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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종"에서 "아들"로

작성일 : 202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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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개 주인이 아닌 목숨도 내어 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인 것

대학생 때였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였다.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할 때였다. 비록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이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해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사야서 43:21 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 믿음이 어릴 때 읽는 이 성경 구절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전지전능한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와 같은 기능적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국 나란 존재는 저 높이 계신 전지전능한 신께서 정해놓는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별것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수많은 창조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사는 이유가 이미 정해졌다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자니 왠지 인간의 삶이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이용하시는 분인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늘 그러듯 키우던 작은 애완견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달려오는 녀석에게 과자를 하나 던져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서서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서글퍼졌다. 순간 그 개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과자를 던져준 사람은 하나님 같았고,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받아먹는 개는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자존감도 생각도 없이 저렇게 단순하게 사는 모습이 나였던 것이다. 갑자기 허탈해지며 이것이 신과 인간과 관계의 한계인가, 이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인가, 결국 인간은 신이 던져주는 복이나 은혜를 바라보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그리곤 개를 쳐다보며 슬픔에 젖어, “어쩜 넌 나와도 같구나” 라고 말하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바라보고 있던 개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지며 쓰다듬어 주려고 몸을 낮추고 손을 내미는데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개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질문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내가 미쳤어 개를 위해 죽게!” 소리치며 기막혀 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개와 개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목숨까지 내어 줄만큼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며 지키신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죽음으로 증명한 사랑이다.

성경을 다시 보니 이사야서 43:21절을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43장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향한 축복과 약속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예배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나에게 찬송 할 이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초점이 거기에 있다. 놀라운 사랑과 약속을 받은 자의 벅찬 감동의 반응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너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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