을 기도로 바꾸어 드리는 성령님의 손길을 신뢰하십시오.내가 침묵할 때도 나를 위해 일하시는 그분의 기도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그신실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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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함께 걷는 용기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1.26
    며칠 전 신문 기사 한 편을 읽었다. AI가 사무·전문직 영역으로 빠르게 들어오면서, 오히려 배관·전기·건축·항공정비 같은 기술직이 주목받고 커뮤니티 칼리지 관련 과정 수강생이 크게 늘었다는 내용이었다. 학사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갖춘 사람이 스타트업을 떠나 건설기술을 배우러 갔다는 대목이 특히 눈에 남았다. “기술이 나를 대체할 수 없는 경력을 쌓고 싶다”는 말이 요즘 시대의 공기를 정확히 붙잡고 있다고 느꼈다.사람들이 자꾸 “불안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 담겨 있다고 보았다. 불안은 “일자리가 줄어들까”에 머물지 않는다. 더 깊은 곳에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내려간다. 결국 AI 시대의 불안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번진다. 교회가 이 불안을 외면하면, 신앙은 삶과 분리된 공허한 말이 된다.AI의 영향이 커질 거라는 전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AI가 전 세계 일자리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기회와 함께 불평등 심화의 위험도 지적한다. 이런 흐름 앞에서 교회는 단순히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치부하고 지나갈 수 없다. 성도가 흔들리는 지점이 곧 목회의 자리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요즘 교회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너무 빨리 답을 말하려는 습관이다. 누군가 “일이 불안하다”고 말하면 곧장 “기도하면 된다”고 응답한다. 물론 기도는 핵심이다. 그러나 그 말이 상대의 현실을 건너뛰는 방식으로 쓰일 때, 위로는 오히려 단절이 된다. 소통하는 교회는 먼저 묻는다. “요즘 무엇이 가장 두렵냐?”, “일터에서 무엇이 달라졌냐?” 이런 질문은 상담 기법이 아니라 목회 그 자체다.신문 기사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기술직 분야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장에서 손으로 만지고, 몸을 움직이며,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즉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육체 노동의 부활”만이 아니다. 관계와 책임과 돌봄과 판단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회적 고백이다. AI는 문장을 만들 수 있으나 회개의 진심을 대신 살지 못하고, 정보를 정리할 수 있으나 관계의 무게를 대신 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AI가 못 빼앗는 일”은 결국 인간다움의 영역이다.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의 태도는 AI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배타가 아니어야 한다. 기술 자체를 악으로 단정하거나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다음 세대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교회는 ‘반기술’이 아니라 ‘친인간’의 자리에서,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책임질지 기준을 세우며 묻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여기서 교회의 역할이 선명해진다. 첫째, 교회는 ‘직업’을 신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주중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일의 언어는 삶에 붙지 않는다. 교회는 “직업”를 소명으로, “생산성”을 청지기됨으로, “재교육”을 제자훈련의 확장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자기 일터를 하나님 나라의 현장으로 다시 보기 시작한다.둘째, 교회는 전환의 길목에서 실제적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믿음으로 버텨라”만 말하면 공허해진다. 전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소그룹을 만들고, 이력서·면접을 돕고, 같은 분야 선배들이 멘토가 되게 하며, 필요하면 돌봄도 연결해야 한다. 이는 과도한 개입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구체화다.셋째, 교회는 AI 윤리와 정의를 ‘현장 언어’로 말해야 한다. 누가 이익을 가져가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존엄이 훼손될 때 무엇을 말하겠는가. 교회는 인간의 존엄을 기준으로 질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하지만 이런 역할을 하려면 교회 내부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프로그램 중심, 행사 중심, 건물 중심으로 움직이는 방식만으로는 성도의 파편화된 삶을 붙잡기 어렵다. 주중 목회를 강화하고, 실직·전환·번아웃 같은 현실을 다룰 돌봄 체계를 갖추며, 세대가 서로의 전환을 돕도록 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AI를 활용한다면 더더욱 투명해야 한다. 무엇을 AI에 맡기고 무엇을 인간의 책임으로 붙들지 기준이 분명해야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다.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교회는 무엇을 대체 불가능하게 제공하겠느냐’이다. 건물도 콘텐츠도 대체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공동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붙잡아주는 공동체, 불안 속에서도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라고 끝까지 말해주며 그 말을 실제 도움과 연결하는 공동체는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소통은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함께 지겠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그래서 소통하는 교회는 기술의 속도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의 속도를 지킨다. 불안한 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배울 수 있게 돕고, 존엄을 잃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것. 그 자리가 바로 AI가 절대로 빼앗을 수 없는 교회의 자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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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데이터 크리스천헤럴드2026.01.26
    2025에 가장 화제가 된 사건 중 하나를 꼽는다면 AI 일 것이다. 사람을 대체할 만큼 진화된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놀라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 곁에 가까이 왔고 인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전보다 빠르고 정확한 검색, 논리적 대화능력, 자율주행과 로봇 등,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일들도 인공지능이 대신하고 있다. 많은 일자리가 이미 AI 에게 빼앗겼고 인간의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왔다. 인공지능이 이렇게 빨리 진화한데는 데이터의 힘이 크다. 그래서 AI 와 함께 등장하는 단어가 데이터이다. 인공지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데이터이다. AI 가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가 많을수록 학습할 기회가 많아지고 그 데이터를 통해 배우고 시뮬레이션으로 경험하며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 아무리 똑똑하고 인간보다 백만 배 빠른 프로세싱 능력이 있다해도 그 능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데이터가 있어야 학습하고 연습해서 더 정교하고 정확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데이터는 정보이고 경험이다. 사람이 경험을 통해 배우듯이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가상현실세계에서 경험하며 배우고, 계속해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통해서 끝임 없이 발전한다. 대기업들이 천문학적 돈을 써가며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이유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인공지능을 학습하기 위해서이다. 데이터센터 안에는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성공한 데이터만 아니라 실패한 데이터, 예외적인 상황의 데이터 등, 모든 데이터를 학습하기 위해 수집한다. 때론 실패한 데이터가 더 중요하다. 이유를 분석해서 실수를 줄이고 성공의 확률을 높인다.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원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판단을 할 때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경험을 쌓을 수 없다. 경험을 해야만 배울 것들이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게 된다. 좋은 경험 나쁜 경험 실패한 경험 좌절된 경험, 모두 다 돌아보면 필요했던 경험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다. 이 모든 경험은 곧 우리의 데이터이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을 하는데 도움이 된 데이터들이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이 없다면 배운 것도 없는 것이다. 가장 쓸모없는 데이터는 바로 노 데이터이다. 무언가를 배우고 학습할 기회조차 없다. 그래서 도전이 겁이 나고 실패가 두렵고 손해를 볼 것 같아도 해보아야 한다.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 차라리 실패를 해서 그 경험으로 한가지 라도 배우는 게 낫다. 실패도 성공만큼 중요한 경험이다.인공지능 개발에 선두를 달리고 있는 기업 중 하나인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 엑스 회사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회사가 선택한 획기적인 도전은 무한한 성공을 향한 실패의 기회이다. 한 예로 스페이스 엑스 로켓이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폭발을 했는데 관제탑에서 발사 팀 수십 명이 마치 성공을 한 듯 환호를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한다. 언뜻 보면 이해되지 않는 모습의 이유는 그들은 이룬 성과에 집중하고 가치를 매겼기 때문이다. 이전 발사보다 로켓이 더 높이 멀리 날았다면 성공을 향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Starship 프로그램 자체가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전략으로 설계되었고 이는 성공할 때까지 시도할 수 있는 사실상 무제한의 도전 기회가 보장되었다. 무한한 실패를 허용하는 이유는 바로 데이터를 얻기 위함이다. 데이터를 통해서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실패해도 얻는 것이 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일생동안 기회를 주시고 경험을 하게 하시는 이유도 같다. 주신 기회를 통해 최대한 많은 경험하고, 성숙해지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생은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쓸모 없는 인생이다. 포도원의 비유를 보면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한 달란트를 받은 일꾼을 나무라시는 이유도 그 태도 때문일 것이다.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지은 최첨단의 데이터센터일지라도 그 속에 데이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우리도 일생동안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을 가졌다. 삶의 창고가 비어 있고 소중한 데이터가 쌓여 있지 않다면 인생을 헛 산 것이다. 데이터가 없는 데이터센터처럼, 껍데기만 있는 인생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된다. 소중한 기회를 얻은 나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고, 나와 같이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고,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 경험들은 하나님을 더 알게 한다. 위기 때 지켜 주신 하나님.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위로의 하나님, 환란에서 건져내 주신 하나님, 이 모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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